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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제5장. 3. 선교 과정에서의 갈등과 수난

[*수호천사*] 2025. 5. 2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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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5. 선교의 자유와 초기 선교활동

3. 선교 과정에서의 갈등과 수난

 

1) 선교사 사이의 불화 / 182

 

북장로회 선교사 알렌ㆍ언더우드ㆍ헤론 사이에 있었던 마찰...

갑신정변을 직접 목도한 알렌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가급적 한국정부와의 충돌을 피하려 하였고, 따라서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자제하며 의료선교에 주력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정주(定住) 선교사이면서 이미 중국에서의 선교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갑신정변을 계기로 왕실의 신뢰를 받고 있었던 점 등을 들어 다른 선교사들의 대부 역할을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비해 언더우드는 교육선교를 통한 복음전도에 노력하여 알렌과 마찰을 일으켰다. 또 본국에서 외과대학 교수까지 지낸 헤론은 전문의가 아닌 알렌이 제중원의 책임자로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 이들은 서로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선교본부에 보내기에 이르렀다.

언더우드ㆍ헤론 등은 알렌의 생활이 사치스럽다고, 알렌은 그들이 일을 회피하며, 병이 만연되고 있는데도 테니스를 즐기며 휴가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헤론 부인은 알렌이 기독교적 사랑이 결여된 선교사로서 부적합한 인물”, 알렌은 언더우드가 위선자요 수다쟁이라고 비난하는 등 양측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이들 모두가 함께 한국을 떠나야 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182-183]

 

F. H. 해링톤(이광린 역), 개화기의 한미관계, 84-85 ;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125-126.

 

1887년을 전후 선교 초기 선교사 사이에 이 같은 갈등이 일어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었다. 첫째, 선교관의 차이였다. 알렌은 당시 한국의 정황에서 직접적으로 전도한다는 것은 몰지각한 행동으로 하나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던 점에 반해, 언더우드를 비롯한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입국 즉시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부르며 직접 지방 전도에 나서려는 등 적극적인 선교를 시도하려 하였다... 둘째, 한국의 양분된 정치적 역학관계였다. 알렌은 갑신정변에서 부상당한 수구파의 대표적인 민영익을 치료해 줌으로써 왕실과 수구파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비해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은 입국 전 일본에서 개화파인 김옥균ㆍ박영효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한국의 사정과 언어를 배운 인연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중재에 힘입어 내한하였다. 따라서 알렌이 민영익을 중심한 친수구파적인 입장이었던 점에 반해 언더우드 등은 친개화파적인 성격을 띠었다... 셋째, 이들 대부분이 20대의 청년층이었으며,해외선교 경험이 많지 않았다. 이들을 중재하여 갈등을 해소시킬 만한 인물이 없었다. 이는 감리교의 경우 재일 선교사 매클레이가 원로로서 선교사들을 감독하여 큰 불화가 없었던 것과 대조된다. [183]

 

오영섭, “고종과 춘생문사건,” 향토서울68(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6) ; 김영수, “춘생문사건 주도세력 연구,” 사림25(수선사학회, 2006)

 

1889년 언더우드가 압록강 건너 중국지역에서 의주의 교인 33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 문제를 놓고 언더우드와 헤론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또한 성경을 번역하거나 서적을 간행할 때 신의 호칭이나 용어를 놓고 선교사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이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천주교측과의 충돌과 수구파 및 한국인들의 기독교 박해가 더 큰 문제였다. [184]

 

2) 신ㆍ구교간의 갈등 / 184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와 개신교의 대화,” 신학사상39(한국신학연구소, 1982) ; 윤경로, “초기 한국 신구교관계의 사적 고찰,” 한국성서와 겨레문화(기독교문사, 1985) ; 신광철, 천주교와 개신교ㆍ만남과 갈등의 역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초기 개신교는 성경번역 등의 사업을 통해 천주교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천주교 신부들의 저술한 한국어 사전들이 성경번역에 이용되었고, 언더우드ㆍ아펜젤러 등은 한국 천주교인을 어학선생으로 삼아 한국어를 배워 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185]

 

천주교측의 경계

1888년 여름 삼남지방의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자, 당시 프랑스 공사 쁠랑시(Collin de Plancy)와 천주교 주교 블랑(Blanc)을 중심으로 구호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이원회에 개신교측을 대표하여 언더우드가 구호금을 내고 참여하였는데, 이에 대해 천주교측은 차제에 개신교 목사들이 그들의 선전을 위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함을 명심하여야 한다며 경계하였다. [185]

