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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진흥왕 [眞興王, AD. 540년 ~ AD. 576년] 신라 제24대 왕 (2)

by [*수호천사*] 2025.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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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眞興王, AD. 540~ AD. 576] 신라 제24대 왕 (2)

 

17(556) 7: 비열홀주를 설치하다

17(556) 가을 7월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沙飡) 성종(成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비열홀은 함경남도 안변(북한의 강원도 안변)에 해당한다. 삼국사기권제35 잡지제4 지리2 삭주 삭정군조에 본래 고구려 비열홀군이었는데, 진흥왕 17, ()나라 태평(泰平) 원년(556)에 비열주로 삼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효소왕 때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180보였다. 경덕왕이 이름을 삭정군(朔庭郡)으로고쳤다.”라고 전한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서 비리성(碑利城)’, 삼국사기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8(668) 621일조에서 비열성(卑列城)’이라고도 하였다.
진흥왕 22(561)에 건립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라고 전할 뿐이지, 여기에 동해안지역에 신라에서 주()를 설치하였다는 정보는 전하지 않는다. 이에 근거하여 본래 진흥왕 17(556) 7월에 비열홀지역에 왕경인 출신의 군사를 중심으로 편성한 비열홀정(비리성정)을 설치한 사실을 8세기 전반 성덕왕 때에 비열홀주를 설치하였다.’라고 고쳤고, 이것을 삼국사기의 찬자가 그대로 신라본기에 인용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80~95).
 

18(557) :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다.

18(557)에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국원(國原): 오늘날 충북 충주시에 해당한다. 삼국사기권제32 잡지제1 악지에 가야에서 망명한 우륵(于勒)을 국원(國原)에 거주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사실과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2(551) 3월조에 진흥왕이 낭성(娘城)에 행차하였을 때, 하림궁(河臨宮)에서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는 사실,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에 신라가 540년대 후반 진흥왕 때에 단양 적성지역에 진출하였다고 전하는 사실 등에 근거하여 신라가 고구려에게서 국원지역을 빼앗은 것은 540년대 후반에서 5513월 이전이라고 본다(張俊植, 111~121; 서영일, 149~151; 梁起錫,; 전덕재). 경덕왕 16(757)에 국원소경을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18(557) : 감문주와 북한산주를 설치하다

18(557)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沙飡) 기종(起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사벌주(沙伐州): 오늘날 경북 상주시에 해당한다. 사벌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제4 법흥왕 12(525) 2월조 참조.
 
감문주(甘文州): 오늘날 경북 김천시 개령면에 해당한다.
 
신주(新州): 신라가 5537월에 경기도와 충북 북부, 강원도 영서지역을 영역으로 하여 설치한 지방통치조직이다. 신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4(553) 7월조 참조.
 
북한산주(北漢山州): 오늘날 한강 이북의 서울지역에 해당한다.
 
신주(新州)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4(553) 7월조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하는 것에 근거하여 신라가 551년에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상류의 10()553년에 백제에게서 빼앗은 한강 하류의 6군을 망라하여 신주를 설치하였다고 이해한다. 북한산은 오늘날 한강 이북의 서울에 해당한다. 종래에 이 기록을 근거로 진흥왕 18(557)에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고 보기도 하였으나(朱甫暾, 108~109; 정구복 외, 124), 557년 이후에 신주와 관련된 기록이 전하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기 어렵다.
삼국사기권제47 열전제7 해론조에 진평왕 33(611) 겨울 10월에 백제가 가잠성(椵岑城)을 공격하자, 진평왕이 장수에게 명하여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신주의 군사로써 이를 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여, 553년에 설치된 신주가 적어도 진평왕 33(611)까지 존속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른다면,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은 진흥왕 18(557)에 신주의 주치(州治)를 북한산으로 옮긴 사실과 더불어 진흥왕 22(561)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에 한성군주(漢城軍主)가 보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군주가 사령관인 정군단(停軍團)도 북한산으로 옮긴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후대에 신라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고 고쳤고, 이것을 삼국사기의 찬자가 그대로 신라본기에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신주가 설치될 당시 신주의 주치 및 정군단의 주둔지는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에 해당하는 남천(南川)으로 이해한다(姜鳳龍, 94~100쪽 및 105). 한편 삼국사기권제37 잡지제4 지리2 삭주조에 선덕왕(善德王) 6, 당나라 정관(貞關) 11(637)에 우수주(牛首州)를 설치하고 군주를 두었다.”라고 전하는 기록, 진평왕 33(611) 이후에 신주에 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은 사실 등에 의거하여, 선덕왕 6(637)에 신주를 분할하여 우수주와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전덕재, 63~66).
 

19(558) 2: 귀족 자제와 왕경인들을 국원에 옮겨 살게 하다

19(558) 2월에 귀족 자제와 6(六部)의 부유한 백성[豪民]을 옮겨 국원(國原)을 채웠다.
 

19(558) : 나마 신득이 포노를 만들다

19(558)나마(奈麻) 신득(身得)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바치니, 그것을 성 위에 설치하였다.
 

23(562) 7: 백제가 변방을 침략하다

23(562)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을 침략하여 민호(民戶)를 약탈하자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았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1천여 명이었다.
 
