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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 “역사적 사실과 해석의 진실” - 장공 김재준에 대한 친일 논의를 반박함 - 연규홍

[*수호천사*] 2021. 6. 1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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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 “역사적 사실과 해석의 진실” - 장공 김재준에 대한 친일 논의를 반박함 - 연규홍

장공 김재준의 신학세계(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51-68.

 

1. 머리말

 

  • “진실은 순수한 적이 드물고 단순한 적도 없다”(The Truth is rarely pure, never simple. - Oscar Wilde) (51)
  • 분명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는 일... 그러나 그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은 사실에 근거하지만 사실이 곧 진실의 전부일 수는 없다. 진실은 시공간의 사실의 토대 위에 서지만, 진실은 시공간을 넘는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 그 사실이 갖는 공간적 상황성과 전후의 시간성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해석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의 관련성을 제거하고 사실이 즉 진실이라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배제한 역사실증주의적인 이해이다. (51)
  • 김재준 목사에 대한 평가도 이와 같은 실증주의 역사 이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신사참배를 했기에 그는 당연히 친일파요, 반민족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할 수 있는가? (52)
  • 김승태 목사... 김재준 목사가 신사참배를 하였기에 “친일 행적이 뚜렷하다”고 지적하고 “어떠한 변명으로도 이것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최덕성 교수는 신사참배로 일제에 순응한 김재준 목사가 이끈 조선신학교는 태생적으로 “황국을 위한 학교였고, 신도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친일 교육기관이었다고 주장한다. (52)

 

2. 김재준의 신사참배와 친일 논의에 대한 주장

 

  • 김승태 목사는 장공 김재준의 신사참배는 조선신학원 설립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조선신학원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면서 부득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주기철 목사 등의 저항은 역사 참여라는 기독교 윤리의식에서라기보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종교적 계율 준수”라고 폄하한 것을 비판한다. (52-53)
  • 김승태 목사의 비판... 1) 장공 김재준은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했지만 신학교육을 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내심으로 거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였다는 것... 2) 해방 이후 입장을 바궈 신사참배자들을 역사참여 의식이 없는 종교적인 우상숭배 금지의 계율적 입장이라고 비판하며 자기 정당화를 하였다는 것... 3) 결국 장공의 말은 어떤 이유로든 변명되지 않는 1930년대의 상황을 무시한 궤변이라는 것이다. (53)
  • 최덕성 교수는 김재준 목사의 신사참배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조선신학교 설립과 운영의 친일적 성격과 장공의 교회론에 대한 자유주의적 신학적 요소를 비판하고 있다... (53)
  •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9회 총회록(1940년)... 조선신학교 설립에 관한 보고... 1) 목적 : 본 학원은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고 충량유위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2) 수업연한 : 당분간 3개년... 3) 주요 교과목 : 국민도덕, 국어, 국사, 구신약개론, 구신약신학, 교회사, 교리사, 종교철학, 조직신학, 설교학, 목회학, 종교교육, 영어, 희랍어, 히브리어 등... (53-54)
  • 최덕성 교수는 설립 보고서를 근거로 조선신학교는 그 출발부터 일제의 황민화의 도장으로 “황국을 위한 신도주의의 교회사(敎悔師)를 양성”하는 반민족적 친일 교육기관이었다는 것이다. “펄럭이는 일장기와 번쩍이는 일본도(刀)의 권위로 개교한 학교는 일본 민족주의의 시녀”로 “재정 지원을 다소간” 받아 황민화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 대표적인 것이 경성노회와 더불어 “국민 총력 강습회”를 개최하여 교역자와 신도들에게 제국의 세계적 지위와 내선일체 신일본의 건설을 인식시키고 황국신민 학교로서 충성을 다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1944년 졸업생의 증언을 들어 조선신학교가 황국의 충량유위한 신학생이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자에게 졸업장을 주지 않고 졸업을 보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 근거로 최덕성 교수는 일본인 교수를 채용하여 국어(일본어), 국사(일본사), 국민도덕(일본 도덕) 등의 교과목을 가르치고 제2대 이사장으로 마쯔모도 다따오(松本卓夫)를 비롯 무라야마 키요히꼬(村山淸彦)를 선임하였다는 점을 열거하고 있다. (54)
  • 김승태... 강사로 출강한 일본 기독교단 정동교회의 목사인 키요히꼬 같은 인물은 일본적 기독교와 종교보국을 선전하였던 인물이었다는 것과, 조선신학교의 임원이나 교수, 강사 가운데 적잖은 부일혐의가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에 오염되지 않은 신학 교육을 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54-55)
  • 세속 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신사참배를 하였다는 것은 철저히 신앙의 본질을 포기하는 배교 행위이며 민족 배신, 즉 친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일제 종교정책에 호응하여 개교한 조선신학교는 일본 신도주의에 교회사 양성을 통해 내선일체의 신일본 건설을 위한 친일적 교육기관이었다는 것이다. (55)
  • 1) 김재준의 신사참배는 세속 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우상숭배요, 신앙을 포기하는 배교 행위라는 것... 신사참배는 종교적인 우상숭배인가? 그리고 신사참배를 하는 것은 신앙을 포기하고 일본 신도주의로 개종하는 배교 행위인가? 2) 김재준이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여 조선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한 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변명될 수 없는 반민족적 친일 행위인가? 그렇다면 반민족적 친일 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한 신사참배자들은 모두 반민족적 친일 행위자인가? 3) 김재준의 조선신학교는 1940년 3월, 경기도지사의 학원인가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기까지 일본인 교수로부터 교육을 받고 일본어, 일본사, 일본 도덕 등을 배웠기에 민족 주체적인 신학교육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 주체적인 신학교육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일제 하에서 일본 교육자로부터그리고 일본에 관한 교과목을 교육받은 것은 다 주체성이 없는 친일적 교육이냐는 것이다. (55-56)

