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역의 기독교 3ㆍ1운동” - 송현강(2018)
송현강 (2018). 서울 지역의 기독교 3 1운동. 기독교사상, 719, 109-119
기독교인들의 민족대표 구성 및 서울 시위 상황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과 관련된 기독교계 인사들의 참여과정... (10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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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안도와 서울 지역을 연결하는 장로교의 흐름... 2월 초 신한청년단에서 파견된 선우혁의 활동... 2월 평북노회(선천) 개최... 이승훈은 선우혁과 만난 직후 서울로 와서 남대문교회의 함태영과 이갑성을 만나 참여 약속을 받았다. 그는 2월 10일 선천으로 가서 평북노회 참석 중인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이명룡 등을 포섭... 그리고 평양으로 가서 남산현교회의 신흥식 목사와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를 소개받아 그들 역시 함께하기로 약속... 이승훈은 2월 17일 다시 상경한 후 서울에 체류하면서 함태영, 이갑성 등 장로교 인사들과 박희도, 오화영 등 감리교 인사들을 두루 접촉하여 기독교 대표 진용을 구성하였다... 이승훈은 3ㆍ1운동의 코디네이터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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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감리교의 운동 흐름... 박희도가 앞장섬... 해주 의창학교와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중퇴한 상태에서 1918년 10월부터 서울 YMCA학생부와 회우부 간사로 근무... 숭실 재학 시절부터 그를 도와주었던 북감리교 선교가 베커가 교장으로 있는 수창동 영신학교 교감으로도 근무하고 있어 그곳을 통해 북장로교나 남감리교 인사들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식 소식을 먼저 들음... 2월 10일경부터 강기덕, 한위건, 김원벽, 주익 등 서울 YMCA를 드나들던 청년 학생들과 독립운동을 모의... 2월 16일 서울에 온 신흥식과 이승훈을 만나고, 이어서 남감리교의 정춘수, 오화영과 접촉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서울 지역의 기독교 세력 연대가 이루어졌다... 감리교를 대표하며 장로교의 이승훈과 함께 기독교 측 실무를 담당... 에큐메니컬 운동 단체인 YMCA와 영신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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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감리교... 원산 상리교회의 정춘수 목사와 서울 종교교회의 오화영 목사, 그리고 수포교교회의 신석구 목사 등 3명이 참여하였다. 집회 참석차 2월 16일 상경한 정춘수 목사는 서울에 당도하자마자 박희도를 만나 상황을 파악하고 그 정보를 오화영 목사에게 전했다. 오화영 목사는 신석구 목사를 포섭하는 일을 비롯하여 남감리교를 대표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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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상순 학생측 규합 책임을 맡은 박희도는 경신학교 출신으로 연희전문의 학생인 김원벽을 만나 접촉 방안을 의논... 보성전문의 강기덕, 경성의전의 한위건과 김형기, 경성공전의 주종선, 경선전수학교의 김공후 등을 종로 관수동의 한 음식점으로 불러 상호 결속하기로 합의... 세브란스병원의 이갑성 역시 2월 12일과 14일 두 차례에 걸쳐 세브란스의전 구내 자택으로배동석과 김문진(세브란스의전), 김원벽(연희전문), 한위건과 김영기(경성의전), 윤자영(경성전수) 등을 불러 회합을 가졌다.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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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벽과 강기덕은 박희도와 다시 회합하여 6개 전문학교의 활동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2월 20일 승동예배당에서 학생간부회를 다시 개최하고 자신의 학교는 물론 연고가 있는 중등학교 학생 대표자를 찾아 연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김원벽의 경우, 경신 동문이며 연희전문 학생회장인 이병주를 포섭하였고, 이병주는 다시 학생 40명의 찬동을 받아왔다. 김원벽은 모교인 경신의 학생 대표인 강우열, 강창준을 접촉하여 결국 전교생 100여 명의 호응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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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를 하루 앞둔 2월 28일 오후 4시, 이갑성은 독립선언서 1,500매를 강기덕에게 전달했다. 이날 밤 김원벽과 강기덕은 이필주 목사 자택에 중등학교 대표들을, 승동예배당에 전문학교 대표들을 모이게 하여 선언서를 배분하였다. 3월 1일에 1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뒤 3월 5일에 학생 주도의 제2차 만세시위를 다시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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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오후 2시경 탑골공원의 팔각정에는 3,000-4,000명의 학생들이 운집했다. 경신학교 출신의 정재용은 독립선언서를 꺼내 단상으로 올라가 낭독하였다... 1대는 종로-남대문-서소문-정동-대한문-광화문-서대문 합동-장곡천정-조선은행-진고개로 진행하다가 일경과 충돌한 후 해산... 2대는 종로통-돈화문-총독부의원을 거쳐 해산... 연행된 학생들은 134명이었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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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5일 오전 8시, 3ㆍ1운동을 주도했던 서울의 학생들에 의해 남대문광장(서울역 앞)에서 제2차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지방민과 학생들이 귀향하기 위해 모이는 지점에서 거사... 독립운동을 전국 곳곳으로 다시 한번 확산하려는 의도... 전날 3월 4일 오전에 각 전문학교 및 중등학교 학생 대표자들이 배재고보 기숙사에 모여 이에 관한 비밀회의를 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희전문의 김원벽과 보성전문의 강기덕을 총지휘자로 선정하고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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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독립운동... 일반인들까지 합세한 4,000-5,000명의 시위대는 남대문을 향해 돌진... 제1대는 남대문시장-조선은행-종로보신각으로... 제2대는 남대문-대한문-무교동-보신각으로 향했다. 군중은 1만명으로 불어났다. 일경의 집요한 진압으로 결국 75명이 연행당하고 나머지는 강제해산당했다. (113)