백제가 변방을 침략하여 1천여 명이었다: 삼국사기권제27 위덕왕 8(561) 가을 7월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다만 백제본기 기록의 기년은 561년으로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23(562) 9: 가야를 토벌하다

23(562)9월에 가야(加耶)가 배반하였으므로 왕이 명하여 이사부(異斯夫)에게 토벌하게 하고, 사다함(斯多含)에게 그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사다함이 5,000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栴檀門)으로 달려 들어가 흰색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戰功)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좋은 땅[良田]과 사로잡은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 번 사양하였다. 왕이 강권하니, 이에 받은 노비[生口]는 풀어주어 양인(良人)으로 삼고, 토지는 나누어서 군사들에게 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사다함(斯多含): 진흥왕 23(562) 대가야 정복에 공을 세운 신라의 화랑(花郞)이다. 진골 출신으로 나밀왕(奈密王: 나물왕) 7대손이고, 아버지는 급찬(級飡) 구리지(仇梨知)이다. 화랑으로 천거되어 낭도(郎徒) 1천 명을 거느렸으며, 15~16세인 진흥왕 23년에 대가야 정벌에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사우(死友)가 되기로 약속한 무관랑(武官郎)이 병으로 죽자, 7일 동안 슬피 울다가 죽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17세였다. 사다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삼국사기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 참조.
 
사다함(斯多含)에게 그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에는 진흥왕이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국(加羅國)을 습격하게 하자, 사다함이 종군(從軍)하기를 청하니, 그를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삼았는데, 낭도의 무리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고 전한다. 참고로 귀당은 진흥왕 23(562) 이전에 6부 지배층의 자제들을 소모(召募)하여 창설한 군단으로서 왕궁과 더불어 왕경 전체의 수비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2018, 「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본 신라 왕경의 實相: 문무왕대 이후 신라본기와 잡지, 열전에 전하는 기록을 중심으로, 大丘史學132).
 
전단문(栴檀門): 삼국사기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에서는 전단량(旃檀梁)’이라고 하면서, 세주(細注)로 가라(加羅) 말로 ()’()’을 이른다고 밝혔다. 전단문은 대가야 왕성의 문 이름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전단(栴檀)은 자단, 백단 등의 향나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19 흠명천황(欽明天皇) 23(562) 정월조에 신라가 562년 또는 561(흠명천황 22)에 가라국(加羅國안라국(安羅國사이기국(斯二岐國다라국(多羅國졸마국(卒麻國고차국(古嵯國자타국(子他國산반하국(散半下國걸손국(乞飡國임례국(稔禮國) 10국을 멸하였다고 전한다. 가라국은 경남 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키고, 안라국은 경남 함안, 사이기국은 경남 의령군 부림면, 다라국은 경남 합천 또는 경남 합천군 쌍책면, 고차국은 경남 고성, 자타국은 경남 진주 또는 거창에 위치한 가야 소국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머지 국가의 위치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158~163).
 

25(564) :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25(564)에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북제(北齊): 북제(550~577)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고양(高洋: 문선제(文宣帝))이 건국한 나라로서 본래 국호는 단순하게 제()였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제 및 남조(南朝)의 제와 구별하여 북제 또는 고제(高齊)라고 부른다.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북제서(北齊書)7 제기(帝紀)7 무성(武成) 하청(河淸) 3(564)조와 책부원귀(冊府元龜)969 외신부(外臣部) 조공(朝貢)2 하청(河淸) 3년조에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26(565) 2: 북제가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신라왕으로 삼다

26(565) 2월에 북제(北齊)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무성황제(武成皇帝): 북제(北齊)의 제4대 황제로 이름은 고담(高湛)이고, 시호(諡號)는 무성(武成)이며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다. 효소제(孝昭帝)의 유명(遺命)으로 황제에 즉위하여 562년에서 565년까지 4년 동안 재위하다가 태자 위()에게 황제위를 물려주었다.
 
사지절(使持節): 중국 고대 장군이 소지하는 부절(符節), 즉 사지절(使持節), 지절(持節), 가절(假節)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사지절을 부여받은 장군은 자신이 거느리는 관리 가운데 질()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자의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낙랑군공(樂浪郡公): 진흥왕이 처음으로 낙랑군공을 책봉받은 이후 중국 왕조에서 신라왕에게 낙랑군공 또는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는 것이 관례였다.
 
북제(北齊) 무성황제(武成皇帝)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북제서(北齊書)7 제기(帝紀)7 하청(河清) 4(565) 2월 갑인(甲寅)조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라고 전하며, 동일한 내용은 북사(北史)8 제본기하(齊本紀下)8 하청 42월조에도 전한다. 한편 책부원귀(冊府元龜)963 외신부(外臣部) 봉책(冊封)조에는 무성(武成) 하청 42월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을 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라고 전한다. 동이교위와 영동교위는 동일한 관작으로 보인다.
북제서의 기록을 통해, 진흥왕이 생존할 때에 대외적으로 김씨(金氏) ()을 칭했을 뿐만 아니라 진흥왕이 생존할 때에 진흥왕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당대에 진흥왕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6(565) 8: 아찬 춘부에게 국원을 지키게 하다

26(565)가을 8월에 아찬(阿飡) 춘부(春賦)에게 명하여 국원(國原)으로 나가서 지키게 하였다.
 

26(565) 9: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를 설치하다

26(565)9월에 완산주(完山州)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대야주(大耶州): 오늘날 경남 합천군 합천읍에 해당한다.
 

26(565) : 진나라에서 불경을 보내다

26(565)()나라에서 사신(使臣)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禮訪)하고, 불교 경론(經論) 1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나라: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南朝)의 하나이다. 557년에 진패선(陳覇先: 무제(武帝), 재위 557559)이 양()나라를 멸하고 건국하여 건강(健康: 지금의 난징[南京])을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진()이라고 하였다. 진나라는 589년에 수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나라에서 불교 경론(經論) 1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천가(天嘉) 6(565)에 진나라의 사신 유사가 승려 명관과 함께 내경(內經: 불경)을 받들고 왔다고 하였다.
 

27(566) 2: 기원사와 실제사가 완공되다

27(566) 2월에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가 완공되었다.
 