 

‘황성신문사 난입사건’, ‘종현성당 구타사건’

황성신문1899414일자 잡보난에 어느 부처가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내용의 불입천교”(佛入天敎)라는 기사가 실린 것이 발단이었다. 개화파 인사인 남궁억에 의해 발간되고 있던 황성신문에 천주교를 비방하는 듯한 기사가 나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택부 등 천주교 신자 수십 명이 같은 달 23일 신문사로 찾아가 남궁억을 종현성당(명동성당)으로 데려가 부처란 누구를 지칭한 것인가, 그 출처를 대라며 추궁하였고, 남궁억은 출처를 밝힌 후에야 풀려났다. 이 사건은 이후 천주교측을 대표하여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주교가 사과하여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185-186]

 

1894년에는 ‘진고개 사건’이라 불리는 신ㆍ구교 신자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18944월 당시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종현성당의 신축현장에 구경갔던 개신교인 5명과 천주교인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아펜젤러는 뮈텔 주교 앞으로 항의편지를 보냈다. 이에 뮈텔도 그들이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무기를 소지한 침입자들이었다고 비난하였다. [186]

 

‘해서교안(海西敎案)’... 1900년부터 1903년 사이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난 이 교안은 본래 이 지방 관아와 천주교측 사이에 생겨났으나, 그 과정에서 신ㆍ구교간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신환포교안(新換浦敎案)’도 그 중의 하나다. [186]

19025월 천주교인 김형남ㆍ홍병용 등이 천주교당을 세울 뜻으로 개신교인 한치순ㆍ최종신 등에게 사통(私通)’을 돌려 건축기금을 요구하였는데, 이에 개신교인들이 불응하자 이들을 감금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어 그해 89월에 다시 개신교인들을 천주교당에 불러들여 건축기금을 내지 않는다 하여 구타하였고, 이에 격분한 개신교측은 해주감영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해주감영은 가해자인 천주교도 6인을 체포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천주교 르각(Le Gac) 신부가 중간에 나서 호송 중인 천주교인들을 순검이 풀어주도록 하였다. 이 일은 곧 당시 황해도 개신교 선교사 헌트(W. B. Hunt)와 평양의 마펫(S. A. Moffett)을 거쳐 서울의 선교사들 및 미국공사관에도 알려졌다.

이에 헐버트는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천주교측을 비난하였고, 천주교측은 반론을 펴며 시비를 가리기 위한 양측 회담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측은 회담에 불응하고 해주감영에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사건내용을 황성신문에 게재하였다. 이에 천주교측은 황성신문사를 찾아가 이 기사내용을 취소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경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항의하였다. 천주교측은 해주의 탐관오리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호도하고 천주교 교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이 사건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환포교안에 보이는 또 하나의 신ㆍ구교 충돌사건은 우질사건(牛疾事件)’이다. 개신교인 이승혁의 소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어 옆집 천주교도인 김순명의 소도 죽었다. 이에 김순명은 천주교인들을 동원하여 이승혁에게 소값의 배상을 요구하였고, 이에 이승혁이 불응하여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실이 중앙에 보고되자 정부에서는 19031월 외부교섭국장 이응익을 해서사핵사(海西查覈使)에 임명, 사건의 전말을 밝혀 수습하도록 해주에 보냈다. 하지만 이응익은 수사를 마무리 하지 못한 채 서울로 되돌아왔고, 그해 11월 프랑스공사 쁠랑시가 중재에 나서면서 수습되었다. [186-187]

 

황해도에서 이 같은 신ㆍ구교간의 충돌이 일어난 요인

1) 이 지역을 양측이 서북지방 선교의 교두보로 설정하여 치열한 선교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2) 당시 천주교측의 위세가 개신교측을 압도한 것은 물론 지방관아의 권위보다도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3) ‘해서교안’ 이후 신ㆍ구교간의 대립은 문서논쟁을 통해 더욱 격화되었다.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의 일환으로서 상대방의 교리를 비판하는 문서와 책자를 발간ㆍ배포하고 신자교육용 교재 등으로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갈등을 유발시켰다. [188-189]

 

