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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제4장. 2. 만주에서의 성경 번역ㆍ출판과 선교

[*수호천사*] 2025. 5. 2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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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4. 기독교의 수용

2. 만주에서의 성경 번역ㆍ출판과 선교

 

1) 로스ㆍ매킨타이어와 한국인 개종자 / 101

 

만주에 진출한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선교사들도 한국선교를 시도하였다. 스코틀랜드장로교회는 1862년 중국선교를 개시하였고, 1871년부터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윌리암슨의 지도로 산동반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1872년에는 매킨타이어에 이어 로스가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당시 만주는 산동인의 농업이민에 의한 개간사업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선교사업은 황무지 상태였다. [101]

 

18728월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윌리암슨의 충고에 따라 10월 만주의 개항장 영구로 갔다. 그는 첫해 겨울을 중국어와 만주어 및 중국고전 공부에 힘쓴 결과 이듬해 5월에는 중국어로 설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101]

 

로스는 187410월 영구를 출발하여 첫 번째 고려문 여행에 나섰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의 작은 마을로, 당시 청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관문이었다. [101]

 

  • J. Ross, “Visit to the Corean Gate,” 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 1875.11ㆍ12, 471-472
  • 김정현, 『羅約翰 : 한국의 첫 선교사』(계명대학교 출판부, 1982), 127-136

 

로스는 한국상인들을 만나 전도하였으나, 그들이 영국산 면제품인 양목에만 관심을 갖는 것에 실망하였다. 그런데 여관에 머물고 있는 로스에게 50대의 한 상인(백홍준의 부친)이 찾아왔고, 로스는 그 상인에게 한문 신약성경과 훈아진언(訓兒眞言)을 건네주었다. [102]

 

의주 출신을 중심으로 한 한국상인들의 국경무역 실태와 그들의 의식상태... 청국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한 상인이 그 대표적 계층으로, 특히 의주에는 국경무역을 통해 성장한 상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개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한 학인(學人)으로 독서층이었고,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소유하였다. 바로 이들이 로스ㆍ매킨타이어를 만났고,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한국에 복음을 수용하는 통로역할을 담당하였다. [102-103]

 

로스의 두 번째 고려문 방문, 18763월 강화도조약으로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아 4월에 이루어졌다. 이 여행에서 로스는 어학교사를 얻고자 노력하여 의주상인 이응찬을 만날 수 있었다.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인 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을 상해에서 발간하였다. 이 무렵부터 로스는 한글성경 번역을 시작하였는데, 이응찬과 한국인 한두 명의 도움으로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103]

 

이응찬이 귀국한 뒤 로스는 서상륜을 만났다. 그는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홍삼 장사차 영구에 왔다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헌터(J. M. Hunter) 의사의 치료를 받은 서상륜은 매킨타이어를 만났고, 완쾌 후 로스에게 소개되었다. 누가복음을 번역하고 서상륜은 세례를 요청하였으나, 로스는 이응찬의 경우처럼 더욱 확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때가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103-104]

 

1879년은 한국기독교사에 길이 기억될 해이다. 이 해에 백홍준과 이응찬을 비롯한 4명의 한국인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이에 따라 한국개신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8791월에 있었던 한국 개신교 최초의 한국인 수세사건’... 그러나 그가 누구였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수세자 백홍준... 세 번째 수세자 이응찬(18797월경)... 이응찬과 동행해 온 의사 출신 친척(12월 경)... [104]

 

로스는 선교본부에 전도자 1명을 요청하였다.

매킨타이어는 또한 4명의 학식 있는(literary)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 비록 현재 한국이 서구의 나라들과 어떠한 접촉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지만, 그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고,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더욱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6년 전(1874)에 나는 한국 국경에서 만난 한국인들에게 그들이 중국어와 다른 그들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줄 수 없었고, 돈을 준다고 해도 내게 와서 가르쳐 줄 학자 한 명 조차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일어난 변화들을 보라. 즉 작년(1879)에 모두 학식있는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 외에도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탐구하는 11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고, 현재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한국 민족을 위해 성경과 기독교문학을 준비하는 우리의 문서사업을 위해 7~8일이 걸리는 우리 선교본부까지 기꺼이 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기독교회를 향해 열려있는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어가 있는 것이다.” [105]

 

미래를 내다보는 로스의 통찰력과 함께 의주 청년들의 주체적ㆍ능동적인 기독교 수용으로 한국기독교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106]

 

2) 성경의 번역ㆍ출판 / 106

 

로스는 머지않아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을 믿으면서 성경번역 사업을 추진하였고,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성경을 출판하였다. [106]

 

제1기(1874년 가을 ~ 1877년 여름) : 로스가 이응찬을 만난 1874년 가을부터 Corean Primer가 간행되는 1877년 여름까지의 준비기

제2기(1877년 여름 ~ 1879년 4월) : 초역기(初譯期), 1877년 여름 이응찬에 의해 요한복음 번역이 착수된 이래 18794월 로스가 영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의 시기...