기원사(祇園寺): 기원사는 B.C. 6~5세기경 중인도 마갈타국 파사닉 왕의 태자인 기타(祇陀)의 동산[祇園]에 지었다는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국사기권제47 열전제7 열기조에 7세기 후반에 삼년산군(三年山郡: 충북 보은) 태수(太守)를 역임한 열기(裂起)와 친분이 있었던 순경(順憬)이 기원사의 승려였다고 전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5하 경애왕 정해(丁亥: 경애왕 4, 927) 11월조에서 소개한 포석정주악사(鮑石亭奏樂詞)’라는 시에 따르면, 기원사는 실제사(實際寺)와 함께 포석정 서쪽에 위치했다[祇園實際兮二寺東]고 한다. 이를 근거로 기원사는 포석정 부근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박방룡, 140). 종래에 이와 같은 위치 비정을 바탕으로 기원사를 박씨 왕실의 추복(追福) 사찰로 파악하기도 하였다(李道學).
 
실제사(實際寺): 삼국사기권제47 열전제7 취도조에 태종무열왕 2(655)에 백제가 침공하자, 실제사의 승려였던 도옥(道玉)이 취도(驟徒)로 개명한 다음, 삼천당(三千幢)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삼국유사권제5 피은제8 영여사조에 경덕왕이 국사(國師)로 추봉(追封)한 영여(迎如)라는 승려가 실제사에 머물렀으며, 이로 인하여 일연(一然)이 살았던 고려 후기에 실제사를 국사방(國師房)이라고 별칭하였다고 전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5하 경애왕 정해(丁亥: 경애왕 4, 927) 11월조에서 소개한 포석정주악사(鮑石亭奏樂詞)’라는 시에 따르면, 실제사는 기원사(祇園寺)와 함께 포석정 서쪽에 위치했다[祇園實際兮二寺東]고 한다. 이를 근거로 실제사는 포석정 부근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박방룡, 2013, 신라도성, 학연문화사, 140).
 

27(566) : 동륜을 왕태자로 삼다

27(566)왕자 동륜(銅輪)을 세워 왕태자(王太子)로 삼았다.
 
동륜(銅輪): 24대 진흥왕의 맏아들이자 제26대 진평왕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권제1 왕력 제26대 진평왕조에서는 동륜을 또한 동륜(東輪)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진흥왕 27(566)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진흥왕 33(572) 3월에 사망하였다. 진흥왕은 두 아들의 이름을 동륜(銅輪), 사륜(舍輪)이라고 지었다. 사륜은 혹은 금륜(金輪)이라고도 전하는데, 이것은 철륜(鐵輪)을 이른다. 동륜과 철륜은 모두 전륜성왕설화(轉輪聖王說話)에서 따온 이름이다. 인도의 전륜성왕설화에 의하면, 전륜성왕은 자신이 소유한 수레바퀴를 굴려서 천하를 정복하고, 히말라야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모든 영토의 왕들을 위엄과 덕으로 복종시킨다는 성스러운 왕이라고 한다. 전륜성왕은 인도의 불교 중흥에 힘쓴 아소카왕을 모델로 하여 만든 정법(正法), 즉 불법(佛法)으로 통치하는 속세의 이상적인 제왕을 이르는 말이다. 전륜성왕에는 금륜왕(金輪王), 은륜왕(銀輪王), 동륜왕(銅輪王), 철륜왕(鐵輪王)이 있는데, 진흥왕이 두 아들의 이름을 동륜, 사륜(철륜)이라고 지은 것으로 보아, 그 자신은 금륜왕 또는 은륜왕을 자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金哲埈, 1952; 1990, 148; 南東信; 김기흥, 158~159). 한편 일부 학자는 동륜과 사륜 등은 4전륜성왕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히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불전(佛典)에 나오는 인명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辛鍾遠, 273).
 
왕자 동륜(銅輪)을 세워 왕태자(王太子)로 삼았다: 종래에 진흥왕이 북제(北齊) 등과 교류하면서 중국적인 책봉(冊封) 예제(禮制)의 정치적 의미를 체득한 후에 왕위계승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태자책봉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하였다고 본 견해가 제기되었다(김병곤, 2011, 신라의 태자책봉제 수용과정 고찰, 韓國古代史硏究64).
 

27(566) :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27(566)()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27(566) : 황룡사가 완공되다

27(566)황룡사(皇龍寺)가 완공되었다.
 
황룡사(皇龍寺)가 완공되었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법운전(法雲傳)에 진흥왕 27(566)에 황룡사를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 황룡사장육조에서는 황룡사를 기축년(己丑年: 569)에 주위의 담을 쌓고 17년 만에 겨우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해동고승전삼국유사에 사찰의 완공 시점이 다르게 전하는데, 전자에서는 중요한 시설들이 갖춘 것을 기준으로, 후자에서는 건물 둘레에 담장까지 둘러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것을 기준으로 완공 시점을 설정하였기 때문으로 파악된다(李基白, 1986, 皇龍寺와 그 創建,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28(567) 3: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28(567) 3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29(568) :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다

29(568)에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다.
 
태창(太昌): 진흥왕 29(568)부터 571(진흥왕 32)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568년에 건립된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서 태창원년세차무자(太昌元年歲次戊子)’라 한 것을 통해 태창이란 연호를 실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창이란 크게 번창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진흥왕이 진흥왕 12(551) 정월에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래 대외팽창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왕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신라의 국세(國勢)가 크게 고양되자, 이에 태창이란 연호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29(568) 6: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29(568)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진서(陳書)4 본기(本紀)4 폐제(廢帝) 광대(光大) 2(568)조에 이 해 가을 7월 무신(戊申)에 신라국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전한다. 반면에 책부원귀(冊府元龜)969 외신부(外臣部) 조공(朝貢)2 () 광대(光大) 2년조에서는 이 해 6월에 신라국이 진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삼국사기의 찬자는 책부원귀에 전하는 기록을 인용하여 신라본기에 서술하였다고 볼 수 있다.
 

