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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AD. 603~661] 신라의 제29대 국왕(AD. 654~661)

[*수호천사*] 2025. 6. 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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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AD. 603~661] 신라의 제29대 국왕(AD. 654~661)

 

【개인 정보】

  • 이름 : 김춘추(金春秋)
  • 출생 : 기원후 603년
  • 사망 : 기원후 661년 6월
  • 재위 : 기원후 654년 3월 ~ 기원후 661년 6월
  • 전임 : 진덕여왕
  • 후임 : 문무왕

 

【가계 정보】

 

[태종무열왕의 조상]

  • 조부 : 진지왕(신라 25대 임금)
  • 조모 : 지도부인 박씨(知道夫人 朴氏)
  • 아버지 : 김용춘 – 진지왕과 지도부인 아들로, 김용수라고도 한다. 무열왕 즉위 후 문흥왕으로 추존되었다
  • 외조부 : 진평왕 – 신라 제26대 왕
  • 외조모 : 마야부인
  • 어머니 : 천명공주(天明公主) – 무열왕 즉위 후 문정태후로 추존되었다.
  • 이모 : 선덕여왕(신라 27대 임금. 덕만공주)

[태종무열왕의 부인과 후손]

부인과 후손 :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기록된 태종 무열왕의 가계도로 문명왕후 소생이 아닌 자녀가 있다고 전한다.

  • 왕후 : 문명왕후(文明王后) – 김유신의 여동생
  • 아들 : 문무왕 – 신라 제30대 왕
    며느리 : 자의왕후 김씨 – 파진찬 김선품의 장녀
  • 손자 : 신문왕 – 신라 제31대 왕
    아들 : 김인문(金仁問)
    아들 : 김문왕(金文王) – 강릉 김씨의 선조
    아들 : 김노차(金老且)
    아들 : 김인태(金仁泰)
    아들 : 김지경(金智鏡)
    아들 : 김개원(愷元)
  • 딸 : 고타소공주 (古陀炤公主, ?~642년)
    사위 : 김품석(金品釋)
  • 딸 : 지소부인 (智炤夫人)
    사위 : 김유신(金庾信) – 신라 태대각간
  • 딸 : 원성왕의 증조모

  • 후궁 : 영창부인 보희(寶姬)
  • 딸 : 요석공주(瑤石公主)
    사위 : 김흠운(金歆運, ?~655년) – 소판(蘇判) 김달복(金達福)의 아들. 백제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외손녀 : 신목왕후(神穆王后) – 신문왕의 왕비
  • 사위 : 원효(元曉, 617년 ~ 686년) – 신라의 고승, 설담날의 아들이며 설원랑의 증손이다.
    외손 : 설총(薛聰, ?~?) – 신라의 문장가.
  • 아들 : 김개지문(金皆知文)
  • 아들 : 김거득(金車得)
  • 아들 : 김마득(金馬得)

【태종무열왕 연보】

 

【서기 654년】 왕위에 오르다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다.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인 이찬 용춘(龍春)[혹은 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 서현(舒玄)의 딸이다. 임금은 용모가 영준하고 늠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을 품고 있었다. 진덕(眞德)을 섬겨 지위는 이찬을 역임하였고, 당나라 황제가 특진(特進)을 제수하였다.
  • 진덕이 돌아가시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고 묵직하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만한 뛰어난 인물이라 할 만합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
  • 원년(서기 654) 여름 4월, 왕의 죽은 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追封)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삼았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 5월,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자세히 살펴 이방부의 율령 60여 조를 가다듬어 정하게 하였다.
  •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부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임금을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으로 봉하였다.
  •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감사를 표하였다.

【서기 655년

  • 2년(서기 655) 봄 정월,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삼고, 파진찬 문충(文忠)을 중시로 삼았다.
  •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더불어 병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에 침략하여 33성을 빼앗았기에,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 3월, 당나라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병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여러 아들 중에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를 해찬으로, 인태(仁泰)를 각찬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
  • 겨울 10월, 우수주(牛首州)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 굴불군(屈弗郡)에서 흰 돼지를 바쳤다.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고 다리가 여덟이었다.
  • 왕의 딸 지조(智照)를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보냈다.
  • 월성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서기 656년】

  • 3년(서기 656)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왔다. 군주(軍主)로 임명하여 장산성(獐山城) 쌓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서기 657년】

  • 4년(서기 657) 가을 7월, 일선군(一善郡)에 홍수가 나서, 빠져 죽은 사람이 3백여 명이었다.
  • 동쪽 토함산(吐含山)의 땅이 불타더니 3년 만에 꺼졌다.
  • 흥륜사(興輪寺)의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원문에 3자 빠져있음]의 북쪽 바위가 무너지면서 부서져 쌀이 되었는데, 그것을 먹어보니 곳간의 묵은 쌀과 같았다.

