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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신왕국(기원전 1430년경 ~ 기원전 1185년경)

by [*수호천사*] 2025.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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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 신왕국(기원전 1430년경 기원전 1185년경)

 
히타이트 왕국은 히타이트 내에서아시리아바빌로니아이집트 문서에서 모두 하티’(Hatti)로 불렸다.
 
히타이트 역사 서술의 문제점
 
히타이트 역사 서술은 많은 연대기적인 문제가 있다히타이트 왕들 중 몇몇은 같은 이름(예를 들어 툿할리야와 아르누완다)을 가진다오늘날은 편의상 1, 2세로 구분하지만 사료에서는 이런 구분이 없다따라서 종종 사료가 어떤 왕을 지칭하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절대 연대 역시 문제가 많다히타이트인들은 재위 기간을 명시한 왕명록을 우리에게 남기지 않았다따라서 신왕국을 창시한 숩필룰리우마 1세의 재위 연도에 대해서도 22년에서 40년에 이르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히타이트 역사의 어느 한 시점도 이집트아시리아 혹은 바빌로니아 역사와 비교하지 않고는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여기에서 히타이트 왕들의 재위 기간을 절대 연대로 표시하지만 그 연대는 대략적이며 이집트 연대에 대한 지식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다.
 
히타이트의 영역
 
히타이트의 국경은 언제나 유동적이었다수도는 중앙 아나톨리아즉 키질이르막강 상류에 위치했다그리고 그들의 군사 원정은 주로 남쪽으로 집중되었다전성기 때의 하티는 서부 시리아도 통치하였다그러나 북쪽과 서쪽 국경이 흑해 해안과 에게 해까지 이르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국가 조직은 영토에 대한 직접 통치가 아닌 속국 왕들에 의한 통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경은 실제적 패권보다는 히타이트의 영향권 안에 있는 속국들이 얼마나 히타이트에 의존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히타이트의 연대 구분
 
히타이트는 1800년부터 1200년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 존재한 나라이다이 기간에 두 번정도 국가적 흥성을 이루었는데 하나가 고대 왕국이라고 불리는 17세기이고다른 하나가 신왕국이라고 불리는 1400~1200년까지의 시기이다때때로 중간 왕국이라는 용어가 그 중간 시기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그러나 그때 하티는 쇠퇴기였으며 그 시대에 무슨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지에 대해 역사가들은 잘 모른다.
 
히타이트 고왕국 군주

Middle Chronology
를 따름

 

Ruler 통치기간
(Kuhrt, Bryce)
통치기간
(Freu)
비고
후지야(Ḫuzziya I) (omits) c.1670– c.1650 BC 라바르나의 장인
라바르나 1세(Labarna I) c.1680– c.1650 BC c.1650– c.1625 BC 후지야의 아들 혹은 사위
하투실리 1세(Ḫattušili I) c.1650– c.1620 BC c.1625– c.1600 BC 라바르나 아내의 조카
무르실리 1세(Muršili I) c.1620– c.1590 BC c.1600– c.1585 BC 하투실리 1세의 손자
한틸리 1세(Ḫantili I) c.1590– c.1560 BC c.1585– c.1570 BC 무르실리 1세의 처남
지단타 1세(Zidanta I) c.1560– c.1550 BC c.1570– c.1570 BC 한틸리 1세의 손자
암무나(Ammuna) c.1550– c.1530 BC c.1570– c.1550 BC 지단타 1세의 아들
후지야 (Ḫuzziya I/II) c.1530– c.1525 BC c.1550– c.1550 BC 암무나의 아들(?)
텔레피누(Telipinu) c.1560– c.1500 BC c.1550– c.1530 BC 후지야 아내의 형제
 
 
히타이트 중간 왕국 군주

Middle Chronology
를 따름

 

Ruler 통치기간
(Kuhrt, Bryce)
통치기간
(Freu)
비고
알루왐나(Alluwamna) c.1500– c.? BC c.1530– c.1515 BC 고왕국의 마지막 왕 텔리피누(Telipinu)의 사위
한틸리 2세(Ḫantili II) c.?– c.? BC c.1515– c.1505 BC 알루왐나(Alluwamna)의 아들
타르후와일리(Taḫurwaili) c.?– c.? BC c.1505– c.1500 BC 틸리피누(Telipinu)의 사촌이지만, 그의 정확한 위치나 역할은 불확실함
지단타 2세(Zidanta II) c.?– c.? BC c.1500– c.1485 BC 한틸리 2세(Ḫantili II)의 형제일 가능성이 있는 하슈일리(Ḫaššuili)의 아들
후지야 2(3)세(Ḫuzziya II/III) c.?– c.? BC c.1485– c.1470 BC 지단타 2세(Zidanta II)의 아들이거나 사위일 수 있음, 그러나 그 관계는 확실하지 않음
무와탈리 1세(Muwatalli I) c.?– c.1430 / 1400 BC c.1470– c.1465 BC 출신이나 혈통이 확실하지 않다
 
