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자료실]/인물 [타]
고려 태조 왕건 [高麗 太祖 王建, 877~943] 고려의 초대 국왕(재위 : 918~943)
[*수호천사*]
2025. 6. 18. 14:00
728x90
고려 태조 왕건 [高麗 太祖 王建, 877~943] 고려의 초대 국왕(재위 : 918~943)
【개인 정보】
- [이름] 왕건(王建)
- [별호] 약천(若天)
- [묘호] 태조(太祖)
- [출생] 877년 1월 14일(음력), 신라 한산주 송악
- [사망] 943년 5월 29일(음력), 고려 개경 신덕전
- [재위] 918년 6월 15일(음력) ~ 943년 5월 29일(음력)
【가족 관계】
[부모]
- [부친] 고려 세조 왕륭(高麗 世祖 王隆, ?~897)
- [모친] 위숙왕후 한씨(威肅王后 韓氏, ?~?)
[배우자] 29명
- 신혜왕후 유씨 / 본관 : 정주 / 부모 : 유천궁(柳天弓), 미상
- 장화왕후 오씨 / 본관 : 나주 / 부모 : 오다련(吳多憐), 연덕교(連德交)
- 신명순성왕후 유씨 / 본관 : 충주 / 부모 : 유긍달(劉兢達), 미상
- 신정왕후 황보씨 / 본관 : 황주 / 부모 : 황보제공(皇甫悌恭), 미상
- 신성왕후 김씨 / 본관 : 경주 / 부모 : 김억렴(金億廉), 미상
- 정덕왕후 유씨 / 본관 : 정주 / 부모 : 유덕영(柳德英), 미상
- 헌목대부인 평씨 / 본관 : 경주 / 부모 : 평준(平俊), 미상
- 정목부인 왕씨 / 본관 : 강릉 / 부모 : 왕경(王景), 미상
- 동양원부인 유씨 / 본관 : 평산 / 부모 : 유금필(庾黔弼), 미상
- 숙목부인 임씨 / 본관 : 진주 / 부모 : 임명필(林名必), 미상
- 천안부원부인 임씨 / 본관 : 경주 / 부모 : 임언(林彦), 미상
- 흥복원부인 홍씨 / 본관 : 홍주 / 부모 : 홍규(洪規), 미상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본관 : 미상 / 부모 : 이원(李元), 미상
- 대명주원부인 왕씨 / 본관 : 강릉 / 부모 : 왕예(王乂), 미상
- 광주원부인 왕씨 / 본관 : 양근 / 부모 : 왕규(王規), 미상 – 945년 왕규의 난으로 숙청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본관 : 양근 / 부모 : 왕규(王規), 미상 – 945년 왕규의 난으로 숙청
- 동산원부인 박씨 / 본관 : 승주 / 부모 : 박영규(朴英規), 국대부인 견씨(國大夫人甄氏) - 견훤의 외손녀
- 예화부인 왕씨 / 본관 : 해주 / 부모 : 왕유(王柔), 미상
- 대서원부인 김씨 / 본관 : 서흥 / 부모 : 김행파(金行波), 미상
- 소서원부인 김씨 / 본관 : 서흥 / 부모 : 김행파(金行波), 미상
- 서전원부인 ▨씨 / 본관 : 미상 / 부모 : 미상
- 신주원부인 강씨 / 본관 : 신천 / 부모 : 강기주(康起珠), 미상 - 광종의 양모
- 월화원부인 ▨씨 / 본관 : 미상 / 부모 : ▨영장(▨英章), 미상
- 소황주원부인 ▨씨 / 본관 : 미상 / 부모 : ▨순행(▨順行), 미상
- 성무부인 박씨 / 본관 : 평주 / 부모 : 박지윤(朴智胤), 미상
- 의성부원부인 홍씨 / 본관 : 의성 / 부모 : 홍유(洪儒), 미상
- 월경원부인 박씨 / 본관 : 평주 / 부모 : 박수문(朴守文), 미상 - 성무부인의 조카
- 몽량원부인 박씨 / 본관 : 평주 / 부모 : 박수경(朴守卿), 미상 - 성무부인의 조카
- 해량원부인 ▨씨 / 본관 : 미상 / 부모 : ▨선필(▨宣必), 미상
[왕자] 25명
- 혜종(惠宗) 무(武) / 생몰년 : 912~945년 / 모친 : 장화왕후 오씨 / 배우자 : 의화왕후 임씨(義和王后 林氏) / 제2대 국왕
- ▨▨태자(▨▨太子) 태(泰)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신명순성왕후 유씨 / 배우자 : ▨▨공주 왕씨(▨▨公主 王氏 - 태조와 흥복원부인 홍씨의 딸로, 작호가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 정종(定宗), 요(堯) / 생몰년 : 923~949년 / 모친 : 신명순성왕후 유씨 / 배우자 : 문공왕후 박씨(文恭王后 朴氏 - 동산원부인의 동생이며 견훤의 외손녀),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 朴氏 - 동산원부인의 동생이며 견훤의 외손녀) / 제3대 국왕
- 광종(光宗), 소(昭) / 생몰년 : 925~975년 / 모친 : 신명순성왕후 유씨 / 배우자 :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 皇甫氏) / 제4대 국왕
- 문원대왕(文元大王), 정(貞)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신명순성왕후 유씨 / 배우자 : 문혜왕후 유씨(文惠王后 柳氏)
