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자료실]/[도서 정리]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신 이야기”(마가복음 1장 29-31절)
[*수호천사*]
2021. 8. 20.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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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신 이야기”(마가복음 1장 29-31절)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 강일상, 69~84
편집 구조 분석
- 병자의 상황 :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간청 : “사람들이 그녀에 관해서 그에게 말한다”
치유 : “그가 가까이 가서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키셨다”
치유가 확인 : “그러자 열을 그녀를 떠났고, 그녀는 그들을 섬겼다” - 어떤 해석자들은 이 이야기를 제자들의 기억에 의존한 ‘역사적 회상’으로 보기도 한다. 기적설화에서는 유일하게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70)
-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귀신축출 사역이 시몬의 장모를 고치는 이야기까지 연장? 마가를 원자료로 사용한 누가는 그렇게 이해한 것 같다. 누가는 “열병을 꾸짖었다”(눅 4:39)고 하면서, 마가가 귀신 축출 때 사용한 “꾸짖었다”(1:25)는 말을 시몬 장모의 열병에까지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가에 대한 누가의 해석일 뿐이다. (70)
- 29절, “이윽고 그는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이 편집구에서 드러나는 마가의 우선적인 관심은 시몬의 ‘장모’가 아니라 시몬의 ‘집’이다. 마가는 분명 이 ‘집’을 ‘회당’과 대비되는 구도로 설정해놓고 있다... 회당에서의 이탈을 말할뿐 아니라, 이 ‘시몬의 집’을 예수님 일행의 새로운 활동 거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제는 이 ‘집’이 유대교의 회당에 대립되는 ‘새로운 의미의 회당’으로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1:32-34). (71)
- 이 집이 회당에 대립하는 새로운 활동 거점으로 쓰이게 된 데에는, 시몬의 장모와 연관시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30절)... (71)
해석상의 과제
- 전승 가치와 편집 의도에 의문을 제기할 만한 이야기... (72)
- 마가에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버리지 않고 남겨둔 게 아니겠느냐는 가정하에서, 그 숨은 의도를 찾고자 한 것... (72)
- 마가의 편집의도... 집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회당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이 집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본 것이다. 이 이야기를 ‘가버나움 교회 공동체의 설립 전승’으로 평가하고, 이 집을 그 새로운 공동체의 맹아(萌芽)로 보는 견해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시몬의 장모가 일으켜지고 그 삶의 변화하여 섬기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집의 중요성과 더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시몬 장모의 열병이 치유됨으로써, 비로소 이 집이 회당 이탈자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고, 그런 여인의 섬김을 통해서 이 집이 새로운 공동체의 모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72)
- 시몬의 장모를 앓아눕게 할 열병이란 과연 어떤 병일까? 30절 상반절... “그녀에 관해서” 이 이야기의 모든 동사는 과거형이다. 그런데 “그녀에 관해서 말한다”고 할 때 ‘말한다’는 동사만이 ‘현재형’이다. 어쩌면 마가는 이 ‘말한다’는 동사를 현재형으로 씀으로써, 독자인 우리더러 ‘그녀에 관해서’ 말해보라고 하는 게 아닐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라면 ‘그녀에 관해서’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73)
본문 해석
- ‘회당과 집의 대비’... ‘나와서’, ‘들어갔다’는 두 개의 상반되는 동사로 뒷받침... “회당에서 나왔다”는 것은 기존의 유대교 거점인 ‘회당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74)
- 마가의 입장에서 보면 회당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새 술에는 새 부대가 필요하듯이, 기존의 유대 공동체로는 하나님 나라를 담을 수가 없다. 그래서 회당을 벗어난 사람들은 시몬과 안드레의 집을 새로운 활동거점으로 택한 것이다. 이제는 이 집이 새로운 공동체의 맹아로 싹트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74)
- 결국 회당에서 이탈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잇는 셈이다... 골로새서 4장 15절은 이러한 집이 곧 ‘교회’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아마도 마가의 교회 역시 이러한 집을 근거로 형성된 공동체였을 것이다. (75)
- 시몬의 장모... 한 여인이 일으켜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75)
-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는 말에서 ‘누워 있었다’는 동사는 ‘미완료형’이다. 그 병이 그전부터 지속되어 왔고, 그래서 곧잘 열병으로 드러눕곤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문제는 그녀를 누워 있게 한 그 ‘열병’이다. (76)
- 복음서에서 무슨 병이니 무슨 환자니 하고 말할 때, 그것은 대부분 명사로 표기되어 있지 않고, ‘형용사나 동사의 분사형’을 사용하면서 ‘그 어떤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흔히들 “열병”이라고 번역한 ‘퓌렛수사’라는 말도, ‘불이 붙다, 열이 나나’라는 뜻을 가진 ‘퓌렛소’라는 동사의 현재분사형이다. 그러니까 병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열이 나고, 불이 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열불이 나서”라고 의역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굳이 병이라고 한다면, 그건 ‘화병’(火病)일 게 분명하다... 장모의 집에 가출한(?) 사위 일행이 들어갔으니, 이제 우리의 상상력도 날개를 달만 하지 않은가? (77)
- 시몬의 장모가 (가출한) 사위와 예수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심정적인 괴로움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키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그 여인에 대해서” 말했다고 하는 그 사연은, 이렇듯 상상력을 요하는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7-78)
- ‘눕다’... 마가에게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누워 있다’고 말해 놓고 항상 그 뒤에 ‘일으킨다’는 부활 용어를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치병설화의 배경에 부활신앙이 깔려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부활’이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 생각하지만, 여기 마가는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가 일으켜지는 이러한 ‘삶의 변화’도 부활이라고 본 것이다. (78)
- “가까이 가셨다”... 예수님의 인격을 접함으로써 그 여인에게서 일어났을 마음의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 (79)
- 소문...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시몬의 장모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을 것이다. 사위가 가출한 것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자기 사위로 하여금 그물을 버리고 따라나서게 할 수 있었을까? 생계도 내팽개치고 가정도 버릴 정도의 그 무엇을 그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예수님을 정작 가까이 접하고 보니 그녀에게도 보이는 것이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다가서는 과정을 통해서 이러한 의문 또한 눈 녹듯 사라졌을 것이다. 자기사위가 그를 따라나선 까닭도 점차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 오시는 그의 인격 앞에서, 자기도 그를 ‘따르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킬 정도로 인격적인 감화를 받았으리라. 더욱이 가까이 오신 예수님이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시몬의 장모는 ‘나도 사위처럼 그를 따라 그처럼 살고 싶다’는 심령의 변화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사위치럼 자기도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삶의 새로운 활력소를 얻었을 것이다. (79)