 
히타이트 신왕국 군주

Middle Chronology
를 따름

 

Ruler 통치기간
(Kuhrt)
통치기간
(Bryce)
통치기간
(Freu)
비고
툿할리야 1세(Tudḫaliya I) c.1430/1420– c.1410/1400 BC c.1400– c.? BC c.1465– c.1440 BC 칸투질리(Kantuzzili)의 아들이며, 지단타 2세(Zidanta II)의 후손일 수 있는 인물, 그의 정체는 논란이 있으며, 아마도 툿할리야 2세(Tudḫaliya II)일 수 있음
하투실리 2세(Ḫattušili II) c.1410/1400– c.1400/1390 BC c.?– c.? BC c.1440– c.1425 BC 툿할리야 1세(Tudḫaliya I)의 아들이지만, 그 존재에 대한 논란이 있음
툿하리야 2세(Tudḫaliya II) c.1400/1390– c.1390/1370 BC c.?– c.? BC c.1425– c.1390 BC 하투실리 2세(Ḫattušili I)I의 아들이지만, 그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아마도 툿할리야 1세(Tudḫaliya I)일 수 있음
아르누완다 1세(Arnuwanda I) c.1390/1370– c.1380/1355 BC c.?– c.? BC c.1390– c.1370 BC 툿할리야 2세(Tudḫaliya II)의 입양된 아들이자 사위
툿할리야 3세(Tudḫaliya III) c.1380/1355– c.1370/1344 BC c.?– c.1350 BC c.1370– c.1350 BC 아르누완다 1세(Arnuwanda I)의 아들
툿할리야(Tudḫaliya the Younger) (omits) (omits) (omits) 툿할리야 3세(Tudḫaliya III)의 아들이지만, 그의 통치에 대한 논란이 있음
숩필룰리우마 1세(Šuppiluliuma I) c.1370/1344– c.1330/1322 BC c.1350– c.1322 BC c.1350– c.1319 BC 툿할리야 3세(Tudḫaliya III)의 입양된 아들이자 사위로, 제국을 확장했으며 아마르나 서신들에 언급된 인물
아르누완다 2세(Arnuwanda II) c.1330/1322– c.1330/1321 BC c.1322– c.1321 BC c.1319– c.1318 BC 숩필룰리우마 1세(Šuppiluliuma I)의 아들
무르실리 2세(Muršili II) c.1330/1321– c.1295 BC c.1321– c.1295 BC c.1318– c.1295 BC 숩필룰리우마 1세(Šuppiluliuma I)의 아들
무와탈리 2세(Muwatalli II) c.1295– c.1282/1272 BC c.1295– c.1272 BC c.1295– c.1272 BC 무르실리 2세(Muršili II)의 아들이며, 카데시 전투에서 싸운 인물
무르실리 3세(Muršili III) c.1282/1272– c.1275/1264 BC c.1272– c.1267 BC c.1272– c.1265 BC 무와탈리 2세(Muwatalli II)의 아들
하투실리 3세(Ḫattušili III) c.1275/1264– c.1245/1239 BC c.1267– c.1237 BC c.1265– c.1240 BC 무르실리 2세(Muršili II)의 아들이며, 이집트–히타이트 평화 조약의 서명자
툿할리야 4세(Tudḫaliya IV) c.1245/1239– c.1215/1209 BC c.1237– c.1209 BC c.1240– c.1215 BC 하투실리 3세(Ḫattušili III)의 아들이며, 니히리야(Nihriya) 전투에서 싸운 인물
아르누완다 3세(Arnuwanda III) c.1215/1209– c.1210/1205 BC c.1209– c.1207 BC c.1215– c.1210 BC 툿할리야 4세(Tudḫaliya IV)의 아들
숩필풀리우마 2세(Šuppiluliuma II) c.1215/1205– c.? BC c.1207– c.? BC c.1209– c.1185 BC 툿할리야 4세(Tudḫaliya IV)의 아들이며, 청동기 시대 후기 붕괴와 왕국의 끝 직전에 마지막으로 알려진 왕