29(568) 10: 남천주와 달홀주를 설치하다

29(568)겨울 10월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또한 비열홀주(比列忽州)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하였다.
 
남천주(南川州):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에 해당한다. 이 기록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라고 하고, 진평왕 26(604) 가을 7월 기록에 남천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하는데, 이러한 기록들은 진흥왕 29년 겨울 10월에 신주(新州)의 주치와 정군단(停軍團)의 주둔지를 북한산(한강 이북의 서울)에서 남천(경기도 이천시)으로 옮겼고, 진평왕 26년 가을 7월에 다시 신주의 주치와 정군단의 주둔지를 남천에서 북한산으로 옮겼음을 반영한 것이다. 참고로 진흥왕 29년에 정군단이 남천지역에 주둔하였음은 정군단의 사령관인 남천군주(南川軍主)가 진흥왕 29년에 건립된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 보이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4 신라본기제4 진평왕 40(618) 기록에 북한산주군주(北漢山主軍主) 변품(邊品)이 가잠성전투(椵岑城戰鬪)에 참여하였다고 전하므로, 진평왕 26년 가을 7월 이후 진평왕 40년 이전 사이에 신주의 주치와 정군단의 주둔지를 남천에서 북한산으로 옮겼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삼국사기37 잡지제4 지리2 삭주조에 선덕왕(善德王) 6, 당나라 정관(貞關) 11(637)에 우수주(牛首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라고 전하는 기록과 이후의 기록에 신주에 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은 사실 등에 의거하여, 선덕왕 6(637)에 신주를 분할하여 우수주와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였다고 본다(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40, 63~66). 선덕왕 6년 이후 태종무열왕 8(661)에 주치를 한산(북한산)에서 남천으로 옮기면서 남천주라고 불렀다가 문무왕 4(664)에 다시 주치를 남천에서 한산(북한산)으로 옮기면서 한산주라고 불렀다. 통일 이후에 주치를 북한산에서 남한산으로 옮겼는데, 이러면서 한강 이남의 서울과 광주시 일대를 망라하여 한산주(漢山州)라고 부르고, 한강 이북의 서울지역은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고 불렀다. 경덕왕 16(757)에 한산주를 한주(漢州), 북한산군을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비열홀주(比列忽州): 함경남도 안변(북한 강원도 안변)에 해당한다.
 
달홀주(達忽州): 오늘날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에 해당한다.
 

31(570) 6: 진나라에서 사신을 보내다

31(570)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진서(陳書)5 본기(本紀)3 선제(宣帝) 태건(太建) 2(570) 6월 무자(戊子) 기록과 책부원귀(冊府元龜)969 외신부(外臣部) 조공(朝貢)2 () 태건 26월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32(571) :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32(571)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진서(陳書)5 본기(本紀)3 선제(宣帝) 태건(太建) 3(571) 기록에 이 해 5월 무신(戊申)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전하고, 책부원귀(冊府元龜)969 외신부(外臣部) 조공(朝貢)2 () 태건 3년조에도 역시 이 해 5월에 신라가 진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전한다. 두 기록에 5715월에 신라가 진에 사신을 보냈다고 전함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의 찬자는 단지 571년에 신라가 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신라본기에 기술하였다.
 

33(572) 1: 연호를 홍제로 바꾸다

33(572) 봄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홍제(鴻濟): 진흥왕이 31(572) 정월에 사용한 연호이다. 홍제란 연호는 진평왕 6(584) 2월에 건복(建福)으로 개원(改元)하기까지 사용되었다.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종래에 홍제(鴻濟)널리 구제한다.”라는 뜻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진흥왕이 기존에 동맹관계를 맺었던 고구려와 사이가 벌어지자,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껴 대외팽창보다는 기존의 영토를 확고하게 수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고, 대신 연호를 홍제로 바꾸어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는 데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전덕재). 한편 진흥왕이 한층 성숙한 전륜성왕(轉輪聖王)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연호를 태창에서 널리 구제한다, 이룬다는 뜻을 지닌 홍제로 연호를 바꾸었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최선자)
 

33(572) 3: 왕태자 동륜이 죽다

33(572)3월에 왕태자(王太子) 동륜(銅輪)이 죽었다.
 
왕태자(王太子) 동륜(銅輪)이 죽었다: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제4 진지왕 즉위년(576)조에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太子早卒], 진지(眞智)가 왕위에 올랐다.”라고 전한다. 이를 통해 태자 동륜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음을 엿볼 수 있으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33(572) :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33(572)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북제서(北齊書)8 제기(帝紀)8 후주(後主) 무평(武平) 3(572)) 기록에 이 해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고 전하고, 책부원귀(冊府元龜)969 외신부(外臣部) 조공(朝貢)2 북제(北齊) 후주(後主) 무평 3년조에도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33(572) 1020: 전사한 사졸을 위하여 팔관회를 개최하다

33(572)겨울 1020일에 전사(戰死)한 사졸(士卒)들을 위하여 서울바깥의 사찰[外寺]에서 팔관연회(八觀筵會)를 개최하여 7일 만에 마쳤다.
 