- 이 ‘새로운 활력’을 마가는 ‘손’이라는 말로 상징하면서, “손을 잡아 일으켰다”는 말로 시몬의 장모에게서 일어난 ‘삶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성경에서 ‘손’이나 ‘팔’은 ‘권능과 힘’을 나타내는 상징(사 50:2, 51:9)이고, ‘일으켰다’는 말은 부활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마가는 이 ‘일으켰다’는 말로 시몬 장모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79-80)
- 바울은 말한다.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고전 15:13)... ‘죽은 자들의 부활’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부활’도 말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 ‘죽은 자들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데, 바울의 이 논리는 우리의 부활관과는 역순이다. (80)
- 바울이 ‘죽은 자들’이라고 할 때, 그것은 변화 이전의 삶, 즉 죄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여러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하고 말한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서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일으켜지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하고 말한 것이다. 바울에게는 변화 이전의 삶이 곧 죄 가운데 있는 삶이고, 그런 ‘죄인’들이 곧 ‘죽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81)
- 사도행전 26장 8절 이하... 바울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신다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왜 믿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됩니까”하고 반문하면서 9절부터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자기의 전과를 말한다. ‘죽은자들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리에서 왜 바울은 자기의 전과를 말하는 것일까? 스스로는 의로운 일이라 생각하여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학살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삶을 살았던 과거의 자기야말로 ‘죄인’이었고 ‘죽은 자’였다는 고백이다. 죄인으로서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자기가 변화되어 이렇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왜 당신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느냐는 항변이다. 단적으로 말해 바울은 자신의 변화된 삶을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관을 근거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81)
- 바울이 자기 삶의 변화를 통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했듯이, 여기 마가 역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예수께서 ‘일으키셨다’고 함으로써 그녀의 삶의 변화를 ‘부활’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81)
- 부활은 믿는 자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만 증거될 수 잇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을 ‘부활의 증인들’(행 1:22, 2:32, 3:15)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우리가 행하고 그가 사신 것처럼 우리가 살 때, 그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증거하는 삶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그(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고,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행 3:15)라고 말한다. (82)
- ‘화병’이 난 시몬의 장모에게서 “열이 떠났다”는 것으로 그 삶의 변화를 말한다면, 그녀가 그들을 ‘섬겼다’는 것으로 부활(일으켜짐)을 실증(증거)한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인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삶의 변화란 관념에 불과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때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하나의 특수한 사상체계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 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마가는 그녀의 섬김을 통해서 그녀의 부활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82)
- ‘섬기는 한 여인’과 ‘섬김을 받는 남자들’의 대비... 9장 33절을 보면 “누가 더 크냐?”하는 것으로 제자들 속에 내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맨 마지막이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82)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지배’라면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은 ‘섬김’이다.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리고 , 그 다스림이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하나님 나라의 근본이다. (82-83)
-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그가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는데, 천사들이 그를 섬겼다”(1:13)라고 한 것도, 이런 시몬 장모와 같은 여인들의 섬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다. 마가에게는 그런 여인들이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실 때, 멀리서나마 그를 지켜본 여인들을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에 그를 따르며 섬기던 여인들이었다”(15:41)라고 하는 것만 보더라도, 마가에게서 ‘따름과 섬김’은 뗄레야 델 수 없는 윤리적 연관성을 갖고 있다. (83)
-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조차 갖지 못한 미덕이 그들 여인들의 ‘섬김’ 속에 있었다는 것을, 마가가 매우 귀하게 여겼다는 말이다. 이러한 섬김이 공동체(집)을 이루는 것이지, 서로 더 높아지려는 지배욕은 공동체이 내분을 가져올 뿐이라는 비판의 뜻도 내포되어 있었다. (83)
총괄
-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를 따르는 일단의 추종자들이 회당이라고 하는 기존의 공동체를 이탈하여, 집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본다. 그리고 이러한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시몬의 장모와 같은 여인들의 삶의 변화와 그에 따르는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마가의 메시지를 듣는다... 회당에 대립되는 새로운 공동체가 여기 ‘시몬의 집’에서 생겨났다면, 이 공동체는 ‘시몬의 장모’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고, 그녀의 섬김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말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도 ‘그녀에 관해서’ 할 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한 여인이 일으켜 세워짐으로써 교회도 세워졌다는 것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마가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설교의 주제이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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