 

3. 김재준의 우상숭배와 배교 행위에 대하여

 

1) 질문에 대한 논박

 

  • 신사참배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식민지 통치전략이었다... 신사참배는 종교적 성격 이전에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신사참배가 한국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쓴 식민정책인가 하는 것이다... (56)
  • (1) 신사참배를 우상숭배요, 신사참배하는 것을 배교 행위라 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교리적 근본주의의 해석이요 반응이었다... 신사참배에 대한 신학적 논의나 교회공동체적 대응이 없었다는 것... 1930년대의 맥락에서 신사참배의 기원과 성격은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논의해야 한다. (56-57)
  • (2)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사참배를 수용하며 교회공동체를 유지해 간 예도 있다... (57)
  • (3) 신사참배의 문제는 식민정책이라는 성격 차원의 정치적인 사안이다... 한국 교회는 정치적 현안 문제들을 신앙고백적 차원으로 모두 수렴하여 종교적 의제로 만드는 것은 한국 교회의 정치적 대응에 미숙함을 뜻하는 것이다. (57)

 

2) 김재준에 대한 변호

 

  • 김재준의 신사참배에 대한 제3의 길... 교회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의 종교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함께 고려한 것... 개인의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도 훌륭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 비록 신사참배를 할지라도 교회의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한 순응의 노선을 성숙한 차원에서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 점에서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는 차원보다는 기독교적인 역사의식과 참여윤리라고 하는 차원에서 분리해 보는 것이다. 신사참배는 식민지 민중을 억압하고 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억압의례와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여도 그것이 기독교에 대항하거나 기독교를 대체할 종교로서의 내용과 구성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7-58)
  • 신사참배를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을 간구하는 것은 그의 이중성이기보다 그의 역사의식을 단면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58)
  • 최성일 교수는 장공의 신사참배를 단순히 박해를 피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한국 교회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평가... (59)
  • 우리의 바람과 요구를 단지 후대에 태어난 특권으로 그에게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역사적 평가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한계적 상황에서 신앙에 근거한 신학교육의 장을 새롭게 열고자 한 것이다. (59)

 

4. 김재준의 신사참배와 반민족적 친일에 대하여

 

1) 질문에 대한 논박

 