제3기(1879년 5월 ~ 1881년 5월) : 로스의 휴가기간 동안 우장(牛莊)의 매킨타이어 주도로 번역이 진척ㆍ수정되는 시기

제4기(1881년 6월 ~ 1886년 가을) : 예수셩교젼서가 완성되는 시기 [106-107]

 

로스가 채택한 번역원칙... 1) 본문의 뜻과 일치하면서 한국어 어법에 맞는 절대직역... 2) 영어본보다는 개정 그리스어성경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 [107]

 

번역방법... 관리 출신의 학자가 한문성경에서 1차 번역을 하면, 로스ㆍ이응찬이 그리스어 성경을 참고하여 2차 번역을 하고, 이것을 제1번역이 정서하면 다시 로스ㆍ이응찬이 재수정(3차 번역)하고, 로스가 그리스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구사전 및 메이어(Meyer) 주석 등을 참고ㆍ대조하면서 어휘를 통일한(4차 번역) 후 식자공에게 넘기는 순서를 취하였다. [107]

 

번역의 제1공로자는 이응찬이다. 그는 로스와 메킨타이어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6년 가까이 예수셩교본의 절반 이상을 번역ㆍ수정하다가 18839월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백홍준과 서상륜은 1년 미만의 기간 동안 번역에 참가하였고, 첫 번째 및 네 번째 수세자도 1879년 세례받기 전 몇 개월간 번역업무를 맡았다. 최성균도 일정 기간 번역에 참가하였다... 의주 방언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예수셩교본번역진에 1881년 가을부터 서울 출신의 학자들이 동참하였다. 1882년 로스의 제1번역인이었던 전직관리는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 18827월 세례를 받아 서상륜에 이어 일곱 번째 수세자가 되었다. 그가 떠난 후 또 한 사람의 서울 출신 학자가 1882년 가을 봉천의 로스에게 세례를 요청하러 왔다가 1년 가까이 복음서부터 고린도후서까지 번역하였다. 한편 임오군란으로 국경에 좌천된 군인들 중 일부도 1884년 번역진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1884년 이응찬 사후에 서간도(西間島) 한인촌에서 온 학자 역시 번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108]

 

‘예수셩교본’의 한국인 번역자들은 성경을 통해 기독교를 알게 되고 그 진리를 더욱 확실히 배우기 위해, 또는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로스를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의 전도자가 되기를 희망한 열렬한 신앙의 인물들이었다. [109]

 

2명의 중국인 인쇄공과 서간도 한인촌 집안(輯安) 출신의 매약상 김청송이 식자공으로 채용되면서 심양 문광서원은 18819월부터 시험인쇄에 들어가,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기독교 문서라고 할 『예수셩교문답』『예수셩교요령』10월에 간행되었다. 요리문답서와 신약의 요약서인 이 두 권의 소책자는 각각 수천 권이 인쇄되어, 이듬해 만주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반포되었다. [109]

 

한국개신교 최초의 번역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는 한지로 된 51쪽의 소책자에 불과하였으나,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된 것보다 훨씬 오래 갈 기념비로 우뚝 서게 되었다. [109]

 

누가복음에 이어 5월에는 두 번째 복음서인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셔』 3천부가 간행되었다. 누가복음과 같이 책 뒤에 강명편(講名篇)을 마련하여 밥팀네(세례)’사밧일(안식일)’ 등의 생소한 단어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붙였으며, 본문은 대두법(擡頭法)을 사용하여 하느님앞에서 한 칸씩 띄어쓰기를 하였다. [110]

 

요한복음이 간행될 무렵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 특히 로스의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한층 고조시켰다. 로스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맺은 계약에 따라 누가복음ㆍ요한복음 각 1천부와 다량의 소책자를 일본의 톰슨(J. A. Thomson) 총무에게 보냈고, 톰슨은 이를 일본인 권서인을 통해 부산에서 반포하였다. [110]

 

188310월에는 예수셩교셩서 누가복음 뎨자행적예수셩교셩셔 요안ᄂᆡ복음이 발행되었다. 전자는 한국선교를 후원해온 아딩턴(R. Arthington) 의 지원으로 3천부가 간행되었으며, 앞서 간행된 누가복음을 수정하여 사도행전과 함께 묶은 합본성경이다. 후자는 1882년의 요한복음을 수정한 것이다. 특기할 것은 1882년 판에서 하느님으로 표기되던 신명(神名)1883년부터 하나님으로 바뀌었으며, 서울말의 채택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110]

 

1884년에는 예수셩교셩셔 맛대복음예수셩교셩서 말코복음5천부가 출간되었다. 이 해 말에는 소활자가 구입되어 인쇄비가 절감되었으며, 39쪽이었던 마가복음을 새로 27쪽으로 찍어 발행하였다. 1885년에는 예수셩교 요안ᄂᆡ복음 이비쇼서신1만부가 출간되었다. 이처럼 복음서와 서신서를 합본한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한국인들이 복음서 한 권만을 읽을 때 변덕스러운(jerky)’ 문맥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셩교셩서 맛대복음이 다시 개정판으로 1만부가 발행되었다. 이처럼 발행부수가 증가한 것은 성경 수요층의 증가가 보여준다. [110-111]