- 증통국사(證通國師)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신명순성왕후 유씨
- 대종(戴宗), 욱(旭) / 생몰년 : ?~969년 / 모친 : 신정왕후 황보씨 / 배우자 : 선의왕후 유씨(宣義王后 柳氏) / 고려의 추존 국왕, 제6대 국왕 성종의 아버지
- 안종(安宗), 욱(郁) / 생몰년 : ?~996년 / 모친 : 신성왕후 김씨 / 배우자 :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王后 皇甫氏) / 고려의 추존 국왕, 제8대 국왕 현종의 아버지
- 왕위군(王位君)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정덕왕후 유씨
- 인애군(仁愛君)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정덕왕후 유씨
- 원장태자(元莊太子)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정덕왕후 유씨 / 배우자 : 흥방궁주 왕씨(興芳宮主 王氏)
- 조이군(助伊君)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정덕왕후 유씨
- 수명태자(壽命太子) / 생몰년 : 미상 / 모친 : 헌목대부인 평씨
- 효목태자(孝穆太子), 의(義) / 생몰년 : 미상 / 모친 : 동양원부인 유씨
- 효은태자(孝隱太子) 동양군(東陽君), 원(垣) / 생몰년 : 미상 / 모친 : 동양원부인 유씨 / 광종에 의해 처형됨
- 원녕태자(元寧太子) 진주낭군(鎭州郞君) / 생몰년 : ?~976년 / 모친 : 숙목부인 ▨씨 / 경종 원년(976년) 숙청
- 효성태자(孝成太子) 천안부원낭군(天安府院郞君), 임주(琳珠) / 생몰년 : ?~976년 / 모친 : 천안부원부인 임씨 / 배우자 : ▨▨공주 왕씨(▨▨公主 王氏 - 정종과 문성왕후 박씨의 딸로, 작호가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 경종 원년(976년) 숙청
- 효지태자(孝祗太子)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태자(▨▨太子), 직(稷) / 생몰년 : 미상 / 모친 : 흥복원부인 홍씨
- 광주원군(廣州院君)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소광주원부인 왕씨
- 효제태자(孝悌太子)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성무부인 박씨
- 효명태자(孝明太子)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성무부인 박씨
- 법등군(法登君)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성무부인 박씨
- 자리군(資利君)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의성부원부인 홍씨 / 배우자 : ▨▨공주 왕씨(▨▨公主 王氏 - 태조와 정덕왕후 유씨의 딸로, 작호가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왕녀] 10명
- 낙랑공주(樂浪公主), 안정숙의공주(安貞淑儀公主)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신명순성왕후 유씨 / 배우자 : 경순왕(敬順王)
- 흥방궁주(興芳宮主)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신명순성왕후 유씨 / 배우자 : 원장태자(元莊太子)
- 대목왕후(大穆王后)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신정왕후 황보씨 / 배우자 : 광종(光宗) / 경종의 어머니
- 문혜왕후(文惠王后)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정덕왕후 유씨 / 문원대왕(文元大王)
- 선의왕후(宣義王后)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정덕왕후 유씨 / 대종(戴宗) / 성종의 어머니
- ▨▨공주(▨▨公主)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정덕왕후 유씨 /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
- 순안왕대비(順安王大妃)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정목부인 왕씨 / 배우자 : 미상
- ▨▨공주(▨▨公主) / 생몰년 : 미상 / 모친 : 흥복원부인 홍씨 / 배우자 : ▨▨태자(▨▨太子)