3) 교폐문제의 발생 / 189

 

교폐(敎弊)’는 종교가 민간인에게 끼친 폐해, 즉 민폐를 뜻하다. 한국교인 중 양대인이라 부르는 서양선교사들에 의지하여 양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건들이 종종 일어났다. 한국정부의 주권을 무시하는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태도 때문에 교회와 관청 사이에도 마찰이 빚어졌으며 교인들이 정부보다는 선교사에게 사법적 처리를 요청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또 선교사들에게 세속적 이권과 관련된 청탁을 하는 교인들도 있었다. [190]

 

1901년 충청남도에서 일어난 ‘정길당사건’

러시아 국적을 지닌 정길당(貞吉堂)이라는 여인을 중심한 무리가 양민을 구타하고 재산을 갈취한 것이다. 정길당은 원래 고씨였는데 러시아에 들어가서 그곳 국적을 취득하고 러시아정교회 교인이 되어 1890년대 초에 귀국하였다. 그 후 그녀는 남편 안병태 및 안종학ㆍ양규태 등과 작당하여 정교회 선교사라 선전하며 무리를 모으고 총으로 무장까지 한 후 양민들의 재물을 갈취하였다. 이에 1900년 남포유생 백하수 등이 법부대신에게 그들의 죄상을 폭로하며 고소하였다... 정길당의 국적이 러시아였던 관계로 러시아와 한국정부 사이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고, 정길당과 안병태ㆍ안종학ㆍ양규태 등은 체포되었다가 러시아공사관에 이첩되었다. 이들은 러시아공사관에 1개월 가량 구금되었다가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러시아라는 외세를 빙자하여 정길당을 비롯한 정교회 교인들이 민폐를 일으킨 교폐사건이었다. [190]

 

개신교인들 중에도 양대인 의식에 사로잡혀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있었다. 경기도 안산에서 신화춘이 미국 목사 원두우씨의 회당 교인이라 칭하고 각처로 다니며 협잡하다가 체포된 사건도 그 같은 사례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각종 교폐사건은 그 밑바탕에 양대인 의식이 깔려 있는 외세의존적 종교심리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서양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지위에 의지한 특권의식이 교폐를 일으켰고, 그러한 면에서 초기 기독교의 부정적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91]

 

4) 수구세력의 탄압 / 191

 

1888년 6월에 일어난 ‘영아소동’은 민중의 무지를 이용해 수구세력이 꾸며낸 사건이었다.

강인규, “영아소동사건”, 한국기독교사연구14(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6), 20-22 ; 이덕주, 초기 한국기독교사 연구, 433-435 ; 정성화ㆍ로버트 네프, 서양인의 조선살이(푸른역사, 2008), 47-53.

선교사들이 한국 유아들을 유괴하여 외국에 팔거나 실험대상으로 쓰고, 심지어 남색을 즐긴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서울의 시중에 퍼지면서 선교사배척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프랑스공사관에 근무하던 오봉엽이 아이들의 살과 피를 먹는 외국인들을 보았다고 소문을 퍼뜨리면서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외국인들이 그같은 혐의를 받았으며 신ㆍ구교 선교사들 및 그들이 운영하는 고아원ㆍ학교ㆍ병원까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미국ㆍ프랑스ㆍ러시아 등 서구 공사관들이 개입하여 한국정부에 항의하고 외국인 보호를 요청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고시문을 발표하고 순찰을 강화하여 군중의 소요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제물포에 있던 외국군대가 서울에 진주하여 무력시위를 벌인 것도 사태진정의 요인이 되었다. [191-192]

 

18945월 평양... 평양감사 민병석의 명령으로 김창식ㆍ한석진을 비롯한 한국교인들이 체포되었다가 이틀만에 석방된 사건이었다... 장로교는 18931월 마펫 ㆍ리ㆍ스왈른 등 3인이 평양 개척선교사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평양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그해 3월에 서상륜ㆍ한석진을 데리고 평양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감리교측에서 마련한 집 한 채를 빌려 머물다가 한석진의 명의로 서문 밖에 집 한 채를 구입하였다. 그러나 한석진에게 집을 판 사람이 외국인에게 집을 팔았다는 이유로 관가에 체포되었고, 결국 선교사들은 계약을 취소하고 평양을 떠나야 했다. 이때 관청에서 동원한 군중들이 몰려들어 마펫 일행에게 돌을 던지며 시위하였다.