팔관연회(八觀筵會): 불교의 팔관재계(八關齋戒)와 고유신앙이 결합된 종교의식으로 팔관회(八關會)라고도 부른다. 팔관재계는 재가신도(在家信徒)가 하룻밤 하루낮 동안 받아 지키는 계율로, 8()은 살생, 도둑질, 음행(淫行) 등 여덟 가지의 죄를 금한다는 뜻이고, ()는 오전 중에 한 끼만 먹고서 마음의 부정(不淨)을 맑게 하는 의식이다. 팔관회라는 용어는 인도의 팔계재(八戒齋)가 중국에 전해져서 팔관(八關)이라는 전통적인 액막이 관념에 근거하여 용어를 팔관재(八關齋)로 고쳐 사용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재액을 막기 위해서, 치병(治兵구명(救命)을 바라거나, 죽은 이가 욕계육천(欲界六天), 특히 그 중에서도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위령제의 하나로 설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진흥왕대에 전몰장병을 위로하기 위하여 팔관회를 개최한 것은 바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안지원, 2005,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연등·팔관회와 제석도량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출판부, 120~139).

 

 

35(574) 3: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조하다

35(574) 3월에 황룡사(皇龍寺) 장륙상(丈六像)을 주조하여 완성하였는데, 구리의 무게가 35,007()이고, 도금한 금의 무게가 10,198()이었다.
 
장륙상(丈六像): 높이가 1() 6[]되는 불상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키가 주척(周尺)으로 16자였던 데서 비롯되었다. 장륙상(장륙존상)은 황룡사9층목탑,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 3(三寶)로 숭앙되었다.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 황룡사장륙조에 따르면, 인도[西天竺]의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이 황철(黃鐵) 57,000근과 황금 30,000[]을 모아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주조하려다가 실패하자, 이것들과 부처상 1, 보살상 2구를 함께 배에 실어 보냈는데, 신라 진흥왕이 울산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도착한 배에 실려 있는 부처와 보살상을 동축사(東竺寺)에 모시고, 대건(大建) 6년 갑오(甲午: 574) 3월에 황철과 황금을 가지고 황룡사 장륙존상을 주조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 기록에서 인용한 사중기(寺中記)에서는 장륙존상을 계사(癸巳: 573) 1017일에 주조하였다고 하였다. 장륙존상은 고려 고종 25(1238)에 몽골군이 황룡사를 불태웠을 때에 소실되었다. 인도의 전설적인 신불군주(信佛君主)인 아육왕이 보낸 금철(金鐵)로 남염부제(南閻浮提)의 십육대국(十六大國), 오백중국(五百中國), 십천소국(十千小國), 팔만취락(八萬聚落) 모두가 장육상을 주성(鑄成)하는데 실패하였음에 반해, 신라의 진흥왕만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설화를 통해 신라가 인도와 같은 불국토(佛國土)였고, 신라왕과 아소카왕의 인연이 깊었음을 강조하려고 의도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설화에 전하는 바와 같이 장육불상을 독력(獨力)’으로 조성할 수 없기 때문에 진흥왕은 아소카왕의 파트너이자, 후계자로서 인식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인도 불교계에서 아소카왕이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부처의 예언을 선양하였듯이, 6세기 신라에서도 장육상의 설화를 통해 진흥왕이 바로 전륜성왕이자, 신왕인 아소카왕의 정신을 계승하여 그의 뜻을 완수한 위대한 성왕임을 드러내고자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판카즈 모한, 2004, 6세기 신라에서의 왕권과 불교 간의 관계, 불교학연구9).
 

36(575) : 봄과 여름에 가물다

36(575)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36(575) : 황룡사의 장륙상이 눈물을 흘리다

36(575)황룡사(皇龍寺)의 장륙상(丈六像)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까지 이르렀다.
 
황룡사(皇龍寺)의 장륙상(丈六像)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까지 이르렀다: 진흥왕 36(575) 봄과 여름에 가물었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이 상당한 고통을 당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 황룡사장륙조에서는 장륙상에서 눈물이 흘러내린 현상을 진흥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과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진흥왕이 사망하기 전해에 발생한 가뭄과 황룡사 장륙존상에서 일어난 이변을 통해 진흥왕이 사망하기 전에 정치사회적으로 불안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37(576) : 화랑을 받들다

37(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근심하다가, 사람들로 하여금무리를 지어 놀게 하고 그 행실을 관찰한 연후에 발탁해서 등용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뽑았는데, 한 사람은 남모(南毛)이고,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으로 무리 3백여 인을 모았다.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였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한 뒤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남모를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준정은 사형에 처해졌고, 무리들도 사이가 나빠져 흩어졌다.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미고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겨서 산과 내를 찾아 노닐며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의 그릇됨과 올바름을 알게 되어, 훌륭한 자를 발탁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런 까닭에 김대문(金大問)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현명한 보필자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최치원(崔致遠)난랑비(鸞郞碑)서문(序文)에는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는데, 풍류(風流)라고 이른다. 교화를 행하는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갖추어 있는데, 실로 이에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부모에게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노()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다.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柱史)의 본뜻이다. 갖가지 악()을 행하지 말고 갖가지 선()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나라 영호징(令狐澄)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귀인(貴人) 자제(子弟)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선발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이름을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며 섬겼다.”라고 하였다.
 
원화(源花):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원화(原花)라고 하였다. 원화는 북방 샤머니즘과 습합(拾合)하여 무녀적(巫女的) 성격을 지녔다고 보는 견해(三品彰英, 117~121),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只召太后)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여성이 원화에 임명되어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보좌하였다고 보는 견해(고현아; 조범환), 미륵의 현신으로서 원화를 임명하고, 6부의 남자 청소년들로 그 무리를 구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朴南守) 등이 제기되었다.
 
남모(南毛): 원화에 선발된 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는 남모랑(南毛娘)이라고 하였다.
 
준정(俊貞): 원화에 선발된 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는 교정랑(峧貞娘)이라고 전한다.
 
