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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7대 국왕] 위덕왕(威德王, 554~598)

[*수호천사*] 2022. 4. 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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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27대 국왕] 위덕왕(威德王, 554~598)

 

  • 재위 : 554년 ~ 598년 12월
  • 출생일 : 525년
  • 사망일 : 598년 12월

 

위덕왕(威德王)의 성은 부여(扶餘), 휘는 창()으로, 성왕의 맏아들이다.


[553년]

 

아버지 성왕을 도와 국정에 참여했고, 수도 사비성에 머무는 성왕을 대신해 한강 유역 탈환의 임무를 부여받은 북벌군을 진두 지휘했다. 그가 역사서에 첫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553년의 백합야 전투다. 태자였던 부여창은 왜와 가야까지 이끌고 고구려 장수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를 거뒀고, 이에 사기가 오른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이 고구려군을 밀어붙여 격파했다.

 

[554년]

 

554년에 성왕이 전사하자 30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국정에 참여하였고, 신라가 강성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했을 때는 정벌론을 펼쳤다. 이에 성왕이 대신라 공격을 결심하자, 554년 자신이 선봉을 서서 관산성 공략에 나섰다. 많은 신하가 반대하였으나, 창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고집스럽게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은 성과가 없는 태자를 위로하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다 신라의 장군 김무력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는데, 창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 반성하며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또 강력하게 만류하자 창은 뜻을 포기하였다. 그는 성왕의 삼년상을 치르고 557년 왕위를 승계했는데, 승계를 미룬 이유는 부왕이 죽은 것에 대한 참회의 의미로 보인다.

 

성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최후를 맞았으니 태자 창이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했으나 창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에 왕위를 포기하며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만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승계하였다. 태자가 나이 든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 대패를 당했으니 이번에는 제발 나이든 신하들의 말을 들으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켰다.

 

성왕이 전사하여 나라가 약해진 가운데 그는 국정을 맡자마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야 했다. 고구려는 554년 음력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이는 성왕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고구려는 신라가 길을 열어주자, 단숨에 웅진성까지 달려와 남부여를 위협하였다. 남부여의 옛 도읍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웅진성은 사비성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위덕왕은 총력전을 펼쳐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막아내었지만, 고구려의 재침공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561년]

 

위덕왕은 가야에 밀사를 파견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가야 땅을 다시 빼앗을 방법을 모색하였고, 결국 561년 음력 7월에 신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남부여군은 신라의 반격에 밀려 1천명의 사망자를 내고 크게 패배하였다. 남부여를 물리친 신라는 승기를 타고 가야를 공격했다. 이사부가 이끈 신라 정예군은 화랑 사다함을 앞세워 단기간에 가야 전역을 휩쓸어버렸고, 신라는 가야 연맹 전체를 정복하였다.

 

신라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위덕왕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몰락시킬 당시, 수나라의 전함 한 대가 탐라에 표류해왔는데, 위덕왕은 그들의 배를 수리해주고, 조공을 가득 채워서 함께 돌려보냈다. 양견은 이 일로 위덕왕을 가벼이 여기고, 굳이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577년]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에 의하면, 아좌태자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한 왕자를 잃은 것이다. 위덕왕은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를 세웠다.

 

왜에 경론과, 대대적인 학자와 율사ㆍ선사ㆍ비구니ㆍ주금사 등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

 

[583년]

 

583년에는 일왕 비다쓰 덴노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가 건너갔다.

 

[584년]

 

남부여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588년]

 

남부여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ㆍ양귀문(陽貴文)ㆍ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왜에 파견하였다.

 

정황을 살피며 수나라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위덕왕은 598년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전쟁을 벌이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가 없고 오만한 나라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만약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양견은 아직 고구려를 재침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위덕왕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한편, 백제가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선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74세의 나이로 승하했고, 그 묘는 능산리 고분군에 있다고 추정된다 그의 승하 후 아들인 아좌태자(597년 일본으로 건너감, 쇼토쿠 태자의 스승)가 왕위를 승계하지 않고 동생인 혜왕이 71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죽음에 대한 의혹]

 

이상한 점은 장성한 나이의 아좌태자가 일본에 머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위덕왕의 뒤를 잇지 않아 동생인 혜왕이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 태자가 버젓이 있음에도 늙은 동생이 보위를 이은 것으로 보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위덕왕이 귀족 세력 혹은 혜왕에게 시해당한 것이 아니냐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사망 기사도 묘한 여운을 주는데, 보통 삼국사기에서 왕이 죽으면 그냥 왕이 죽었다. 시호를 뭐라 하고, 어디다가 장사지냈다는 기록으로 끝맺는 게 대부분이지만, 위덕왕은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끝에(群臣議) 시호를 위덕이라고 정했다고 적혀 있다.” 물론 왕이 죽은 후 시호를 논의하는 것은 당연히 후임 왕이나 신하들이지만, 굳이 이런 표현이 붙어 있는 삼국시대 왕은 위덕왕이 유일하다. 뭔가 시호를 두고 백제 조정에서 큰 갑론을박이 있었거나, 위덕왕 말년의 불안정했던 백제 정국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가족관계]

 

  • 부친 : 성왕
  • 형제 : 혜왕
  • 자녀 : 아좌태자, 조졸(577년에 죽은 아들), 임성태자(성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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