 

단편이나 합본 형태로 발행되던 에수성교본은 남은 서신서를 추가하여 1887년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로 합본ㆍ출간되었다. 339쪽의 이 전서는 5천부가 발행되었다. 이처럼 성경번역을 시작한 지 10, 성경출판을 시작한지 5년만에 한국에서는 수만권의 성경이 반포되어 한국교회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예수성교본 발행은 1891예수셩교셩서 맛대복음5천부를 마지막으로 일단락되는데, 이는 국내 선교사들에 의해 성서위원회가 조직되고 성경번역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111]

 

3) 반포사업과 교회들의 설립 / 111

 

성경의 반포는 한국인 개종자들과 ‘권서(勸書)’ 또는 ‘매서인(賣書人)’이라 불리는 이들이 담당하였다. 이들의 노력 결과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인 1880년대 초 만주와 국내에 여러 신앙공동체들이 조직될 수 있었다. [111]

 

1880년 의주에 있던 두 명의 개종자와 십여 명의 구도자의 요청에 따라 매킨타이어는 상인 편으로 성경과 소책자 한 상자를 보냈다. 그러나 국경에서 이 상자가 압수되고 편지가 발각되어 의주의 백홍준3개월간 투옥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나기는 하였으나 거의 모든 재산을 잃게 된 백홍준은 다시 영구의 매킨타이어를 찾아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하였다. [112]

 

18823월 예수성교본이 간행되면서 로스는 먼저 한인촌(Corean Valley)’을 대상으로 반포하기로 계획하고 식자공인 김청송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겸 권서로 파송하였다. 그는 고향인 집안을 중심으로 수많은 한글 복음서와 전도책자를 반포하였다. 그의 활동으로 한인촌에는 많은 개종 희망자들이 나타났고, 김청송은 이를 로스에게 보고하여 세례를 요청하였다. 1884년에는 김청송에게 받은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알게 된 한국인들 몇 명이 봉천의 로스를 찾아갔다.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평안도로 좌천된 보수파 군인들로, 정세변동에 따를 생명의 위협 때문에 한인촌으로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최연장자는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번역업무를 돕다가 집안으로 돌아와 전도하였다. [112]

 

로스는 188411월 동료 선교사 웹스터(J. Webster)와 함께 한인촌 방문에 나섰다. 두 사람은 오랜 여행 끝에 한인촌에 도착하였고, 4개 마을에서 75명의 남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같은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기독교 수용에 선교사들은 감격하였고, “수년 후에 이 기초가 자라서 계곡들의 기독교회가 되고, 그들의 고국에 복음을 전해주며, 한국의 전 북부지방에 퍼지는 기독교 진리의 누룩이 될 것을 희망하였다. [112-113]

 

로스는 1885년 여름 다시 이곳을 방문하여 25명에게 추가로 세례를 베풀었다. 집안현 이양자를 비롯한 압록강 연안 계곡의 28개 한인촌에는 1884년 말 현재 수세자 100, 남자 세례요청자 600명 등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수 천 가정들이있었다. 1885년에는 한국인들의 신앙생활을 반란음모로 오해한 중국인 지주가 일단의 무리를 동원하여 구타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로스는 방문을 연기하였는데, 이때 한국교회 최초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발생하였다. 즉 웹스터가 한국 북부지방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중국인들의 박해를 피하여 국내로 들어와 신앙생활을 하던 공동체를 발견한 것이다. [113]

 

의주에서는 1879년부터 백홍준의 전도로 구도자가 나오면서 성경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1882년 누가복음ㆍ요한복음이 간행되자 수입하는 폐지(廢紙) 속에 미제본된 복음서 낱장을 끼워 반입하기도 하였으나, 이것만으로 부족하여 188210월 서상륜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로 파송되었다. 서상륜은 3개월간 다량의 복음서를 반포하고 본래 목적지인 서울로 출발하였다. 서상륜에 이어 철산 출신의 네 번째 수세자가 1883년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이것은 불교보다 더 훌륭한 종교다. 왜 진작 알지 못하였던가라며 큰 관심을 나타냈고, 이것을 가르칠 서당을 세워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의주에서는 백홍준이 요리문답반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늦어도 1885년에는 18명의 신자 및 에배처소가 있었다. [113-114]

 

평안북도에 이어 1883년에는 평양에도 복음서가 반포되었다. 18835월 김청송에 이어 두 번째 식자공이 된 동지사 수행원 출신의 청년이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평양으로 오게 되는데, 그는 이때 가지고 온 약 1천권의 누가복음ㆍ요한복음을 위험하지는 않지만 공공연한 길거리가 아닌 집과 여관에서 판매하였다. [114]

 

1883년 초 서울에 온 서상륜은, 2식자공으로부터 받은 4백권의 복음서를 6개월간 반포하였다. 그 결과 그는 여러 명의 개종자를 얻었고, 로스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로스는 서울 방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자 대신 상해ㆍ제물포간의 기선항로를 이용하여 1884년 봄 다량의 한문성경ㆍ한글성경과 소책자를 서상륜에게 보내주었고, 그는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이것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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