  • 3ㆍ1운동 이후 한국 민족운동... 1) 국외에서의 항일 무장투쟁... 2) 국내에서의 민족 계몽운동 (59)
  • 신사참배가 한국 교회에 강요되는 1930년대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친일과 항일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보다는 친일과 반일의 중간 지대에서 민족의 계몽과 생활 개선 등을 통한 독립 역량과 육성과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커다란 민족운동의 노선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타협적 기독교 민족운동은 적극적 친일파로 하여금 친일 노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59-60)
  • (1) 신사참배란 정치적 행위를 종교적 행위로 집약하고 수렴한 종교유일주의와 달리 이것은 신사참배란 종교 행위를 곧 반민족적인 친일 행위로 연결시키는 확대된 일종의 종교적 보편주의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은 반드시 민족적인 것인가? 중세기 종교국가와는 다른 세속국가에서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 다름을 전제하지 않고 종교의 사항을 정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60)
  • (2)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친일과 반일이라는 이원론적 구도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선악의 이원론주의 못지않은 이원론적 역사인식이다... 1930년대 일본의 문화 통치 상황 하에서 친일과 반일 사이에 모순과 이중성을 내포한 타협적 민족운동 노선의 중간 지대가 있다는 측면을 간과하는 것은 역사를 단순한 도식주의를 보는 오류이다. (60)
  • (3) 신사참배 문제를 직접적인 민족적 문제로 연결시키는 것은 종교적 행위에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신사참배를 하였다는 것이 결코 민족적인 행위가 될 수 없듯이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그것만으로 곧 반민족적인 친일 행위가 아니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종교적 저항운동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곧 민족적인 항일운동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60)

 

2) 김재준에 대한 변호

 

  • 1920년대 말 미국의 경제공황은 장공의 박사과정 진학을 가로막았지만 그것이 그가 고국으로 돌아와야 할 절대적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송창근, 한경직과 더불어 식민지적 조국의 미래를 위한 교육적 사명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미국 유학생으로 한국 교계에 뚜렷한 지지인맥도 없고 오히려 선교사들의 경계를 받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교육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의 참여이었다. (61)
  • 1940년 조선신학교 개교에 장공의 참여는 결코 우연한 것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한 줄기인 민족 계몽운동을 통한 독립 준비론의 한 형태로서 장공이 견지해 온 민족 주체적 신학교육을 실험해 보고자 한 것이다... 3ㆍ1운동 이후, 1930년대의 민족운동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일제의 식민통치의 구조를 승인하며 그 내재적인 독립 역량을 배양하는 타협적 민족노선을 견지하였다... 신사참배라는 외부적 규제에 순응하면서도 내부족 민족운동을 해야만 하였던 그 이중적 복합구조를 단순히 1910년대의 민족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장공의 조선신학교 운영을 위한 신사참배 문제를 그의 생애의 단면만을 절단하여 반민족 행위로 예단하고 일제의 회유책에 놀아난 친일 행위로 평가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신사참배를 한 이들이 모두 반민족 친일분자일 수는 없다. 1930년대에 국내 민족운동이 타협적인 노선을 전제할 때 신사참배를 함에도 불구하고 교육과 저술활동을 통해 민족계몽과 독립 역량을 고위한 이들의 민족운동도 한국 민족운동사에서 이정한도 이넝해야 하는 것이다. 장공은 이와 같은 면에서 신사참배를 하였어도 그는 결코 반민족 친일 행위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62)

 

5. 조선신학교와 황민화 교육에 대하여

 

1) 질문에 대한 논박

 