- ▨▨공주(▨▨公主) / 생몰년 : 미상 / 모친 : 대량원부인 이씨 / 배우자 : 허사문(許士文)
- ▨▨공주(▨▨公主) / 생몰년 : 미상 / 모친 : 성무부인 박씨 / 배우자 : 경순왕(敬順王)
【출생, 그리고 궁예의 부하가 되다】
【기원후 877년】 출생하다
- 877년(헌강왕 3)에 개성(開城)의 해상 세력가인 왕융(용건)과 한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후 896년】 궁예의 부하가 되다
- 후삼국 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석권, 철원(鐵圓)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기원후 900년】 공을 세워 아찬이 되다
- 900년에 궁예의 명령으로 광주(廣州)ㆍ충주(忠州)ㆍ청주(靑州) 및 당성(唐城)ㆍ괴양(槐壤: 현, 충청북도 괴산군) 등의 군현을 쳐서 평정한 공으로 아찬(阿湌)이 되었다.
【기원후 903년】 후백제의 금성을 공격하다 / 나주 호족의 딸과 결혼하다
-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後百濟)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근 10여 개 군현을 빼앗아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때 궁예는 금성군을 나주(羅州)로 개명하였다.
- 나주 호족 오다련 등 전라남도 해안 지역 호족들은 견훤에게 적대적인 반면 왕건에게 우호적이었다.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 오씨는 왕건과 결혼 해 왕비 장화왕후가 되었다. 왕건과 장화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가 고려 2대왕 고려 혜종으로 추대되었다.
【기원후 905년】 궁예가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다
- 궁예가 905년 수도를 다시 철원(구철원 북쪽 30리에 있는 풍천원)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청주 지역의 1천 가구를 철원 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 세력 외에 새로운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기원후 906년】 상주에서 견훤의 군대를 격파하다
- 906년 궁예의 명을 받고 정기장군(精騎將軍) 금식(黔式) 등을 거느리고 상주의 사화진에서 견훤과 여러 번 싸운 끝에, 결국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기원후 909년】 나주시 금성을 정복하다 / 견훤의 함대를 대파하다
-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를 공격하고 나주시 금성을 정복하였다. 이후 덕진포에서 소수의 전함들로 견훤의 대함대를 화공으로 대파시켜 나주 사람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기원후 913년】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다
- 또한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구해주었다. 그리하여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그 동안의 전공으로 알찬(閼湌)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湌)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다】
【기원후 918년】 고려를 건국하다 / 호족의 딸과 결혼하다
-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ㆍ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태조 즉위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해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 태조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등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 세력에 대처해야 하였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豪族勢力)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였다.
