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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제5장. 2. 연합활동과 선교정책

[*수호천사*] 2025. 5. 2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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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5. 선교의 자유와 초기 선교활동

2. 연합활동과 선교정책

 

1) 선교부간 연합활동 / 163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과 교리적 배경을 지닌 교파형 교회였다. 따라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본국교회 선교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으면서 피선교지에서 서로 협력하고 연합함으로써 공존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선교사연합공의회와 선교지역 분할협정이다. 이는 장로교와 감리교에 의해 주도되었다. [163]

 

장로교의 경우, 호주장로회의 데이비스가 한국에 온 1889년 미국 북장로회와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가 조직한 연합선교부공의회(The United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가 선교부간의 첫 협의체였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1890년 데이비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가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의 도착으로 18931월 재조직되었다.

연합공의회는 “조선땅에 개신교의 신앙고백과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연합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이후 한국에 진출한 캐나다장로회와 호주장로회도 가입하였다. 처음 이 조직체에는 치리권한이 없었으며, 선교에 관해 서로 협조하고 논의하기 위해 모인 협의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01년 한국인들이 이 공의회에 참석할 무렵부터 정치적 권한까지 갖게 되어 1907년 독노회가 설립되기까지 한국 장로교회의 치리기구 역할을 하였다. 감리교의 경우, 미ㆍ남 감리회 선교부가 장로교처럼 연합협의기구를 구성하지는 않았으며, 각기 별도로 선교회를 조직하여 운영하면서 교육ㆍ문서사업 등 사안에 따라 협력하는 정도였다. [163-164]

 

1905년 장로교의 4개 선교부, 감리교의 2개 선교부가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결성하였다. 1905911, 이화학당에서 창설된 이 연합공의회는 단순히 선교사 협의기구에 그치지 않고 하나된 개신교회를 표방하였다. 즉 헌장 제2목적에서 이 공의회의 목적은 선교사업에 있어 협력을 기하는 것이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조직하는 데 있다고 명기하였다. 단순한 선교협력을 넘어 한국에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설립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한국에서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선교사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164-165]

 

연합선교부공의회에서는 하나의 교회 설립에 대해 심도있게 토의하였고, 장로교나 감리교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대신 ‘대한예수교회’라는 통일된 명칭을 사용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이어 19061월에 열린 1차 실행위원회에서는 우선 교리적인 문제부터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캐나다에서 진행중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통합작업이 참고되었다. 1906년에는 교리통합위원회가 한국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교리들은 조화시키는 작업에 어려움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캐나다 교회가 마련한) 교리를 이 나라 그리스도 교회(Church of Christ) 교리로 삼는 것이 합당함을 만장일치로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165]

 

장ㆍ감 연합교회 설립운동에 대한 부정적 시각...

우리나라 가온대 압흐로 교회 세울 거슬 생각하면 감리(: 남감리회)와 미이미(: 미감리회)와 장로 세 교회 각각 세울 길이 잇고 또 미이미교와 감리교가 합하야 하나만 세울 수도 잇스며 또 쟝로 미이미 감리 세 교회가 합하야 하나만 세우난 길도 잇난대 어느 길노가면 됴흘난지 대한 형제 자매의게 말하라 하면 삼교회가 합하야 우리 대한 가운데 예수교회 하나만 세우ᄂᆞᆫ 거시 됴타고 아니하실 이가 업슬 듯 하옵내다. 그러나 외국형제 즁에 합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시난 이가 혹 잇스니 장차 엇더케 될난지 아즉 알 수 없도다.”

그리스도신문1906.8.16. [165-166]

 

당시 논의되던 통합방법(1) 장로교 4개 선교부가 하나의 장로교회를 설립하고 남감리회와 미감리회(미이미회)가 각각 따로 교회를 세워 3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안, (2) 남감리회와 미감리회를 하나로 합하고 장로교회를 세워 2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안, (3) 장로교와 미감리회, 남감리회를 모두 합하여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안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 한국교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요구하는 안은 (2) 장ㆍ감이 연합해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안이었으나 선교사들 가운데 일부 반대가 있어 적극 추진되지 못하였다. 결국 이 같은 간절한 소망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166]

 