【서기 658년】

  • 5년(서기 658) 봄 정월, 중시 문충의 벼슬을 바꾸어 이찬으로 삼고, 문왕을 중시로 삼았다.
  • 3월, 임금은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과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한다고 여겨 경(京)을 폐지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悉直)을 북진(北鎭)으로 삼았다.

【서기 659년】

  • 6년(서기 659) 여름 4월,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므로 임금이 장차 그들을 치려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요청하였다.
  • 가을 8월, 아찬 진주(眞珠)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았다.
  • 9월,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쳤다.
  • 공주(公州) 기군(基郡)의 강에서 커다란 물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1백 자나 되었으며 그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 겨울 10월, 임금이 당나라에 병사를 요청하였으나 보고가 오지 않기에 근심하는 모습으로 조정에 앉아있었는데, 홀연히 어떤 사람이 임금 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이 마치 이미 죽은 신하인 장춘(長春)과 파랑(罷郞) 같았다. 그들이 말하였다.
    “저희는 비록 죽어 백골이 되었으나 여전히 나라에 보은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제 당나라에 가서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정벌하도록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너무나도 심히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말을 끝내고는 사라져버렸다. 임금이 매우 놀랍고도 신기하게 여기어 두 집안의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담당관에게 명하여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다.

【서기 660년】

  • 7년(서기 660) 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죽었으므로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 3월,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또 칙명으로 임금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 여름 5월 26일, 임금이 유신, 진주, 천존(天存) 등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머물렀다. 소정방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천리에 이어질 정도로 많은 병선을 이끌고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 21일, 임금이 태자 법민을 시켜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왕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드시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도록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소정방 군대의 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이라고도 한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응원하도록 하고, 임금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 가을 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黃山) 들판으로 진군하였다. 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병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의 힘이 다하였을 무렵,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에게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에게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 목숨을 바친다면 충과 효 두 가지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반굴이 말하였다.
    “삼가 분부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적진에 뛰어들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혹은 관창(官昌)이라고도 한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내 아들의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관장이 “예!”라 대답하고,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서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적진에 달려들어 갔다. 관장은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겨보고는, 나이가 어린데도 용감한 것을 아끼어 차마 해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까지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관장을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본진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고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맹렬히 싸웠다. 계백이 다시 붙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임금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런 일이로다!”
    삼군이 이를 보고 분기가 복받쳐올라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여, 백제의 무리를 크게 쳐부수었다. 계백은 그곳에서 죽었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이날 정방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병사들과 마주쳐 싸워 크게 쳐부수었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날보다 늦었다는 이유로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혹은 영(永)이라고 한다.]을 군문에서 목 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 가지고 죄를 삼으려 하는구나. 나는 죄없이 치욕을 당할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당나라 병사와 결전을 치른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곧 커다란 도끼를 집어 들고 군문에 서자 그의 성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발을 구르며 말하였다.
    “신라 병사들의 마음이 변하려고 합니다.”
    정방이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물릴 것을 애걸하였다.
  • 12일, 당나라와 신라군이[원문에 3글자 빠져있음] 의자왕의 도성을 포위하려고 소부리(所夫里, 충남 부여) 들판으로 나아갈 즈음에, 정방이 마음에 꺼리는 바가 있어 진군하지 않고 있었다. 유신이 그를 달래어, 두 나라 병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일제히 진군하게 되었다.
  • 백제의 왕자가 다시 상좌평을 시켜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정방이 거절하였다. 백제왕의 서자인 궁(躬)이 여섯 사람의 좌평들과 함께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정방은 그것도 물리쳤다.
  • 13일, 의자왕이 가까운 신하들만을 데리고 밤을 타서 도망하여 웅진성(熊津城, 충남 공주)에서 몸을 보전하자, 의자왕의 아들 융(隆)이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억울하게 나의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던 일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였더니, 오늘에야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熊津方)의 병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 임금이 의자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29일에 금돌성(今突城)으로부터 소부리성에 당도하여, 제감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보고하였다.
  • 8월 2일, 주연을 크게 베풀어 장수와 병졸들을 위로하였다. 임금과 정방 및 여러 장수들은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 앉도록 하고는 가끔씩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 중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모척(毛尺)을 잡아 목을 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백제로 도망쳐서 대야성(大耶城)의 검일(黔日)과 함께 모의하여 신라의 성이 함락되도록 한 일이 있었기에 목을 벤 것이다.
    또한 검일을 잡아 죄목을 따져가며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병사를 끌어들여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다. 품석 부부를 핍박하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다. 백제와 함께 우리나라를 공격하였으니 그 죄가 셋이다.”
    그리고는 그의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 백제의 남은 적병은 남잠(南岑)과 정현(貞峴)[원문에 3글자 빠져있음] 등의 성을 차지하고 버텼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무리를 모아 두시원(豆尸原) 산에 진을 치고서 당과 신라 사람을 노략질하였다.
  • 26일, 임존(任存, 충남 예산)의 큰 목책을 공격했으나, 적의 병사가 많고 지세가 험악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작은 성채만을 쳐서 깨뜨렸다.
  • 9월 3일,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이 병사 1만 명을 데리고 사비성(泗沘城, 충남 부여)에 남아 진을 쳤고,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日原), 급찬 길나(吉那)와 함께 병사 7천 명을 데리고 그를 보좌하였다. 정방은 백제의 왕 및 왕족과 신료 93명과 백성 1만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나마 중지(中知) 등이 함께 갔다.
  • 23일, 백제의 남은 적군이 사비성에 들어와, 살아남아 항복한 사람들을 붙잡아 가려고 하였으므로 유수(留守) 유인원이 당과 신라인을 내보내 그들을 쳐서 쫓아내었다. 적들은 퇴각하여 사비성의 남쪽 마루에 올라 너댓 군데에 울타리를 세우고 진을 치고서 기회를 엿보다가 성읍을 노략질하니, 백제인들 중에 배반하여 그들에게 호응한 성이 20여 곳이나 되었다.
  • 당나라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 28일, 왕문도가 삼년산성(三年山城)에 이르러 조서를 전달하였다.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을 전한 후 문도가 임금에게 당 황제의 예물을 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죽어버렸기에, 왕문도의 시종이 대신하여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마쳤다.
  • 10월 9일, 임금이 태자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이례성(尒禮城)을 공격하였다.
  • 18일, 그 성을 빼앗아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자,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하다가 모두 항복하였다.
  • 30일, 사비의 남쪽 마루에 있던 군대의 목책을 공격하여 1천5백 명의 목을 베었다.
  • 11월 1일,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침공하였다. 군주 필부(匹夫)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5일에 임금이 계탄(雞灘)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이겨 7백 명의 목을 베었다.
  • 22일, 임금이 백제에서 돌아와 전공을 논하였다. 계금졸 선복(宣服)을 급찬으로 삼고 군사 두질(豆迭)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儒史知)ㆍ미지활(未知活)ㆍ보홍이(寶弘伊)ㆍ설유(屑儒) 등 네 사람에게 관작을 공적에 따라 차등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들도 그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였는데, 좌평 충상과 상영, 달솔 자간(自簡)에게는 일길찬의 관등을 주어 총관의 직위를 맡겼고, 은솔 무수(武守)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대감의 직위를 맡게 하였으며, 은솔 인수(仁守)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감의 직위를 맡게 하였다.