화랑(花郞): 신라의 청소년 수련집단을 이끄는 중심인물을 말한다. 화랑이 이끈 무리들을 낭도(郎徒)라고 부르며, 화랑과 낭도를 합쳐서 흔히 화랑도(花郞徒)라고 이른다.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화랑을 국선(國仙)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화랑도는 삼한사회의 청년집회에서 시원하여 발전·법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랑도를 창설한 목적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삼국유사에 원화제도가 폐지된 뒤에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화랑도 창설을 명령하였다고 전한 사실을 통해 화랑도를 전사단(戰士團)으로 편성하여 군사력을 키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15세의 진골 청년을 화랑으로 선발하였고, 삼국사기권제47 열전제7 김흠운조 말미에 실은 사론(史論)에서 김부식(金富軾)은 신라 삼대(三代: 상대·중대·하대)에 걸쳐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다고 언급하였다. 화랑도 조직은 화랑 1, 그를 지도·고문(顧問)하는 승려 낭도 1, 진골 이하 평민에 이르는 수백 명에서 천여 명에 이르는 낭도들로 구성되었다. 화랑도는 원칙적으로 3년을 수련기간으로 설정하였고, 연령은 대체로 15~18세까지로 추정된다. 수련 기간이 끝나면 정병(正兵)에 징발되어 복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련 기간 동안 화랑과 낭도들은 충()과 효() 등의 덕목을 연마하고, 산수(山水)를 유람하며 가락(歌樂)을 즐기고 집단의식과 인성(人性)을 배양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성원 사이에는 사우(死友)를 약속할 정도로 서로 간에 인간적인 유대가 긴밀하였다. 화랑도 조직을 총괄하는 조정의 관리가 화주(花主)였는데, 여기에는 대아찬 이상의 고위관리가 임명되었고,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한편 화랑은 불교신앙과도 긴밀하게 연관성을 지녔는데, 통일 이전에 화랑을 하생(下生)한 미륵의 화신으로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화랑도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전사집단으로, 그리고 관인선발의 장으로 널리 활용되었고, 아울러 사회학적인 면에서 그들의 활동은 계층사회에서 발생하는 신분계층 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李基東, 1984; 정구복 외, 127~128). 삼국통일 이후에 장기간의 평화가 지속되면서 전사단적인 화랑도의 성격은 희석되고,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며 낭도 상호 간의 친목과 우의를 다지는 전통이 강조되었는데, 이러면서 화랑도에서 신선사상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화랑도를 풍류도(風流徒) 또는 풍월도라고도 불렀을 뿐만 아니라 화랑을 국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三品彰英; 李基東, 1997a; 1997b; 박남수)
 
다시 미모(美貌)의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 본 기록에서는 원화제와 더불어 화랑제도 역시 진흥왕 37(576)에 시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상이한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진흥왕대에 원화제를 실시하였다가 폐지한 지 여러 해 뒤에 화랑을 받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연(一然)삼국사기에서 576년에 화랑을 받들었다고 전하는 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라고 밝혔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6 진흥왕 원년(540) 12월조에서 용의(容儀)가 단정한 동남(童男)을 풍월주(風月主)로 삼고 무리를 모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닦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흥왕 원년에 화랑제를 실시하였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삼국사기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에 사다함이 화랑에 선임되었고, 그의 무리가 1천 명에 다다랐으며, 그가 진흥왕 23(562) 대가야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에 따른다면, 화랑제는 진흥왕 23년 이전에 처음으로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三品彰英, 199~201).
삼국사기의 찬자는 원화제를 실시한 시기뿐만 아니라 그것을 폐지한 시기 및 화랑도를 창설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듯하다. 다만 그 시기가 분명히 진흥왕 때였다는 사실만을 인지하고, 원화와 화랑에 관한 전말을 진흥왕 말년, 즉 진흥왕 37년조에 일괄 정리하여 서술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이강래, 129; 전덕재, 134~140).
 
화랑세기(花郞世記): 신라의 진골로 성덕왕 3(704)에 한산주(漢山州: 경기도 하남시·광주시) 도독을 역임한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화랑들의 전기(傳記)이다. 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의 열전에서 화랑으로 알려진 인물들에 관한 기록의 기본원전은 화랑세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한편 1989년에 경남 김해시에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필사하였다는 화랑세기(花郞世紀)가 발견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李載浩; 李鍾旭, 1995; 1997), 일반적으로 이것은 위작(僞作)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盧泰敦; 권덕영; 金基興; 박남수).
 
난랑비(鸞郞碑): 난랑이란 화랑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난랑은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가계와 행적에 대해 더 이상 알 수 없다. 난랑을 진흥왕대 최초의 화랑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63), 경문왕대에 활동한 화랑으로 보는 견해(張日圭),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보아, 신라 하대에 활동하였던 화랑이라고 보는 견해(정구복, 129) 등이 있다.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부모에게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원문은 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이다. 논어(論語)학이편(學而篇)入則孝, 出卽悌에서 응용하여 인용한 말로 보인다.
 
()나라: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남쪽에 있었고, 노나라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조상을 주()나라(B.C. 1111~B.C. 255)까지 올려 잡았다. 공자(孔子)가 출생한 나라이며, 춘추(春秋)B.C. 722~B.C. 481년에 걸쳐 노나라 궁중에서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다. B.C. 249년 초()에게 멸망하였다.
 
사구(司寇): 사구는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하((() 3대에 형옥(刑獄)을 맡은 6() 가운데 하나이다. 공자(孔子)50세 때인 노()나라 정공(定公) 9년에 대사구(大司寇)에 임명된 적이 있으므로, 공자를 지칭하여 사구라 하였던 것이다.
 