 

 

툿할리야 1
 
회복으로 가는 여정은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왕들이 이끌었다. 그 중 두 명은 툿할리야(Thdhaliya)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 왕들은 남동 해안에 자리한 키주와트나를 포함한 중앙과 남부 아나톨리아에 대한 패권을 확인하였다. 키주와트나는 이전에 미타니가 통치하던 지역이었다. 더욱이 북서 시리아의 패권 도시 알레포가 미타니에서 하티로 동맹을 옮겼다.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에서 하티의 경쟁국은 이집트와 미타니였다. 이 두 나라는 전에 한 판 붙었으나 14세기 초에 히타이트의 압력에 연합군을 형성하여 대항한 것 같다. 이집트와 미타니 사이의 정략결혼과 왕래 서신들은 그런 변화된 양국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집트도 하티의 서쪽에 자리한 아르자와(Arzawa)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정략결혼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모두 새롭게 등장한 하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아나톨리아의 서쪽과 북쪽은 하티에게 매우 문제가 된 지역이었다. 흑해 남쪽 해안 출신인 가스가(Gasga) 족은 하투사를 공격해 파괴하였으며 서쪽 지방의 속국이었던 마두와타(Madduwatta) 14세기 중엽에 남서 아나톨리아와 키프로스를 정복하였다.
 
숩필룰리우마 1
 
그러나 이런 시련은 숩필룰리우마 1(Suppiluliuma I, 재위 1344~1322)에 의해 만회되었다.그는 아버지 툿할리야 3세 아래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 검증받았다. 히타이트 중심부로부터 남쪽과 서쪽의 아나톨리아 지방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한 후 숩필룰리우마는 북으로부터 미타니를 침략하여 수도를 점령하였다. 미타니의 서부 지방은 그의 속국이 되었다. 이로써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까지 히타이트의 통치가 확장되었다. 특히 다마스커스 지방까지 히타이트의 영향권 아래 들어왔다. 우가릿, 카데스, 아무르를 포함한 수많은 국가들의 왕들은 숩필룰리우마와 종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지역에서 그의 주 경쟁자인 이집트는 당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신경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두 강대국 사이의 직접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티와 이집트는 서로를 동등한 국가로 인정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집트의 여왕이 남편을 여의자 숩필룰리우마의 아들을 남편으로 요구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있었다.
 
숩필룰리우마의 통치 말에 하티는 북시리아의 대부분을 확실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두 왕자를 전략적으로 중요한 카르케미스와 알레포에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미타니와 다마스커스 지역에는 속국 왕을 두었다. 그러나 숩필룰리우마의 통치는 재앙으로 끝났다. 숩필룰리우마 자신과 그의 후계자가 시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옮겨온 역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무르실리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들인 무르실리 2(1321-1295)는 시리아에서의 패권을 잃지 않았다. 나아가 아버지가 소홀히 한 아나톨리아 지역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쏟았다. 숩필룰리우마 집권 초에 이집트에게 쏠렸던 서쪽의 아르자와를 격파하였다. 북쪽의 가스가 족도 공격하였다.
 
무와탈리 2
 
북쪽의 가스가 족은 무와틸리 2(1295-1272)가 통치할 때 수도인 하투사를 점령하는 등 계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이것은 하티가 시리아에 신경을 쏟다보니 북쪽 국경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여 아나톨리아 내지에 대한 통제를 잃게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와탈리(Muwatalli)는 시리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남부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무명의 도시인 타루훈타사(Tarhuntassa, 정확한 위치는 미상)로 수도를 옮겼다. 이 천도가 가스가의 하투사 점령으로 이어졌는지 아니면 천도로 인해 가스가 족이 침입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19왕조 아래에서 이집트도 다시 부흥하여 시리아에 계속적인 원정을 감행하였다.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은 람세스 2세와 무와탈리 2세 사이의 카데스 전쟁(1274)에서 절정을 맞이하였다. 이 전쟁은 비록 람세스 2세가 진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집트 비문과 그림에서 매우 자세히 다루어졌다. 물론 비문에서 람세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패배는 히타이트가 카데스 전쟁 후 남부 시리아까지 패권을 확장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 전쟁은 이집트와 하티가 시리아 지역을 놓고 벌인 수세기 동안의 경쟁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하투실리 3
 