【서기 661년】

  • 8년(서기 661) 봄 2월,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다. 임금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良圖), 아찬 충상(忠常) 등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欻)과 욱천(旭川)을 남천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장군(郞幢將軍)으로 삼아 사비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 3월 5일, 길을 가던 중에 품일이 휘하의 군대를 나누어 두량윤[혹은 이(伊)이라고도 한다.]성(豆良尹城) 남쪽에 먼저 가서 진영을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인이 신라군의 진영이 채 정돈되지 않았음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갑자기 나와 의외의 습격을 하니, 우리 병사들이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 12일,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와서 진을 치고, 두량윤성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그러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다가, 여름 4월 19일에 군대를 되돌렸다. 대당과 서당이 먼저 가고 하주의 군대를 뒤따르게 하였는데,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렀을 때 백제군을 만나 싸웠으나 패배하여 물러났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 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와 낭당은 각산(角山)에서 적을 만나 진격하여 이기고 마침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임금은 군대가 패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금순(金純)ㆍ진흠(眞欽)ㆍ천존ㆍ죽지(竹旨)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에 당도하여 적군이 가소천(加召川)까지 물러났다는 것을 듣고 되돌아왔다. 임금이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서 패배한 책임을 묻되, 정도에 따라 차등있게 벌을 주었다.
  • 5월 9일[또는 11일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의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군대를 합하여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하였다. 이기지 못하고 이동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투석기를 벌여놓고 바위를 날려보내니 그것에 맞은 성곽과 건물이 그대로 부서졌다. 성주인 대사 동타천(冬陁川)이 사람들을 부려 마름쇠를 성 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헐어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얽어 마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어놓고, 그 안에 노포(弩砲, 쇠뇌, 쇠로 된 발사장치가 달린 활)를 설치하여 막도록 하였다.
    당시 성 안에는 단지 남녀 2천8백 명밖에 없었는데, 성주 동타천은 어린 아이와 힘이 약한 자들까지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를 스무날 동안이나 하였다. 그러나 결국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기에,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다. 그러자 갑자기 커다란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며 요란스러워졌다. 적이 두려워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 임금이 동타천을 가상하게 여기어 관등을 대나마로 올려주었다.
  •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에 옮기고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으로 삼았다.
  • 6월, 대관사(大官寺)의 우물물이 핏물이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렀는데 그 넓이가 다섯 걸음이나 되었다.
  •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당나라 고종이 무열왕의 부고를 듣고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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