  • 김재준의 조선신학교는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 하에서 신사참배와 근로노역을 하는 조건으로 개교를 허락받아 운영되었다... 조선신학교 설립 배후에는 한 면으로 서북 교권 세력을 견제하며 한국 장로교회의 개혁과 민족 교육을 하고자 한 진보적 교계지도자들의 힘겨운 노력이 있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1932년에 초교파적인 적극신앙단을 통한 교회개혁운동이었고, 또 하나가 진보적인 신학교 설립운동으로서 조선신학교의 개교였다. (63)
  • (1) 평양신학교의 폐교가 조선신학교 설립 진행에 다소 가속화 작용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변적인 요인일 뿐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개혁을 위한 주체적인 신학교육은 일찍이 1920년대 초반부터 준비되었다는 사실이다. (63-64)
  • (2) 조선신학교가 그 설립 목적에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역자 양성”이라 명시한 문구는 1930년대 신설학교 설립에 명기되는 공식 문구이다... “다소의 재정 지원”이란 말은 설립 보고에서 확인되듯이 전혀 근거없는 날조이다... 조선신학교의 교과목만을 가지고 교육 결과를 재단하는 것은 교육 주체를 빼버리고 교육과정을 무시한 환원주의적 평가이다. 오히려 교과목에 일제가 금지한 구약개론, 구약시학, 히브리어 등을 넣은 것은 일제의 교육지침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64)
  • (3) 일본인 목회자를 교수와 이사장으로 세웠다는 것이 결코 민족 주체적인 교육 내용을 좌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일제 하 미국 선교사에게 배운 한국 교회는 모두가 친미적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는가?... 반일적이라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것에 대한 반일이지, 일본 그 자체에 대한 반일은 아니다... 국적만을 가지고 보편적인 기독교 정신에의 연대와 협력을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재는 것은 또 하나의 국수주의적인 시각이다. (64)

 

2) 김재준에 대한 변호

 

  • 1935년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사건’... 장공으로 하여금 한국 교회의 현실을 깊이 자각하게 하며 또한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신학교육의 갱신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현실의 벽...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신학교육을 할 수 있는 가능한 차원에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였다... 조선신학교가 일본 식민지 하의 민족 모순을 전제하면서도 먼저 교회 내의 보수적 교권 세력과의 갈등과 모순관계를 풀어가려는 것... 조선 혁신교단이 만들어져 한국 교회의 주체성이 소멸될 때도 장공은 홀로 조선신학교를 지키며 성서의 유대주의를 배격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하에서 그는 구약 전공자답게 구약성서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65)
  • 김재준 목사는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가 정치를 잘 안다면 보수적 교권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일본 정부 당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신학교육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이 식민지 하에 고통당하는 현실에서 친일분자로 호의호식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목숨을 버려 순교자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도피의 길이 아닌 참여의 길을 택하고 한 시대의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육에 나선 것이다. (66)

 

6. 맺음말

 

  • 과거 청산은 과거 규명에서 끝날 수 없다. 그것은 과거를 통한 오늘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에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 역사 사실을 넘어 해석의 진실을 찾는 차원이 있는 것이다 단지 오늘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으로 김재준의 신사참배를 친일 행위라고 비판할 수는 없다. (67)
  • 신사참배나 친일 행위를 한 개인의 악이 아니라 한 시대의 불행으로 보고 비판보다는 연민의 시각으로 과오를 지적하고 그 책임을 추궁함과 더불어 그 과오에 대해 함께 아파해야 한다... 성찰과 관용을 통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미래 지향적으로 해결해 가야 한다. (67)
  • 미국의 역사가 라카프라(D. LaCapra)는 말한다. 신사참배를 비롯한 고문, 학살 등의 충격적 경험은 일종의 정신적 외상(trauma)을 남긴다. 과거 규명과 성찰 작업은 이 외상의 치유과정으로서 중요한 것은 이 불행한 역사의 경험에서 피해 및 가해의 당사자가 되는 심리적 전이(transference)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의 사실 규명은 과거의 충격적 경험의 재현으로 끝날 수 없다. 그것을 해소하려면 심리적 전이와 재현의 과정을 전제로 하지만 그보다 역사의 사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즉 진실과 권위의 원천으로서 역사의 사실(경험)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고 여러 경험과 비교를 통해 그에 대한 객관적 입장을 취할 수 있으며 다양한 해석적 시도를 하여 진실을 추구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67-68)
  • 김재준... 그를 역사 속의 한 인간으로 존경하는 것은 거물과 단점을 가진 우리와 같은 인간이면서도 모순에 찬 이 땅 위에서 시대적 소명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고난과 자기 희생의 길, 즉 제3의 길로서 “좁은 문”(마 7:13)을 통한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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