무와탈리는 그의 형제(나중에 하투실리 3)에게 북쪽 지역을 맡겼다. 후자는 수년 전에 가스가에게 빼앗긴 하투사와 네릭이라는 제의 중심지를 탈환하였다. 무와탈리의 아들인 우르히-테숩(Urhi-Teshub) 무르실리 3라는 칭호로 왕위에 올랐을 때, 하투실리 3는 북쪽을 기지로 삼아 그 어린 왕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비록 정통성을 가진 우르히-테숩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지지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하투실리 3세는 결국 그를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그 후 30년간(1267-1237) 왕으로 다스렸다. 하투실리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외교이다. 그는 바빌론의 카다스만-투르구(Kadashman-Trugu)와 카다스만-엔릴(Kadashman-Enlil)과 관계를 맺고 아무루와 같은 속국들과의 조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은 그의 통치 기간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카데스 전쟁이 있은 지 15년 후 1259년에 하티와 이집트는 적대 관계를 종식시키고 방어적 연합을 이루며, 정치적 망명자를 교환하는 내용의 구체적인 협정을 체결하였다. 람세스 2세는 또한 하투실리가 선택한 후계자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하투실리는 람세스 2세에게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 미타니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아시리아의 위협이 그 조약을 촉발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하투실리 정권의 정당성 확보가 더 시급한 이유였다고 주장한다. 하투실리의 후계자 문제는 그가 왕위 찬탈자라는 사실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다.
 
쇠락으로 가는 히타이트
 
그러나 하티는 매우 빠르게 쇠퇴해갔다. 내부적으로 왕위 내정자였던 툿할리야 4(1237-1209)는 무와탈리의 아들, 쿠룬타(Kurunta)의 강력한 왕위 주장에 맞서야 했다. 쿠룬타는 하투실리 3세가 타루훈타사의 왕으로 옹립하였었다. 쿠룬타가 하투사에서 발견된 인장에서 대왕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228-1227년의 기간에 잠깐 툿할리야 4세를 퇴위시켰던 것 같다. 어쨌든 툿할리야는 왕위를 다시 차지하였다. 외부적인 압력도 매우 컸다. 아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Tukulti-Ninurta I, 재위 1243~1207)는 동에서 히타이트 제국을 공격하였고 아나톨리아의 서쪽 지방과 남서 지방의 속국들이 반란하였다. 에게 해에 인접한 지방에서의 반란은 아마 아히야와의 왕이라는 잘 알 수 없는 인물에 의해 촉발된 것 같다. 그는 그 지역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으나 어느 지역에서 언제 활동했는지는 잘 모른다. 툿할리야 4세는 밀라와타(밀레투스)를 회복하였으나 아나톨리아 서쪽 지역에 대한 하티의 통치는 사실상 끝나게 된다.
 
숩필룰리우마 2 1207년에 왕위에 올랐을 때 하티의 멸망은 매우 임박한 것이었다. 하티의 붕괴 원인들은 명확하지 않다. 하투사가 파괴되었다. 더 이상의 왕실 문서가 생산되지 않았다. 우가릿과 같이 히타이트의 통치 아래 있었던 다른 도시들도 사라져 버렸다. 이집트 자료에 따르면 아나톨리아 지역 전체와 서부 시리이 지역이 전반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히타이트 도시들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카르케미스(Carchemish). 그곳에서 히타이트 왕실의 한 분파가 자신들을 계속해서 대왕으로 불렀다. 이 붕괴는 1200년경에 발생한 전체 지역 시스템의 붕괴라는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히타이트라는 나라는 다시는 중앙 아나톨리아에 나타나지 않았다.
 
