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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丁若鏞, 1762년~1836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ㆍ저술가ㆍ시인이다.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수시(美庸), 호는 다산(茶山)ㆍ사암(俟菴)ㆍ탁옹(籜翁)ㆍ태수(苔叟)ㆍ자하도인(紫霞道人)ㆍ철마산인(鐵馬山人)ㆍ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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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
【1762년 출생이후 1782년까지】
【1762년】
-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이 태어난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거쳐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현재는 생가터와 실학박물관 등 정약용 유적지가 잘 조성되어있다.
-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윤소온(해남 윤씨, 조부 윤두서, 부친 윤덕렬)씨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며, 정약용은 4남 2녀 중 네 번 째 아들이었다. 정약용이 태어난 해에는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일이 벌어졌다. (5월) 부친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고 그해 6월에 태어난 정약용의 아호를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 외가의 학문과 친가의 실천이 다산의 이론과 실천에 도움을 준 것이다.
【어린 시절】
- 정약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부친 정재원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형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맥을 잇는 녹암 권철신으로부터 사사했으나 정약용은 부친의 가르침 이외에 독학하였다. 이가환, 이승훈과 교류하게 되면서 이익의 학문을 접했으나 유작을 통해서 사숙(私淑)했을 뿐이다.
- 네살에 천자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 ‘바다’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다.
-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냈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삼미(三眉)라는 별명은 어릴 적에 걸렸던 천연두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세 개 생겼다는 뜻이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열 살 때 경서와 사서를 모방해서 작문한 글이 자신의 키만큼 쌓였다고 한다.
-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사가 명의였던 이헌길의 진료로 인하여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776년】
- 1776년(15세) 풍산 홍씨와 결혼하였다. 결혼하여 처가에 왕래하기 위해 서울을 자주 드나들면서 이때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같은 해 아버지가 다시 벼슬을 하여 호조 좌랑이 되었으므로 서울에 집을 세내어 살았다.
-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승지 혼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이었다. 이승훈도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영향을 받아 정약용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으로 성호 이익의 학문에 연을 맺었다. 자연스럽게 남인 소장파 학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성호 이익 문하에서 학습하여 학문적 명성이 자자한 권철신과도 연을 맺게 된다. 또한 이들이 천주학과 서양학문을 많이 연구하는 터라 정약용도 자연스럽게 이를 접하게 되었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1777년】
- 1777년 화순 현감이 된 아버지를 따라가서 화순현 북쪽에 있는 동림사에 가서 형 정약전과 함께 서책 학습에 매진했다.
- 권철신이 주도하여 1777년과 1779년에 경기도 양주에 있는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여러날에 걸쳐 서학교리 강습회를 열었는데, 정약용은 이벽, 정약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학문적 호기심에 서양학문과 함께 천주학을 접했다.
【1780년】
- 1780년(18세) 아버지가 경상도 예천군수로 부임하자 예천에 가서 살았다.
【1782년】
- 1782년,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한 후 과거공부에 전념하였다.
【과거 합격 이후 신유교난 이전까지】
【1783년】
-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 선정전에 들어가 최초로 정조를 만났다. 매달 치르는 시험과 열흘마다 치르는 순시(旬試)에 매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서 책과 종이와 붓을 상으로 하사받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 9월에 장남 정학연이 태어났다.
【1784년】
- 여름에 정조에서 〈중용강의〉를 바쳤다.
- 1784년 4월에 큰 형수의 제사에 참여했다가 귀경하면서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천지창조의 기원, 영혼과 육신, 생사의 이치에 관한 이벽의 설명은 놀랍고도 오묘하여 즉시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책을 여러권 탐독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천주교와의 인연은 곧 악연이 되어 훗날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 1784년, 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인이 되었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귀국한 이승훈이 서울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모임인 ‘명례방공동체’를 운영하였는데 정약용도 이 모임은 참석하였다. 그러던 중 1785년 초에 포졸들에게 이 비밀모임이 발각되어 형조에 끌려가는 명례방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 중인 신분인 역관 김범우만 투옥되고 정약용을 비롯한 양반 출신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죽고, 이벽은 그의 부친과 갈등 끝에 식음전폐하다 사망했다. 이승훈은 가문의 압박 속에 배교했으며 모임의 주축이었던 양반 출신들이 모두 떠나자 ‘명례방공동체’는 와해되었다. 이때 정약용도 일시적이나마 배교했으나 훗날 천주교인들과 은밀하게 교제를 재개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1787년】
- 반회사건. 1787년(정조 11) 10월경,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錫泰)의 집에서 정약용은 이승훈, 강이원 등과 은밀히 천주교서적을 연구, 토론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안 이기경(李基慶)이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알리자,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그로 인하여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천주학 도서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되어 조정에서 그 폐해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 이 당시 조선에는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이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는데, 충청도 지방의 산골마을에까지 천주교 서적이 보급되어 있었다.
