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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Titus, AD. 39~81]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AD. 79~81)
로마 황제 티투스
【개인 정보】
- [이름] 티투스 카에사르 베스파시아누스(Titus Caesar Vespasianus)
- [출생] 기원후 39년 12월 30일, 이탈리아 로마
- [사망] 기원후 81년 9월 13일, 이탈리아 로마
- [재위] 기원후 79년 6월 24일 ~ 81년 9월 13일
- [전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AD. 9~79) : 로마 제국 제9대 황제(AD. 69~79)
- [후임]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51~96) : 로마 제국 제11대 황제(AD. 81~96)
【가족 관계】
-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 로마 제국 제9대 황제
[어머니] 도미틸라(Domitilla) - [본인] 티투스 카에사르 베스파시아누스(Titus Caesar Vespasianus, AD. 39~81) :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
[배우자] 아레키나 테르툴라(Arrecina Tertulla, ?~62) : 칼리굴라 황제의 친위대장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Marcus Arrecinus Clemens)의 딸
[딸] 율리아 플라비아(Julia Flavia, C.63~91)
[사위]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Titus Flavius Sabinus) : 기원후 82년에 도미티나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살해됨(도미티아누스가 사비누스의 아내를 사랑한 것이 이유일 듯) - [배우자] 마르키아 푸르닐라(Marcia Furnilla (c. 63–65 AD; divorced)
[딸] 플라비아(Flavia) - [배우자] 베레네케(Berenice, 28~81) : 유대 헤롯 가문 출신, 티투스의 정부, 기원후 79년에 결별
- [여동생] 소(小)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the Younger, AD. c.45~c.66)
[남편]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Quintus Petillius Cerialis, AD. c.30~c.83)
[딸]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 기독교인이었다고 함 - [남동생]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 AD. 51~96) : 로마 제국 제11대 황제(AD. 81~96)
【티투스 황제의 생애】
【기원후 39년】 출생하다
- 티투스(Titus)는 기원후 39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와 어머니 대(大)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Major) 비르길리아(Vespasia Polla)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 그에게는 소(小)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the Younger, 45년 출생)라는 여동생과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 51년 출생)라는 남동생이 있다.
- 어린 시절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브리타니쿠스는 이복 형인 네로에 의해 독살되었다) 티투스는 황제가 된 후 죽은 옛 친구의 상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기원후 64년】 아레키나 테르툴라와 결혼하다
- 기원후 64년에 아레키나 테르툴라(Arrecina Tertulla)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하였다.
【기원후 65년】 마키아 푸르닐라와 재혼하다
- 마르키아 푸르닐라(Marcia Furnilla)와 재혼하였다. 그해 원로원 의원 피소에 의한 네로 암살 의혹사건에 아내의 가문이 연루되었으므로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그 이후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자식으로는 아마도 첫 번째 아내인 아레키나 테르툴라에게서 낳은 것으로 추정되는 딸 율리아 플라비아(Julia Flavia)가 있다.
【기원후 66년】 유대반란
- 기원후 66년에 유대 반란이 시작되었고,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유대로 파견되었고, 그의 아들인 티투스는 그를 지원하며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티투스는 아버지의 지휘 아래 유대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후 68년】 네로 자살
- 기원후 68년에 네로가 자살하고 갈바가 황제로 취임하였을 때,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명으로 갈바가 황제로 취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갈바가 살해당하고 뒤를 이어 즉위한 오토가 자살하였으며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고 스스로 판단하여 다시 동방으로 돌아와 유대 반란 진압에 전념하였다.
【기원후 69년】 유대전쟁 : 예루살렘을 포위하다
- 기원후 69년, 티투스는 유대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70년에 결국 함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것은 로마 제국이 유대를 완전히 정복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로마 광장 입구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원후 81년에 세운 것이다. 이 승리는 티투스를 로마 군대에서의 중요한 지도자로 자리 잡게 만들었고, 그의 명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이 시점에서 티투스는 군사적 업적으로 큰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강력한 리더십은 황제의 자질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기원후 71년】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다
- 기원후 71년, 로마에 돌아온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기원후 73년】 감찰관, 공동 집정관
- 73년 아버지와 함께 감찰관을 지냈고 몇 차례 공동 집정관이 되기도 하였다.
【기원후 79년】 로마 황제가 되다
- 베스파시아누스가 사망하면서 티투스는 로마 황제가 되었다. 로마 역사상 생물학적 혈통의 아들(적자)이 황제가 된 첫 번째 케이스가 되었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 시민들은 그가 네로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고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기록하였다. 그 이유는 티투스의 애인인 베레니케가 로마 시민에게 있어서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켰다고 한다. 티투스는 시민들의 두려움을 깨닫고 베레네케를 포기하면서 시민의 동정과 지지를 얻었다.
- 티투스는 자신이 아무 것도 좋은 것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하루를 잃어버렸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티투스의 즉위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는 제국을 안정시키고 번영시키기 위한 여러 계획을 세웠다. 티투스는 로마의 황제로서의 첫 번째 과제는 로마 시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그는 군사적 승리와 행정적 능력을 통해 빠르게 황제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 기원전 79년 8월, 티투스의 통치 초기에 폼페이(Pompeii)와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등을 포함한 베수비우스 화산(Mount Vesuvius)의 분화가 발생하였다. 이 재해는 로마 제국 역사에서 가장 큰 자연 재해 중 하나로,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낳았고,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티투스는 이 재해를 신속하게 대응하고, 도시 재건을 위해 많은 자원을 할당하여 시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의 재해 대응은 그가 황제로서 위기 관리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기원후 80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다 / 콜로세움 완공하다 / 도나토리움 축제를 주최하다
- 기원후 80년 로마에 사흘 동안에 걸친 대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로마를 재건하는 데도 힘을 썼다.
- 기원후 80년,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한 건축인 콜로세움(Colosseum)을 완공하였다. 티투스는 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완공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영광과 즐거움을 제공하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콜로세움은 당시 로마 제국의 기술적 성취와 부유함을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이었으며, 티투스는 이를 통해 그의 황제 시절에 대한 유산을 남기고자 하였다.
- 기원후 80년, 티투스는 도나토리움(Donatorium)이라는 대규모 축제를 주최하여, 국민들에게 호의를 표하고 로마 제국의 강력한 연대를 상징하는 행사로서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축제는 로마 시민들에게 황제의 위대함과 그가 이끈 군사적 승리의 중요성을 강조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기원후 81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 기원후 81년 9월 13일, 티투스는 치세 2년만에 불과 4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사인을 말라리아 또는 남동생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사망은 로마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가 후계자로 즉위하게 되었다.
- 티투스의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로마 제국의 안정과 사회적 회복에 기여한 황제였다. 그의 통치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로 특징지어지며, 로마의 재건과 군사적 승리가 강조된 시기였다.
- 티투스는 그의 군사적 승리와 자연 재해에 대한 대응으로 기억된다. 그는 유대 전쟁의 승리와 베수비우스 화산 분화 후의 재건을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그의 통치 스타일은 상대적으로 온화하고, 로마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안정적인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다만 로마 황제 가운데 폭군으로 여겨지는 인물들도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티투스도 조금만 더 오래 통치했으면 똑같은 전철을 밟았을 지도 모른다며, “시기만 짧으면 누구든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비아냥거린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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