서쪽 아히야와 왕국과 히타이트
 
이 시기의 후반부에 가장 중요한 서부 아나톨리아 왕국은 아히야와(Ahhiyawa)라는 나라였다. 이 나라의 역사 서술은 그것이 미케네 그리스와 가지는 관계에 따라 매우 복잡해질 수 있다. 물론 미케네 그리스는 아나톨리아 해안에 상업적 전진기지를 건설하였다. 아히야와와 그리스인에 대한 호머의 용어인 아카이아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부터 그 둘이 같은 것인지가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비록 증거가 불충분하지만 아히야와라는 말이 서부 아나톨리아에 설치된 미케네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군사적 기지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히야와라는 말은 히타이트 문서에서 15세기 이후로 계속 언급된다. 그러나 그 후 200년이 지날 때까지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하는 나라였다. 하투실리 3세는 반란에 참여한 서부 지역에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아히야와 왕에게 편지를 썼다. 그를 형제라고 부르면서 하투실리 3세는 그의 영토에서 활동중인 반란군들을 제어해 주도록 설득했다. 하투실리 3세의 후계자인 툿할리야 4세는 서쪽으로 군사적 원정을 감행하여 아히야와의 영토를 침입하였다. 아히야와가 중요한 국가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은 그 왕이 아무르의 왕인 샤우스가-무와(Shuashga-muwa)와 맺은 조약을 통해 분명해진다. 그 조약에서 그는 이집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를 형제국으로 적는다. 아히야와의 왕은 그 나라들 다음에 오도록 기록되었으나 서기관이 아히야와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렇게 지운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분명한 것은 그 당시 아히야와가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아무르가 아시리아와 아히야와 사이의 해상 무역을 막아야 한다는 조약의 내용은 아히야와인들이 중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선원들이었음을 암시한다. 툿할리야 4세 이후 아히야와 인들에 대한 문서적 증거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 문서에 나타나는 해상 민족의 하나인 에크웨스(Ekwesh)와 동일시 될 수 있다면 그들은 12세기 초의 지중해 동쪽 지방에서 발생한 범지역적 재앙에 한 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히타이트인들에 대해 품은 적의는 그 국가의 멸망에 참여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북쪽 가스가 민족과 히타이트
 
하투사의 북쪽으로는 중앙 권력을 가진 나라가 없었다. 그 지역은 히타이트 문서에서 가스가로 불리는 민족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들은 히타이트 사료에서 언제나 공격적이고 거친 부족인들로 히타이트 도시들을 침략하고 때때로 그들을 정부의 통제로부터 단절시킨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그의 형제 아래 있을 때 하투실리 3세의 의무 중 하나는 가스가인들이 점령한 영토를 회복하고 그들로부터 북쪽의 제의 센터인 네릭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히타이트의 정치 구조  봉건제 형식
 
히타이트의 정치 구조는 종종 중세 서부 유럽의 봉건제도와 비교된다. 하티의 대왕은 핵심 지역은 직접 관할하지만 그의 영향 아래에 있는 대부분의 지역, 즉 서남부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지역은 종속 왕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종속왕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 지방 출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맹을 하티에서 이집트나 아시리아와 같은 다른 강대국들로 바꿀 수 있었다.
 
무르실리 3세와 하투실리 3세의 왕위 다툼
 
히타이트 왕은 자신의 지위를 대왕 그리고 태양이라는 칭호로 나타냈다. 그에게 옛 하티의 칭호였던 라바르나 혹은 타바르나도 주어졌다. 이 말은 아마 하티 왕조의 최초 왕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 같다. 그의 아내에게는 타와난나(Tawananna)라는 칭호가 주어졌고 이것도 최초의 여왕을 언급하는 것 같다. 그녀는 상당한 권력을 가졌고, 그런 권력은 때때로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왕위 계승에 대한 계속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종종 아버지-아들 순서로 계승되지 않았고 형제가 왕이 되었다. 이 때문에 무와탈리의 아들과 형제 사이에 왕위 다툼이 생겼다. 이 왕위 다툼은 근동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왕위 다툼 사건이다. 무와탈리의 서자인 우르히-테숩이 무르실리 3의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무와탈리 3세의 형제인 하투실리 3가 반란을 일으켜 5년 만에 그의 조카를 몰아냈다. 왕위 찬탈이 상당한 범법행위였음은 하투실리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변명이라는 긴 문서를 작성했음에서 알 수 있다. 그 문서에서 그는 그가 그의 형이 수도를 남쪽 도시인 타르훈타사로 옮겼을 때 북방 영토에 대한 관할을 맡았고 그의 형제를 위해 변방 지역들을 성공적으로 정복했음을 기술한다. 무와탈리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 하투실리는 처음에 그를 지지했으나 점점 그의 조카에게 실망하게 되었다. 그의 세력과 친구들의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하투실리는 전쟁을 하였다. 어린 조카 왕을 사로잡은 하투실리는 우르히-테숩이 마술을 사용했다고 고소하였다. 마술 사용은 그의 왕위에 대한 법적 정당성이 약함을 보여주었다.
 
하티는 제2천년기 후반부의 고대 근동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들 중 하나였다. 하티는 당시의 국제 문화에 적극적인 참여자였다. 근동 세계의 끝자락에 위치해 다른 나라들보다 더욱 외국의 압력에 노출되었고 하티의 내부의 정치 구조는 상대적으로 느슨하였다. 하티의 붕괴는 갑작스럽게 일어났고 거의 완전한 것이었다.
 

 

마르크 반 드 미에룹, 고대 근동 역사 23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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