【1788년】
- 1788년에 8월에 이경명이 서학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다. 아울러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학서적을 색출, 소각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반회사건이 발생한 직후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천주학을 멀리하라고 명했다. 정약용은 정약전과 함께 아버지 말씀을 따랐으나 정약종은 천주학을 내려 놓치못했다.
- 그동안 정조는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지난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극형을 명한 후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서적을 소각하여 불온한 서양사상의 전파를 차단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이 사건을 정쟁화하며 사건을 증폭시켰으며 남인들조차 공서파와 신서파로 분열하였다.
- 한편 천주교가 사악한 종교로 낙인이 찍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그러나 윤지충과 친척이었던 관계로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집안내에서도 약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이번 사건 발생직 후 배교를 했으나 셋째 형 정약종은 반회사건과 신해박해로 전국이 소란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제사참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1789년】
- 1789년(정조 13년), 27세 되던 해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1791년】
- 1791년 신해박해 때 공서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정약용의 집안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가쪽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조상제사 거부는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는 유교이념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윤지충과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은 참수당했다. 평택현감으로 있던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은 삭탈관직 당했다.
【1792년】
- 30세가 되던 해인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죽는다.
-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정조가 청나라에서 수입한 기기도설을 전해주고 연구하도록 해서 이를 바탕으로 거중기와 녹로(轆轤)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다. 당시 그가 지은 한시《적성촌》은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한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1795년】
- 1795년 을묘박해 사건이 벌어졌을 때 모함을 받아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 부사 등을 지냈다.
- 1795년 6월, 포도청이 밀입국후 은밀히 활동하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를 체포하는데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관련자들이 체포되여 선교사의 도피처를 추궁받았으나 이들은 끝까지 함구하였고 모진 고문끝에 옥사하였다. 조용히 지나가는 듯하던 사건은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선교사 주문모 체포의 기회를 놓쳤는데, 이는 포도대장의 경솔함과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한 의혹이 있어 보이니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ㆍ이가환ㆍ정약용이 주문모 도주사건에 연류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 노론 벽파의 공세가 빗발치자 정조는 한발 물러서게 되었는데, 결국 1795년 7월 25일에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충청남도 홍주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청지역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터라 정조는 이 지역으로 이들을 보내어 교세 확산을 막음으로 천주교에 심취했었던 과오를 속죄하고 지방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의 예봉도 차단하려 내린 초치였다. 정약용은 무려 7품계나 떨어지며 체면이 몹시 구겨졌다. 그러나 정약용이 금정에서 교세 저지를 위해 펼친 노력은 실효를 거두었고 충청지역 천주교계의 거물인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도 세웠다.
【1799년】
-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 곡산 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이라는 농업노동자의 조세저항 운동인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다. 법학자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용기를 격려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 형조참의를 제수받아 재직하던 중에 대사간 신헌조가 형 정약전을 부당하게 탄핵하자 ‘자명소’를 올리고 1799년 7월 26일에 사직하였다.
【1800년】
-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1800년 초에 낙향하여 마재에서 지내던 중 6월 28일에 정조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급하게 상경하였다. 국장을 치루는 동안에 독살설 등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며 어수선해지자 정약용은 처자를 마재으로 내려보내고 홀로 서울에 머물면서 정국을 살폈다. 겨울에 주상의 졸곡(卒哭)이 지나자 낙향하였고, 오직 초하루와 보름날 벼슬순서에 따라 차례로 열을 지어 곡하는 곡반(哭班)에만 참석하였다. 그 나머지 시간은 고향집에서 경전을 읽으며 지냈다.
【신유교난으로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
【1801년】
- 염려했던대로 어린 순조의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가 1801년 음력 1월 10일에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며 남인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했다. 오가작통법을 적용하고 역율로 다스리라는 엄명이 전국에 떨어졌다. 정순왕후는 과거에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어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었기에 정조가 즉위한 후 집안은 몰락했고 오라비 김귀주가 귀양지에서 사망하며 정조와는 원수지간이었다. 이런 정순왕후의 목표는 정조 때 성장한 남인을 몰아내고 재기하지 못하도록 박멸하는 것이었다. 선왕 정조는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 남인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좋은 명분이 되었다.