1906년 결성된 연합공의회 산하 정치위원회... 1910“한국에서 하나로 조직된 교회가 취할 완벽한 정치체제를 제시하기보다는 실제적인 면에서 가능한 것부터 조화를 추구해 나감으로 우리 교회생활을 정착시키고 우리가 취하고 있는 초교파적 협력관계에 있어 야기될 수도 있는 마찰의 요인을 제거하는 데 즉각적인 효력을 얻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냈고, 이것이 연합공의회에 의해 채택됨으로써 장ㆍ감 통합운동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166]

 

비록 한국에서 통합된 하나의 교회로 ‘대한예수교회’를 창출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그 후 연합공의회는 선교사업에서 다양한 연합활동을 추진함으로써 에큐메니칼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1905The Korea Mission Field, 1906그리스도신문, 1908찬숑가등의 통합ㆍ발간... [167]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장ㆍ감 연합이 계속 추진되었다... 미감리회와 북장로회의 연합활동... 서울에서는 배재학당과 경신학교가 1905, 평양에서는 두 선교부 연합으로 190610월 숭실대학(崇實大學, The Union Christian College)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서울에서는 북장로회ㆍ캐나다장로회ㆍ미감리회ㆍ남감리회가 연합하여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The Chosen Christian College)를 설립하였다.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도 1913년 이후 본격적인 초교파 연합사업으로 운영되었으나, 이미 1908년부터 북장로회 외의 다른 교파 소속 의사들도 참여하였다. 평양에도 북장로회가 운영하던 제중병원과 미감리회에서 운영하던 기흘병원이 있었는데 1905년 이후 연합을 모색하다가 1920년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합동하였다. [167]

 

주일학교 사업도 1905년 연합공의회 창설 이후 장ㆍ감 연합으로 추진되었다... 1903년에 시작된 기독청년회(YMCA)운동도 연합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러나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만은 교파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평양에서 장로교의 4개 선교부가 참여한 장로회신학교가 1901년 개교하였고, 서울에서 감리교의 2개 선교부가 참여한 협성신학교가 1905년에 개교하여 장로교와 감리교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파 신학교로 정착하였다. [168]

 

결국 이후의 한국기독교는 교파적 교회로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이후 한동안 풍미하였던 장ㆍ감 연합운동이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 결렬된 것도 교파적 교회의 성격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였다. [168]

 

2) 선교지역 분할협정 / 168

 

여러 교파 선교회가 진출하여 선교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선교회간에 선교지역 분할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근본 목적은 가장 빈번한 마찰의 요인이 되고 있는 (사업의) 중첩을 피하고 돈과 시간과 힘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교지 분할협정은 1892년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이 협정은 인구 5천 이상의 대도시(혹은 개항장)은 공동점유하되 그 이하의 도시와 지방들은 당시 선교회의 지휘를 받는 교회가 설립되어 있는 상태를 보아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았다. 그 외에 미개척지역은 새로 오는 선교회로 하여금 개척하게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이와 함께 선교회의 지역관할권을 강화시키려 하였으니, 지역 내 교인들이 교파를 옮기는데 선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거나 교역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이 다른 선교회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 등이 그런 예들이다. [168-169]

 

장로교 선교회들의 선교지역 분할협정은 처음 장로교연합선교공의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1893년 공의회에서는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남장로회는 한번도 서남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도를 맡게 되었다. 1898년에는 북장로회와 캐나다장로회간에 협정이 이루어져 캐나다장로회는 북장로회로부터 함남의 원산을 양도받았다. 캐나다장로회는 이곳을 기점으로 하여 함경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1909년에는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져 그때까지 부산에서 활약하고 있던 북장로회가 그곳을 호주장로회에 양도하고 떠났다. 이로써 호주장로회는 부산을 근거로 하여 경상남도를 선교지역으로 삼게 되었다. [169]

 

감리교... 뒤늦게 진출한 남감리회는 서울ㆍ송도(개성)ㆍ원산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하다가 미감리회와의 협정을 통해 1901년부터 원산을 양도받았다. 송도는 남감리회가 개척한 곳이고 서울은 공동점유가 가능한 대도시여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170]

 

평안도와 황해도에 대한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사이의 협정이 1905년에 이루어짐... 1907년에는 미감리회와 남장로회 사이에 충청남도ㆍ전라도에 대한 협정이 이루어짐... 1907년 남감리회와 북장로회 및 캐나다장로회 사이에 강원도ㆍ원산에 대한 협정이 이루어짐... 1909년에 충북ㆍ강원도 지역에 대한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의 협정이 이루어짐... [170]

 