무위(無爲)의 일에 행하는 것은: 원문은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이다. 도덕경(道德經)2장의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恒也.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弗始 生而弗有 爲而弗志 功成而不居 夫唯弗居 是以弗去라는 대목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는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럽게 또한 망령되이 하지 않는 것을 뜻하고, ‘불언(不言)’은 명령이나 지시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하여지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주사(柱史): 주사는 주하사(柱下史)의 약칭으로, 중국 주()나라 장서실(藏書室)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이다. ()나라 때에 시어사(侍御史)로 바뀌었다. 노자(老子)가 한때 주나라의 장서실 일을 맡아보았으므로 노자를 일컬어 주사라 하였다.
 
갖가지 악()을 행하지 말고 갖가지 선()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것은: 원문은 諸惡莫作 諸善奉行이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의 줄임말로, 4구게(句偈)는 대·소승(·小乘)을 막론하고 중시하는 게송(偈頌)이다. 열반경(涅槃經)법화현의(法華玄義)등에서 이 구절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축건태자(竺乾太子): 축건은 천측(天竺), 곧 인도의 별칭이다. 석가모니가 인도 카필라(Kapila) 국왕의 태자였으므로, 그를 일컬어 축건태자라 하였다.
 
영호징(令狐澄): 당나라 의주(宜州) 화원(華原) 사람이며, 아버지는 영호도(令狐綯)이다. 진사(進士)로 등제(登第)하여 건부(乾符) 연간(874879)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하였고, 저서로 정릉유사(貞陵遺事)가 있다. 정릉유사에서 정릉은 당 선종(宣宗)의 능묘명(陵墓名)이다. 선종대의 연호는 대중(大中: 847~860)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릉유사대중유사(大中遺事)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라국기(新羅國記): 혜공왕 4(768)에 당나라 책봉사(冊封使) 귀숭경(歸崇敬)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신라에 왔던 고음(顧愔)이 신라를 견문(見聞)하고 지은 책이다. 신라기(新羅記)라고도 한다. 신당서(新唐書)58 예문지(藝文志)2에 고음이 지은 신라국기1권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나라 영호징(令狐澄)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찬한 설부(説郛)49대중유사일문(逸文)이 전하는데, 여기에 고음의 신라국기에서 인용한 문장이 보인다. 그것은 신라국기에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제2골이라 한다[其國王族 謂之第一骨 餘貴族 謂之第二骨]. 귀족의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들어 섬겼다[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花郎 國人皆爭事之]”이다. 이에 따르면, 영호징은 고음의 신라국기에서 이들 기록을 인용하여 정릉유사에 실은 것으로 볼 수 있고, 삼국사기의 찬자는 신라국기가 아니라 영호징의 정릉유사에 인용된 신라국기의 기록을 신라본기에 옮겨 서술하면서 신라국기가 영호징이 지은 것으로 오해한 것으로 이해된다(岡田英弘; 전덕재, 2015; 2018, 131~133).
 

37(576) : 안홍법사가 호승과 함께 돌아오다

37(576)안홍법사(安弘法師)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배우고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경(稜伽經)승만경(勝鬘經)및 부처의 사리(舍利)를 바쳤다.
 
안홍법사(安弘法師): 삼국유사권제3 탑상제4 황룡사구층탑조에서 안홍이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찬술하였다고 하였고,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탑비(山淸 斷俗寺 神行禪師塔碑)에 신행선사는 속성(俗姓)이 김씨(金氏)로서 급간(級干) 상근(常勤)의 아들이며, 안홍의 형 증손(曾孫)이라고 전한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법운전(法雲傳)에 진흥왕이 사망한 576년에 안함법사(安含法師)가 수()나라에서 귀국하였다고 전하는데, 해동고승전의 저자 각훈(覺訓)이 안홍과 안함을 동일인이라고 이해하였음을 반영한다. 해동고승전2 안함전(安含傳)에 안함은 속성은 김씨이고 시부(詩賦) 이찬(伊飧)의 손자라고 한다. 종래에 해동고승전의 기록에 의거하여, 안홍과 안함을 동일인이라고 보고, 본 기록은 원광(圓光)이 진나라에 유학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었다(辛鍾遠,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民族社, 214~215쪽 및 232~237).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2 안함전(安含傳)에서 안함이 진평왕 27(605)에 우전(于闐)의 사문(沙門) 비마진체(毘摩眞諦), 사문 농가타(農加陀)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여기에 인용된 최치원(崔致遠) 소찬(所撰)의 의상전(義相傳)에서는 진평왕 건복(建福) 42(625)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서국(西國)의 승려 3, 한승(漢僧) 2인과 함께 당으로부터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서국의 승려는 나이가 44세인 북천축(北天竺) 오장국(烏萇國) 비마라진제(毘摩羅眞諦), 46세인 농가타(農伽陀)와 마두라국(摩豆羅國) 불타승가(佛陀僧伽)였다. 이들은 52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왔고, 마침내 동쪽의 황룡사(皇龍寺)에 머물며 전단향화성광묘녀경(旃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였는데, 이때 신라 스님인 담화(曇和)가 받아썼으며, 오래지 않아 한승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왕에게 청하였으므로 진평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호승의 국적(國籍)과 관련하여 최치원은 북천축, 즉 인도 출신이라고 하였으나 각훈(覺訓)은 중국 신장성 위구르자치구에 위치한 호탄(Khotan)의 우전국이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능가경(稜伽經): 능가(稜伽), 곧 능가(楞枷)는 사자국(獅子國)에 있다는 험준한 산 이름이다.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이곳에 부처가 거처하며 설한 법문을 능가경이라 한다. 능가경을 한역(漢譯)한 것으로는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4, 보리유지(普提流支)입능가경(入楞伽經)10, 보차난타(寶叉難陀)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7권 등이 있다.
 