- 노론 벽파의 최우선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젊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이가환의 가문이 조상 때부터 있었던 노론 벽파와의 악연 때문으로 이가환은 노론벽파가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었다. 이가환은 1791년 진산사건 직후 배교하며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노론 벽파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가 원했던 것은 이가환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 정약용은 가슴 졸이며 지내던 중에 셋째 형 정약종이 서적과 서찰 등을 숨기려다 관아에 적발되어 모두 압수당했다는 소식을 1월 29일에 접하였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월 8일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국문장에서 단지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을 뿐이었기에 이미 1791년 진산사건(신해박해)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노리는 노론 벽파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2월 11일에 정약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밖에도 이승훈, 최창현 등 많은 이들이 투옥되었다.
- 정약용은 1791년 진산사건에 충격을 받고 천주교를 버렸다. 1797년 천주교도로 오해 받자 《자명소》를 써서 반박했고 1799년에는 《책사방략》을 저술하여 배교를 분명히 한적이 있다. 또한 ‘동부승지 사직상소’에서도 배교했음을 분명히 밝힌 적이 있었다. 이번 국문 중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론하며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하였다. 또한 천주교신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나 학동을 신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구명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자 체념하였다.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은 대한민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정약용의 매부이기도 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에 대해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분노했고, 다른 신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문 반면 정약용은 자진해서 자신이 세례성사를 주었다고 자백할 정도였다.)
-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선교활동을 주도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고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인 정약종은 셋째 형이며 지난번 진산사건(1791년)을 일으킨 윤지충은 외사촌 형이었기 때문에 정약용은 궁지에 몰려있었다. 그러던 중 잡혀온 여러 신자들의 국문이 거듭될수록 정약용의 배교가 명백한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명한 물증들로 인해 정약용과 정약전은 구속된지 18일만에 유배로 감형된 후 석방되었다.
【18년간의 유배 생활】
-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였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 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 · 『흠흠신서』 · 『목민심서』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졌다.
-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조정에서 끊지 못했던 것도 영의정이던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는데 애초에 서용보는 자신 역시 아버지와 관련된 일에 연루되어서 1806년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영의정으로 복귀한 게 1819년이었기에 그 사이에 정약용이 못 풀러난 것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냥 정약용 자체가 정조의 신임으로 조정에 있었던 사람이었던데다 그가 귀양을 가게 된 것이 다름 아닌 천주교 관련 문제였기에 쉽게 풀어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기까지】
【1818년】
-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 이후 그는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ㆍ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그는 또한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학 운동의 목적에서 외현손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ㆍ안재홍이 교열에 참가하여 1934~1938년에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154권 76책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도 있다.
【1836년】
- 1836년 음력 2월 22일(양력 4월 7일),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는 것이었다.
【1910년】
- 1910년(융희 4) 7월 18일에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 ‘문도(文度)’가 내려졌다.
【정약용 가족 관계】
- [장인 홍화보] 1776년 2월 22일에 무관 홍화보의 여식인 풍산 홍씨와 혼인하였다. 장인 홍화보는 몸이 마르고 키도 작은편이었으나 용맹스러운 무신(武臣)으로 호탕한 성품에 병법에 밝았다고 한다. 1771년에 황해도 장연부사로 있으면서 병영을 설치하여 청나라 해적선 퇴치에 공을 세운 바 있다. 영조 51년(1775)에는 승지로 제수되었는데, 당시에 무인이 승지가 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조 4년(1780)에는 영남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바 있다. 이런 장인의 영향을 받은 정약용은 〈아방비어고〉 등 병서를 지을 수 있었다.
- [자손들] 정약용이 유배되었을 때에는 다시 과거시험을 보거나 관직에 진출할 수 없는 ‘폐족(廢族)’을 자처하였으나, 손자 시대에 이르러 직계 자손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직에 나아가 폐족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진사에 합격하고 단양군수를 역임한 손자 정대림(丁大林), 참봉을 거처 삼척부사를 지낸 손자 정대무(丁大懋), 문과 과거에 급제하고 비서원승을 지낸 증손자 정문섭(丁文燮) 등이 대표적이다.
【정약용의 글 중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이 편지가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증문(憎蚊)】 모기에 대한 글
증문(憎蚊) - 정약용(1762~1836)
맹호가 울 밑에서 으르렁대도나는 코 골며 잠잘 수 있고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 있어도누워서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모기 한 마리 왱 하고 귓가에 들려오면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구나.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넣느냐이불을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으면어느새 울퉁불퉁 혹이 돋아 부처님 머리처럼 돼버리고제 뺨을 제가 쳐도 헛치기 일쑤이며넓적다리 급히 만져도 그는 이미 가고 없어싸워봐야 소용없고 잠만 공연히 못 자기에여름밤이 지루하기 일 년과 맞먹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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