서울 지역 기독교 학교들의 3ㆍ1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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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 김원벽... 세브란스의전에서는 3ㆍ1운동의 학생 대표였던 김문진과 이용설의 활약... 이용설은 3ㆍ1운동의 뒷소식을 전하는 「독립신문」을 만들어 뿌림... 이용설의 활동은 3ㆍ1운동의 진상을 세계에 소개한 세브란스의전 교수 스코필드도 기억하고 있다... 연희전문은 전교생 수가 1918년 94명, 1919년에는 17명에 불과했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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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감리교 배재고등보통학교의 모의와 준비는 당시 배재 이사이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정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이필주의 자택에서 1919년 2월 하순부터 진행되었다... 이필주 목사와 배재의 연락망은 당시 교사이자 정동교회에 출석하던 김진호 목사가 맡았다. 1919년 2월 25일에는 정동교회의 이필주 목사의 방에서 학생 간부들이 모여 파고다공원에서의 대시위 운동을 모의했다... 1919년 3월 4일 학생 간부들이 다시 기숙사에 모였을 때 김병호는 격려문과 전단 제작의 책임을 맡았다. 3월 5일 시위에서 배재 학생 18명(김병호, 장대진, 장용하, 김기진, 신봉조, 이병선, 정종용, 임창호, 진번 등)이 체포당하여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제5대 교장 아펜젤러는 교장 인가를 취소당했다.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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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감리교의 이화학당... 1919년 2월 28일의 정기회합에서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 이화학당의 지도급 학생들 중에는 정동교회에 나가는 자가 많아서 음으로 양으로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로부터 감화를 받고 있었다... 1) 학생 동원 대표 신덕심, 유점선, 김마리아, 노예다의 지휘 아래 직접 파고다공원에서 시민들과 합세... 2) 소복을 입고 대한문 앞에 가서 엎드려 곡을 하는 일... 대한문으로 나가려던 학생들은 교정으로 집합하고 있었는데, 이를 서양인 교사들이 제지... 그러자 서명학, 유관순, 김복순, 김희자, 국현순 등의 5인 결사대는 10여 명의 다른 학생들과 기숙사 뒷담을 넘어 남대문 쪽으로 달려갔다. 일경은 교사 박인덕과 신준려를 연행하여 투옥하였다. 그 외에도 28평의 이화 학생이 검거되어 그중 5명이 징역을 받았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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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장로교의 경신학교는 1ㆍ2차 시위 과정에서 졸업생 배동석, 정재용, 김원벽, 이병주, 오태영, 하태흥과 재학생 강우열, 강창준, 박인석, 황창희, 정기순, 조용석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 경신학교는 1920년 초까지 수업이 정상화될 수 없었다. 학생과 교사 대부분이 수사망 때문에 등교하지 못했기 때문... 1919년 4학년 졸업행 20명은 추후에 개별적으로 졸업장을 받아갔다. 3ㆍ1운동에 가장 많이 참여했던 3학년들은 대부분 유급되어 1920년 졸업 대상자는 1명(김용, 제14회)에 불과했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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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장로교의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의 만세시위에 참여... 특히 3월 5일의 남대문 시위에는 더 많은 정신의 학생들이 가담... 일경은 학교 구내 기숙사까지 찾아와 학생들을 체포... 정신 졸업생이자 교사였던 김마리아도 연행되어 고문을 당함... 8월 4일 출옥한 김마리아는 학교 기숙사에 누워 지내면서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항일 여성운동의 산실로 삼았다.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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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감리교의 배화학당 학생들은 2월 27일 밤에 학생 대표인 김정애, 김해라, 최은심 등이 식당에 모여 거사일에 전교생을 동원할 방법과 행동을 모의했다. 김정애는 시내 여학생 연락본부인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등사한 독립선언문을 두 번에 걸쳐 배화학당에 가져다 놓았다. 김정애는 수업이 끝나고 밤 10시가 되면 몰래 기숙사 뒷산 철망을 뚫고 시내로 나가 선언문을 배포했다. 2월 28일 밤에는 여염집 부인으로 변장하고 집집마다 던져 넣었다... 정작 거사일 3월 1일에 배화학당은 봉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학생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스미스 교장과 교사들이 학교 수업을 일찍 끝내서 모이지 못하도록 조치했고, 오후에는 미리 일경이 나타나 주모 학생들을 찾아다녔다... 김정애는 홍천 모곡의 은사 남궁억 선생을 찾아가 은거... 배화의 교사 김응집과 이정찬, 부속학교인 광희문여학교의 교사 조민형이 잡혀 들어가 각각 징역 8개월, 구류 45일,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115-116)
서울 지역 교회들의 3ㆍ1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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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역 감리교회는 3ㆍ1운동 모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 남감리교 종교교회는 오화영 담임목사와 정춘수 목사가 처음 독립운동을 시작한 장소... 북감리교 정동교회는 이필주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최성모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 등이 회합하여 북감리교 목회자들의 논의 장소가 되었다. 2월 27일에는 기독교계 세력의 단일화가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한 현장이 되었다. 3월 1일 당시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태화관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중앙교회는 이 교회 소속 박희도 전도사와 김창준 전도사가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으며, 교인들도 운동 준비와 거사에 적극 참여하여 그로 인한 피해가 컸다.