승만경(勝鬘經):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의 약칭으로 인도 사위국(舍衛國)의 파사닉왕(波斯匿王)의 딸 승만(勝鬘)이 부처의 위신력(威神力)을 입고 섭수정법(攝受正法) 등의 법문을 설한 것이다.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한역(漢譯)한 것이다.
 
안홍법사(安弘法師)사리(舍利)를 바쳤다: 581년에 수나라가 건국되었기 때문에 안홍법사가 576년에 수나라에 불법(佛法)을 배우러갔다가 귀국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의 저자 각훈(覺訓)은 안홍과 안함(安含)을 동일인이라고 보았다. 같은 책, 1 안함전(安含傳)에서 안함이 진평왕 22(600)에 고승(高僧) 혜숙(惠宿)과 함께 중국에 유학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사신과 함께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갔다가 진평왕 27(605)에 우전(于闐)의 사문(沙門) 비마진체(毘摩眞諦)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선덕왕 9(640) 923일에 62세로 일생을 마쳤다고 기술하였다. 여기에 인용된 최치원(崔致遠) 소찬(所撰)의 의상전(義相傳)에서는 진평왕 건복(建福) 42(625)에 의상법사가 태어났는데, 이 해에 동방성인(東方聖人) 안홍법사가 서국(西國)의 승려 3, 한승(漢僧) 2인과 함께 당으로부터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해동고승전의 기록을 존중한다면, 안홍, 즉 안함은 진평왕 원년(579)에 태어나 22세인 진평왕 23(601)에 중국의 수나라에 유학하였다가 진평왕 27(605)에 귀국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안함과 안홍을 동일 인물로 볼 수 있느냐이다. 동일 인물로 이해한다면, 본 기록은 분명히 삼국사기찬자의 두찬(杜撰)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576년은 안홍(안함)이 태어나기 이전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 안홍법사가 576년 이전에 남조의 진()에 들어갔다가 이 해에 귀국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삼국사기의 찬자는 안함과 안홍을 혼동하여 안홍이 수나라에서 유학하였다고 오기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두 가지 추정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안함과 안홍이 모두 수나라에 유학하여 호승(胡僧)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전하는 사실을 참고하건대, 안함과 안홍은 동일 인물로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辛鍾遠,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民族社, 232~237).
이에 따른다면, 삼국사기의 찬자는 안홍, 즉 안함이 태어난 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가 진흥왕대에 중국에 유학하였다가 수나라에서 귀국하였다고 이해한 것이다. 또한 그가 중국에 들어간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데다가 수나라에서 귀국하였기 때문에 진흥왕 말년, 즉 진흥왕 36년 기록에 그가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수나라에 들어갔다가 호승과 함께 귀국하였다는 내용을 신라본기에 첨입(添入)한 것으로 추정된다.
 

37(576) 8: 진흥왕이 죽다

37(576)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568년에 건립된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진흥태왕(眞興太王)’이라고 전하고, 또한 북제서(北齊書)7 제기(帝紀)7 하청(河清) 4(565) 2월 갑인(甲寅)조에 신라국왕(新羅國王) 김진흥(金眞興)이라고 전하므로, ‘진흥은 시호가 아니라 생시(生時)에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생시에 진흥이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불교를 진흥(振興)시키는 왕임을 자부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현재 경주시 서악동 산92-2번지에 있는 무덤을 사적 제177호 경주 진흥왕릉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진흥왕의 무덤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진흥왕을 법흥왕과 마찬가지로 애공사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 기록에 의거하여 진흥왕릉은 무열왕릉 북쪽 서악동고분군(사적 제142)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강인구, 1984; 2000, 425~426; 김용성; 이근직, 201~208).
 
말년에 이르러 생애를 마쳤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법운전(法雲傳)에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권제1 기이제1 진흥왕조에서는 왕이 죽을 때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였다.
 
영흥사(永興寺): 영흥사는 법흥왕비인 보도부인(保刀夫人)의 발원으로 건립한 신라 최초의 비구니 사찰[尼寺]이다.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법흥왕비가 을묘년(乙卯年: 535)에 영흥사를 세웠고,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여기에 머물렀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영흥사는 전불시대(前佛時代)7처가람의 하나인 삼천기(三川岐)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법흥왕비가 창건했다는 점에서 법흥왕이 창건한 흥륜사(興輪寺) 부근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에 흥륜사와 영흥사가 각각 경주부 남쪽 2리와 남쪽에 위치하였다고 전하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1910년대 지형도를 보면, 서천(西川)은 서천교 북쪽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하중도(河中島)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서천의 유로(流路)가 심하게 변동한 사실과 함께 서천에 세 갈래 물줄기가 갈라지는 삼천기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에 여러 연구자들이 흥륜사 부근의 서천 변에 영흥사가 위치했다고 추정하는데, 1980년 홍수 시에 드러난 경주공고 서남측의 사지(寺址)를 영흥사 터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朴方龍; 余昊奎). 이에 대해 경주공고 일대로 비정하거나(金福順), 삼천기를 세 하천의 합류지점으로 풀이해 서천남천(南川)모량천(牟梁川: 대천(大川))의 합류 지점 동안(東岸)에서 확인된 절터로 비정하기도 한다(李根直, 2002).
한편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18(596) 10월조에 영흥사 화재로 인하여 민가 350여 채가 불에 탔다고 전하는데, 영흥사 주변에 민가가 밀집했고 시가지 구역이 발달했음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490(소지왕 12) 개설한 시사(市肆)가 교통의 결절점인 영흥사 주변에 위치했고, 695(효소왕 4)에 서시(西市)로 확장되었다고 파악한 견해도 제기되었다(李根直, 2010).
 
왕비가돌아가시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36(614) 2월조에 영흥사의 흙으로 만든 불상이 저절로 무너지다가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안 있어 진흥왕비인 비구니가 죽었다.”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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