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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제1장. 2. 중세기 서방 교회의 동양 선교

[*수호천사*] 2025. 5. 20.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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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기 서방 교회의 동양 선교

 

1) 원대의 야리가온 / 34

 
  • 박해를 피해 변방에 은둔해 있던 경교신자들과 돌궐 계통의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중국에 들어와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 불리며 원 황실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34]
  • 강소성 진강(鎭江)의 지방지인 지순진강지(至順鎭江志)(1330~1332)에는, 진강 인구의 약 0.6%가 야리가온이며 진강과 인근에 야리가온 사원 7개가 있다고 나온다. 원대에는 적어도 47개 지역에 야리가온 사원이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5]
  • 당대(唐代)의 경교에 비해 원대의 야리가온은 토착화를 위한 노력이 부족하였으며, 주로 지배계층이 믿는 외래종교로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한족이 건국한 명() 1368년 원을 멸망시킨 이후 야리가온도 점차 소멸되었다. [35]
 

2) 경교의 한국 전래 / 35

 
  • 경교가 당대에 유행한 시기에 신라는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당과 밀접히 교류하였으며 수백명의 승려ㆍ학자들이 당에서 유학하였다... 중국을 통한 경교, 아랍을 통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신라에 유입되거나, 1259년 고려가 원과 강화한 이후 각 방면에서 활발히 교류하는 과정에서 야리가온이 고려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35-36]
  • 영국인 인류학자 고든(E. A. Gordon)... 기독교의 동양전래 및 기독교ㆍ불교간 교류에 대해 연구하던 그는 1910년 무렵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 사찰을 살펴보고 한국 불교와 경교의 연결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는 특히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신장(神將)ㆍ관음상(觀音像)ㆍ나한상(羅漢像)ㆍ제석천상(帝釋天像)과 통일신라 왕릉의 십이지상(十二支像)ㆍ무인상(武人像) 등에 경교적 요소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 같은 연구를 기념하기 위해 장안의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모조비를 금강산 장안사 경내에 세우기도 하였다. [36]
  • 김양선 1956년 불국사에서 발견되었다는 십자가 형태의 석제물(石製物), 전남 해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다는 동제(銅製) 십자가, 마리아상과 유사하다는 관음상 등을 증거로 그 가능성을 부각시켰다. [36-37]
 

3) 가톨릭교회의 동양 선교 / 37

 
  • 로마 가톨릭교회의 동양 선교는 13세기에 들어와서 본격화되었다. 1054년 동ㆍ서방교회의 대분열(The Great Schism) 이후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이방인선교에 대한 자각운동이 일어났다. 1095년에 시작된 십자군 운동... 동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선교적 관심도 고조시켰다. [37]
  • 1209년 창설된 프란치스코회와 1216년 창설된 도미니코회는 십자군운동을 지원하였고, 점령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37]
  • 1245년 리용에서 열린 공의회의 결정을 따라 교황의 전권대사가 몽골에 파견되었는데,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였고 프린치스코회 창설에 참여하였던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i Carpini)가 사절로 선출되있다. 1246년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도착한 그는 정종(定宗)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교황의 친서를 전달하였으며, 정종의 우호적인 답서를 받고 1247년 귀환하였다. 그 후 그는 몽골의 역사(History of the Mongols)를 저술하였으며, 몽골에 퍼져 있던 야리가온의 존재를 알리면서 가톨릭 선교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37-38]
  • 1253년에는 프랑스 루이 9세의 사절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루브루크(William de Ruburch)와 크레모나(Bartolomeo da Cremona)가 카라코룸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징기스칸의 증손 사르탁(Sartach)이 소문과 달리 기독교인이 아님을 알고 실망하였으며,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헌종(憲宗)의 친서를 받아 이듬해 귀환하였다. 루브루크도 이때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몽골의 야리가온 및 유럽에서 포로로 잡혀온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그는 압록강 부근까지 여행하였으며, 고려를 카울레’(Caulej)로 표기하여 한국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38]
  • 교황 니콜라이 4세의 명령으로 프란체스코회 소속 몬테 코르비노(John of Monte Corvino) 신부 1294년 원의 수도인 북경에 도착, 성종(成宗)의 지원을 받으며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305년 현재 북경에는 2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으며, 6,00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신약과 시편을 몽골어로 번역하였으며, 야리가온 신자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도 하였다. 1307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07년 중국교구를 창설하고 코르비노를 대주교로 임명하여 중국을 비롯한 동양 선교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선교의 중심은 북경이었으나 천주(泉州)ㆍ항주(杭州)ㆍ양주(揚州) 등지에도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천주에는 독립교구가 창설되었다. [38-39]
  • 1328년 코르비노 대주교가 중국에서 사망하자 교황청에서는 후임으로 니콜라스(Nicolas)를 파송하였으나 여행 중에 사망하였고, 다시 마리뇰리(John of Marignolli) 1342년 중국에 도착하였으나 정치적 혼란 때문에 3년만에 귀환하였다. 그 후에도 토마소(Tomasso, 1362)ㆍ프라토(Prato, 1370)ㆍ카푸아(Capua, 1426) 등이 파견되었지만 임지까지 도착하지 못하였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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