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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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감리교) 목회자들이 모두 체포... 정동교회의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 중앙교회의 김창준 전도사와 박희도 전도사, 종교교회의 오화영 목사, 수표교교회의 신석구 목사 등 목회자만 6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정동교회의 김진호 목사와 정득성 전도사, 이화학당 교사 황애덕... (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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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장로교회... 김백원, 차상진 목사와 함태영 조사, 이갑성, 김원벽 등이 감옥에 갇혔다. 김백원 목사와 차상진 목사는 ‘12인 등의 장서’를 발표하여 투옥되었다. 당시 김백원은 서울 안동교회, 차상진은 승동교회에 시무 중이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12일 서울 서린동에 있는 음식점 영흥관에 모여 당시 조선 총독에게 보낼 장서를 기초하고 그것을 보신각 앞에서 낭독하였다... 함태영 조사는 연동교회 장로로 시무하다가 1918년 남대문교회 조사로 부임하여 목회자로 활동 중 3ㆍ1운동에 적극 가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함태영은 이승훈의 부탁으로 참여하여 남대문교회 교인 이갑성을 민족대표로 끌어들였고, 기독교 측을 대표해 천도교 측과 교섭하는 등 3ㆍ1운동에 주도적이었다.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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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교회 전필순 조사는 3ㆍ1운동 직후 이상재 등 70여 명이 날인한 독립촉성에 관한 진정서를 미국 영사관을 통해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토록 하여 민족대표 33인의 석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다시 대동단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이밖에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에 갇혔던 김마리아를 비롯한 이혜경, 장선의, 이정숙, 김영순, 신의경 등은 모두 연동교회 교인이었다. (117)
서울 지역 선교사들의 3ㆍ1운동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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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의 요청으로 서울에서 유력 선교사들과 총독부 고위 관리들의 회합이 몇 차례 이루어졌다... 당시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정서는 한국인들의 독립시위에 놀라고 공감을 하면서도, 그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막으려는 것이었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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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은 일찍부터 대책을 협의하고 일제에 항의하며 편지와 보고서를 친지와 선교본부에 비밀리에 보내 일제의 비인도적 3ㆍ1운동 탄압의 실상을 폭로하였다. 선교사들에 대한 일제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언론을 동원하여 선교사들을 사주자나 선동자로 매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을 회유해가면서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시위를 중단하도록 할 것을 촉구하였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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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4일 세브란스 병원의 스코필드는 자전거로 직접 사건 현장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자택에 부상자들을 숨겨주었다. 그는 4월 7일에도 진관내동에 가서, 만세운동 후 태형을 맞고 나온 부상자 정태순과 정태석을 방문하여 그들을 세브란스에 입원시켰다... 그날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서울 초음정감리교회에서 “이번 사건으로 죽은 사람은 천국에 갈 것이고 부상자는 후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라는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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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노블을 비롯한 선교사 6명은 미국 총영사를 방문하여, 선교사들이 구금되고 예배당이 불타는 상황에서 영사관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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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서울 선교사 쿤스와 저다인, 빌링스 등은 응접실에 태극기를 걸어 놓아 한국인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고, 이날 연지동 쿤스의 집에서는 클라크, 탐스, 빌링스, 루이스 등 남녀 선교사 23명이 북장로교 서울스테이션 월례회로 회집하여 사태를 논의하였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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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선교사연합회 특별위원회가 정동 빌링스 선교사의 집에서 열렸다... 3ㆍ1운동으로 예배당이 파괴된 것과 기독교인 박해 및 선교 방해 상황을 조사하여 본국 선교본부에 알리고, 대표 1인을 선발하여 미국에 보내기로 하였다. 조사위원으로는 노블, 왓슨, 베어드, 아담스 등이 선정되었다.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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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미국인 선교사 데밍은 3ㆍ1운동은 조선인들의 자동적 천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에도 일본인들은 선교사들이 배후 조종한 것으로 오해하여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다고 발언하였다. 세브란스병원의 반버스커크는 일제의 병원, 학교, 가택 수색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이를 미국에 알려서 배일선동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