서울ㆍ평양ㆍ원산의 세 도시가 두 개 이상의 선교회가 공동점유하여 선교한 곳이며 나머지 지방은 대체로 중복을 피하여 분할하였다. 지방별로 살펴보면 서울ㆍ경기ㆍ충청ㆍ강원 등 중부지역은 미ㆍ남감리회와 남ㆍ북장로회가 중복을 피하여 분할하였고, 평안도ㆍ황해도는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함경도는 캐나다장로회, 경북지역은 북장로회, 경남은 호주장로회, 전라도는 남장로회가 각각 관할하게 되었다. [171-173]

 

분할규정이 30년 이상 적용되면서 선교회 배경에 따라 교회의 특성이 형성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즉 이미 교파적 교회로 정착된 한국기독교가 다시 교회 안에서 선교부 배경에 따라 세분되는 분파적 현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교회 배경의 분파적 요인은 1930년대에 노골화된 지방색에 의한 교권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73]

 

선교지역 분할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6개 선교회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장ㆍ감 이외의 다른 교파의 선교회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구세군ㆍ성공회ㆍ성결교회 등 다른 교파는 장ㆍ감 선교회에 비해 선교지 모색에서 불리한 입장에서 선교사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173]

 

3) 네비어스 선교정책 / 173

 

내한한 선교사들은 각기 다른 신앙적ㆍ교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선교부도 서로 달랐기 때문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루기가 어려웠다. [173]

 

선교방법론의 차이... 초기 내한선교사들이 대부분 신학교를 마친 직후에 선교지로 파송되었기에 선교경험이 많지 않았다는 점도 원인이 되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언더우드는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계속해서 서한을 띄웠다. [174]

 

18906, 중국 지푸에서 활동하던 네비어스(J. L. Nevius)가 서울을 방문하였다. 북장로회 소속인 그는 1854년에 중국에 도착하여 30년 넘게 중국선교에 종사한 노련한 선교사였다. 그는 서울에 두 주간 머물면서 선교사들과 모임을 가졌다. 이때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그의 강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가 쓴 논문과 저서를 중심으로 선교정책을 연구하면서 그것을 한국에 적용시키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였다. [174]

 

네비어스는 중국에서 선교사업을 추진함에 궁극적으로는 ‘독립하고 자립하며 진취적인 토착교회’ 설립이 목적이지만 실천방법은 둘로 나뉜다고 하였다. 종래의 방법은 초기 토착교회의 성장을 자극하기 위해 외국 선교기금에서 봉급을 받는 본토전도인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며, 자신이 제시하는 새 방법은 본토전도인들에게 드는 경제적 지출은 최대한 줄이고 처음부터 자립의 원칙을 세워 빠른 시일 안에 독립과 자립을 이루는 진취적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선교사업을 하면서 본토전도인들을 내세워 전도하고 교회를 설립케 하는 주역으로 삼는 데는 두 방법이 일치하나, 그들의 활동에 드는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에 따라 방법이 나뉘었다. 기존의 방법은 선교부에서 전적으로 맡아 지급하였으나, 네비어스가 제시한 방법은 본토전도인들 스스로가 부담하게 하는 것이다. 전자의 방법이 선교 초기에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는 있으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자립교회로의 발전에 저해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74-175]

 

네비어스의 방문 1년 후인 1891년에 모인 북장로회 선교회는 60조로 된 ‘북장로회 선교회 규칙’(Presbyterian Northern Mission Rules and By-Laws)을 제정하여 네비어스의 제안을 선교정책의 기본으로 삼았고, 1893년 1월에 모인 한국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에서도 10가지 정책을 채택하였다. 189510월 열린 북장로회 선교회는 8개 조항을 별도로 선정하여 선교정책의 신조’(Credo)로 삼았다. [175]

 

북장로회의 선교정책은 네비어스 선교방법으로도 알려지게 되는데 나중에 그 기본이념이 자진전도(自進傳道, Self-Propagation), 자력운영(自力運營, Self-Support), 자주치리(自主治理, Self-Government)3대 명제로 정리되어 한국개신교의 대표적인 선교정책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175]

 

