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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제4장. 4. 미국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수호천사*] 2025. 5. 2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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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4. 기독교의 수용

4. 미국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1) 한미수호통상조약과 견미사절단의 파견 / 126

 

일본의 한국진출을 견제하려는 청국의 중재로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문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없으나, 미국측은 학자를 파송하여 언어와 문학과 예술을 연구할 수 있는권한이 주어졌다고는 인식하였다... 이 조약은 미국 상원의 의결을 거쳐 그 이듬해(1883) 1월 비준되었으며, 푸트(Lucius H. Foote)가 초대 주한미국공사로 임명되어 5월 한국에 부임하였다. 푸트는 고종을 알현하면서 한국의 친선사절을 미국에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구성하였다. 특명전권공사에 민영익, 대리공사에 홍영식이 임명되었으며, 고영철ㆍ변수ㆍ서광범ㆍ유길준ㆍ최경석ㆍ현흥택 등이 수행원으로 선발되었다. [127]

 

‘견미사절단’ 또는 ‘보빙사’로 불리는 일행은 18837월 제물포를 출발, 요코하마를 거쳐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워싱턴에 도착하였으며, 미국 대통령을 접견한 후 귀국길에 올랐다. 사절단 중 일부는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그해 12월에 귀국하였고, 민영익ㆍ변수ㆍ서광범 등은 유럽을 순방하고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127]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이동하던 사절단 일행은, 장차 한국선교에 큰 공적을 남기게 되는 가우처(John F. Goucher) 박사를 만났다. 뒷날 볼티모어 여자대학을 창설한 그는 해외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미감리회의 목사였다. 기차 안에서 사흘 동안 일행과 교제하면서 그는 은둔의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후 가우처는 한국선교를 염원하게 되었으며, 188311월 와일리(Wiley) 감독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촉구하면서 선교비로 2천 달러를 기부하였다. 이듬해 1월에도 그는 재일 선교사인 미감리회의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사업의 가능성을 조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처럼 견미사절단의 방미는 한국선교가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고, 가우처는 “이디오피아 내시 앞에 나타난 빌립(행 8:26~39)”처럼 ‘은둔의 나라’의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128]

 

2) 미국 개신교 선교부들의 한국선교 결정 / 128

 

미국에서는 18세기 말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해외선교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그 후 여러 교단에서 선교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남북전쟁 후에는 부흥사 무디가 부흥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880년대에 이르러 신학교 학생들 사이에 선교부흥운동의 열기가 치솟아 전국신학교동맹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초기에 내한한 선교사들 중에는 이 운동에 자극받아 해외선교에 뜻을 세운 이들이 많았다. [128-129]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시작한 19세기 말은 미국이 대아메리카를 구상하며 해외진출을 시도하던 시기였으며, 이 과정에서 세계각지에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따라서 그 배경에는 미국의 대외팽창주의 또는 백인우월주의에 바탕을 둔 기독교문화의 전파라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129]

 

선교사의 파견에 앞서 미국의 여러 개신교단은 해외선교부를 창설하였다. 그것은 제2차 대각성운동 및 1840년까지 계속된 부흥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06년 신앙동우회(Society of Brethren)에 이어 1810년 미국회중교회 해외선교본부(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가 조직되었으며, 1814년에는 침례교해외선교부(The Baptist Foreign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었고, 이어 각 교단의 해외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129]

 

18825월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그해 10월 그피스(Wm. E. Griffis)Corea, the Hermit Nation을 간행하였지만 미국 각 교단의 선교본부에서는 아직 한국선교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선교본부를 움직인 것은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한 교계 언론이었다. 여기에는 감리교 기관지 The Christian Advocate와 해외선교부 기관지 The Gospel in All Lands의 공헌이 컸다... 이 무렵 가우처의 요청에 따라 재일 감리교선교사 매클레이는 18846월말부터 2주일간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1884년 말 감리교회 소속 스크랜튼(Wm. B. Scranton) 박사와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목사 등이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30]

 

미국의 장로교회도 이수정의 호소문이 알려진 뒤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장로교 선교부 임원 엘린우드(F. F. Ellinwood)는 즉시 선교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브룩클린 교회의 평신도이며 장로교 선교본부 위원인 맥윌리엄즈(David W. McWilliams)를 움직여 18842월 한국선교를 위한 기금 5천 달러를 기부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이들이 모금에 호응하였다...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1884년 의사 헤론(John W. Heron)을 한국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어 인도선교를 목표로 신학공부를 마치고 1년간 의학공부까지 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1884년 7월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1884년 내한한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선교지를 바꾸고 최초의 정주(定住)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130-131]

 

3) 매클레이의 방한과 알렌의 입국 / 131

 

매클레이는 가우처와 해외선교본부의 요청을 받고 주일미국공사 빙햄(John A. Bingham)과 주한미국공사 푸트의 후원을 얻어 1884624일부터 78일까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김옥균을 630일 찾아가 방문목적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였다(이만열,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145). 매클레이는 73일 김옥균을 다시 만났을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김옥균은 매우 정중하게 맞아들였으며, 곧 이어서 국왕이 지난밤에 나의 편지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나의 요구와 일치되게 우리 선교부로 하여금 한국에서 병원과 학교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재가하였다고 전해주었다. 그는 ‘세부사항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그대는 곧 그 사업을 우선적으로 진행시켜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의 호소에 대한 국왕의 호의적인 반응이 매우 재빠르고 훌륭하였으므로 나는 그 허락이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김옥균에게 나를 위한 그의 훌륭한 업무수행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린 후 복잡한 거리로 나와 거닐면서 나 자신에게 허락을 얻었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허가받은 매클레이는 며칠 동안 서울에 더 머물며 선교사업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지를 물색하였다. 그는 주한미국공사관 근처의 경사진 지역을 매입할 수 있도록 푸트 공사에게 부탁하고 78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131-132]

 

알렌은 의학공부를 마치고 의료선교사를 지망하여 1883년 중국에 파송되었으나 상해ㆍ남경 등지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1년을 보냈다... 18846월 본국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한국행에 대한 승인여부를 요청하여 7월 선교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에 알렌은 914일 상해를 출발하여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22일 서울에 들어왔다... 미국 공사 푸트는 그를 공사관 공의(公醫)로 임명하고 후원을 약속하였다... 그후 알렌은 영국공사관을 비롯한 여러 외국기관의 의사로 활동하였다. 한국정부와 미국공사의 신임을 얻은 그는 선교사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그는 매클레이가 매입을 부탁하였던 곳의 집을 구입하였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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