-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안정책이었다. 신라(新羅) 말기 이래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의 표방은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하였으며,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기원후 919년】 지방 호족들의 협조를 얻으려 하다
- 태조는 궁예나 견훤(甄萱)에게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919년(태조 2)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중앙관부의 인사 조처를 단행하였다. 지방 군현의 승격과 강등을 자신에 대한 협조 여부로 결정함으로써 지방 호족들의 협조를 얻으려 하였다.
【기원후 920년】 신라와 친선, 후백제와는 화전 양면 정책
- 신라ㆍ후백제ㆍ고려의 후삼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태조 3)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해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 10월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는데,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 후백제와는 초기에 화전(和戰) 양면 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ㆍ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기원후 925년】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고전하다 / 발해의 망명자들이 넘어오다
-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925년(태조 8) 조물군(曹物郡) 전투에서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화친을 맺었다.
- 925년 9월부터 발해에서 대규모 망명자들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기원후 927년】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참패하다
- 927년(태조 10)의 공산(公山: 현, 대구광역시의 팔공산) 전투에서는 견훤군의 포위에 겨우 몸만 탈출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이 지역은 고려 역시 중요시했으므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기원후 929년】 김순식이 귀부하다
- 명주의 성주 김순식은 그가 궁예를 몰아냈다는 점을 비판하며 그에게 항거하였다. 김순식이 왕건에게 저항한 지 11년째인 이듬해 929년 1월에야 김순식 자신이 직접 왕건을 찾아서 알현함으로써 완전히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왕건은 그에게 왕씨 성을 사성했다.
【기원후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승리하다
- 930년(태조 13) 태조는 고창(古昌: 현, 경상북도 안동시)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기원후 935년】 나주 지역을 수복하다 / 신라가 항복하다
- 935년 유금필에게 명하여 929년에 빼앗긴 나주 지역을 다시 수복했다.
- 935년 3월,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때를 엿보다 자신의 막내 아들 능예, 딸 애복, 애첩 고비 등과 함께 금산사에서 탈출해 그 해 나주를 통해 고려에 귀부하게 된다.
- 같은 해 10월 신라왕의 자진 항복을 받게 되었다. 935년 신라 항복 이전에 신라 경순왕의 소개로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이자 김억렴의 딸인 신성왕후와 결혼하는 한편,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 유씨와 서녀 부인 왕씨를 신라 경순왕에게 보내서 사위로 삼는 등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하다】
【기원후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하다 / 후삼국을 통일하다
- 936년 9월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한다. 이때 이 ‘일리천 전투’에서는 고려 2대 황제가 되는 혜종 왕무(王武)와 강공훤, 그리고 명주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김순식이 결정적으로 활약했다.
- 고려군은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와 ‘일리천’에서 싸워 대패시켰고, 이후 신검군은 황산을 거쳐 탄현을 넘어 퇴각한 후 마성에서 마지막으로 항복해와 후삼국이 완전히 통일되었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저술,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 도의와 신하들이 지켜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기원후 940년】 지방 통치체제 구축 / 숭불정책
- 통일 후 4년이 지난 940년(태조 23)에는 역분전(役分田)이나 삼한공신(三韓功臣)의 제정과 함께 전국의 주요 지역에 주(州)를 설치하여 지방통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 숭불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신라 출신의 승려 충담을 왕사로 세우고, 940년 그가 죽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워 친히 비문을 지었으며, 940년 12월에는 충청도에 개태사를 완성시켰다.
【기원후 942년】 거란에 강경한 태도
- 942년, 거란이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어 낙타를 선물해 왔다. 하지만 왕건은 거란이 형제국인 발해와의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킨 신의가 없는 나라라고 하여 사신을 귀양보내고 낙타를 만부교에 메어 굶겨 죽이는 등 강경한 태도로 수교를 거부하였다.
【기원후 943년】 훈요십조를 남기다 / 67세로 임종하다
-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수(親授)해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훈요십조」는 태조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 943년 음력 5월 29일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듣자 왕건은 빙긋이 웃으면서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덧없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붕어하였다. 향년 67세였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