엄밀한 의미에서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북장로회가 채택한 선교방법론이었다... 이 정책이 1890~1895년 사이에 북장로회의 선교정책으로 정착되자 그 후에 들어온 다른 장로교 선교회들도 대체적으로 이 정책을 수용하였다. 따라서 이 정책은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정책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175]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 캐나다 출신의 스코트(W. Scott) 선교사가 대표적인데, 그는 이 정책이 한국의 초기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놀라운 성장의 결과를 가져온 원인의 하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절대시하여 적지 않은 부작용도 나타났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자주치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 안에 계급조직이 생겨났는데 이 조직은 종종 교만한 임원직에 의해 좌우되었다. 교회조직과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별개의 공동체가 되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으로 흘렀다. 자급운영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교회재정은 교회조직을 운영하는 데만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사회복지 같은 것을 위해 재정을 쓰는 것은 거의 생각지도 못하였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교회의 조직과 운영에서 괄목할 만한 효과를 가져왔으나, 교회 외부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176]

 

4)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 / 176

 

선교사들이 본 한국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글을 읽고 학문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며 또 학자를 존중하는 태도였다. 선교사 존스는 한국인들이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으며, 게일은 한국인이 학문을 숭배하는사람들이라고 지적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학자로 파악하고 이를 전하고자 하였다...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선교사들이 보기에 평민들(특히 남자들)은 누구나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처럼 비쳐졌다. 대부분의 마을에 존재하고 있었던 서당은 선교사들의 그런 생각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선교사들이 남긴 자료를 보면 당시 한국인들의 빠른 이해력과 명석함을 칭찬하는 내용이 꽤 눈에 띈다. 존스는 금속활자ㆍ거북선ㆍ현수교 등을 예로 들면서 한국인들의 문화적 능력에 감탄하였다. 류대영,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169... [177-178]

 

선교사들이 언급한 것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는 거지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을 사랑하는 선교사에게 한국인은 가난하지만 품위있고 점잖은 민족이었다. [178]

 

1880~1890년대에 들어 한국종교에 대한 다수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한국에 종교가 없다거나 있어도 사라져야 할 미신 정도로 생각하였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찰이나 종교적 건축물을 도시 안에서 발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1880년대와 18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는 견해가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존스ㆍ헐버트 등 선교사들은 그런 첫 인상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세계적인 종교들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뚜렷한 종교현상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국인들에게 종교가 없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178-179]

 

존스1901년 발표한 글에서 종교체계는 모든 진화하는 사회에서 일반적이면서 필수적인 요인인데, 그러한 종교체계는 한국에서 결여되어 있지 않다면서 한국인 매우 종교적인 국민으로 유교ㆍ불교ㆍ샤머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포드(Daniel L. Gifford)는 유교적인 조상숭배, 도교적인 무당, 판수, 지관을 발견하고 한국종교에 유교ㆍ불교ㆍ도교 등 세 개의 종교가 혼합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게일 역시 일부 부주의한 관찰자들이 한국에 종교체계가 없다고 한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종교를 관통하는 현상은 귀신숭배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한국에는 민간신앙ㆍ불교ㆍ유교가 종교로서 영향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물론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는 이런 종교들과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인 가치였다. [179]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적 힘은 샤머니즘이라고 보았다. 특히 서민들의 일상생활은 대단히 미신적이어서 샤머니즘이 큰 종교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존스는 한국에 있는 정령(精靈)의 수를 8천만으로 계산하고, 사람보다 신들이 더 많다고 말하였다. 기포드는 귀신숭배가 가장 오래된 조선의 종교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생활 속에는 미신숭배 사상이 지배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유교와 불교보다 샤머니즘적 민간신앙이 기독교 전파의 큰 장애요인이었다. [179-180]

 

선교사들이 바라본 불교... 선교사들은 불교의 무속성과 국가와의 결탁, 부패, 그리고 쇠퇴 상태도 언급하면서 불교의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인 면을 더 부각시켰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민간신앙처럼 부정적인 면만 본 것은 아니었다. 게일은 한국불교에 온유함과 자비로움이 있다고 말하였다. 선교사들이 볼 때 불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종교엿다. 민중, 특히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신봉되고 있었지만 열렬한 신자는 드물어 보였다. 사찰은 심산유곡으로 밀려나 있었고,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불교적 가치관이 철학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종교적 영향력은 미미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180]

 

유교에 대한 선교사들의 평가 역시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무엇보다 한국인의 교육열과 지적인 우수성이 유교의 경전교육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유교가 강조하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윤리는 기독교 윤리를 진지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경우도 있었다. 언더우드는 기독교인들이 효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유교인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언더우드는 동아시아의 효 개념과 제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서 완성되었으며, 한국인의 천신신앙과 조상숭배는 기독교를 예비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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