당시 평양감사 민병석은 수구파의 인물이었다. 그는 18932월 김창식을 내세워 감리교측에서 집을 샀을 때는 이를 묵인하였다. 평양주민들이 홀을 추방하자고 하였을 때도 그 외국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신사다.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가난한 사람을 돕은 데도 좋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라 하면서 누구든지 그를 방해하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관청으로 잡혀올 것이다고 엄명까지 하였다. 그랬던 그가 마펫 일행은 철저히 배격하였으니, 이는 바펫이 의사가 아닌 목사였기 때문이었다고 짐작된다. 즉 의료사업은 시혜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종교활동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곧 당시 정부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192-193]

 

장로교의 평양개척은 거의 한석진 개인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선교사가 없는 상태에서 전도하여 그 해 5월에는 이미 20여 명의 교인을 모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것이 평양 널다리골(板洞)교회의 시작이고 후에 장대현교회로 발전하였다. [193-194]

 

평양에서 본격적으로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때부터 보수세력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겪었던 평양주민들은 반외세 성향이 강하였다.... 복합적 원인... 1) 선교사들을 배척하려는 평양주민들의 반외세 감정, 2) 교인들의 돈을 갈취하려는 지방 부패관리의 음모, 3) 기독교라는 외래종교에 대한 배척... [194]

 

18942, 음력 정월을 맞아 주민 김낙구가 마을을 돌며 우물제사를 지낼 비용을 걷다가 홀의 통역인 노병선에게 거절당함... 마을 공동제의에 참여하지 않는 선교사 집은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해 5월 홀은 부인과 갓난아기를 서울로부터 데려왔다... 김낙구의 아들인 김호영, 내방비장 신덕균 등은 선교사를 내좇고 교인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평양감사 민병석에게 이교를 수입하여 다수의 양민을 유혹하게 하며 외인으로 협잡하는 류()를 방지하여 금지하도록 요청하였고, 이에 민병석은 서양사람은 잡을 수 업슨 즉 조선교인만 잡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510일 새벽에 장로교의 송인서ㆍ신상호ㆍ우지룡ㆍ최치량ㆍ한석진 등과 감리교의 김창식ㆍ오형석ㆍ이항선 및 한석진에게 집을 판 홍재응, 김창식에게 집을 판 김씨까지도 체포되었다. 체포된 교인들은 선교사와의 관련여부에 대해 집중 심문을 받았고, 배교하면 석방하겠다는 회유도 받았다. 그러는 한편 민병석과 김낙구 등은 선교사에게 사람을 보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였다.

당시 마펫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평양의 선교사는 홀 가족밖에 없었다. 홀은 교인들을 석방하기 위해 감사를 만나려 하였으나 면담을 거절당하였다. 그는 이를 서울에 있는 스크랜턴에게 전보로 알렸고, 스크랜턴은 다시 이를 영국총영사와 미국총영사에게 알렸다. 이에 미국ㆍ영국 총영사는 평양사건에 대해 한국정부에 항의하였고, 외아문에서는 평양 감영에 교인들의 석방을 종용하는 전보를 보냈다. 결국 2차에 걸친 외아문의 전보를 받고 나서야 511일 민병석은 교인들을 석방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그리고 해결)을 통해 한국인들은, 외국공사관이 갖고 있는 ‘치외법권적’인 영향력이 선교사와 교회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4-195]

 

박해를 받으면서 교인들의 신앙이 더욱 굳어졌다. 박해가 두려워 배교하고 떠난 이들도 있었지만, 박해를 견뎌낸 교인들을 중심으로 더욱 견실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같은 사건들은 민중들이 기독교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도 되었다. 영아소동 직후 스크랜턴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가까스로 민중 시험기를 지났다. 민중은 암암리에 우리를 믿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가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해도 웃어 넘길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한 일들과 일관된 우리의 의도에 대해 동정심과 감사의 뜻을 눈물로써 표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용기가 나고 이제야 한국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일련의 박해사건들은 기독교가 겪어야 할 ‘민중시험’(probation with the people)이었다. 이 시험을 거친 후에야 민중은 기독교를 신뢰하기 시작하였다. 권력을 지닌 소수 지배계층의 종교가 아니라 박해받는 민중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맞는 셈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기독교는 서서히 민족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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