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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제6장. 2. 기독교 민족운동의 전개

[*수호천사*] 2025. 5. 3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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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6. 부흥운동과 기독교 민족운동

2. 기독교 민족운동의 전개

 

1)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 계몽운동 / 253

 

한국 기독교인의 민족의식은 기독교의 수용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일본과 서구열강의 정치ㆍ경제적 침투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기독교가 수용되었기 때문에, 지역적 편차는 있으나 그 출발부터 민족의식이 형성될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교인 개개인이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였다. 이 같은 민족의식의 형성은 기독교 민족운동을 추진하는 토대가 되었다. [253]

 

초기의 근대식 교육 기관의 상당수는 선교사들이 설립ㆍ운영한 기독교계 학교(mission school)들이었으며, 여기서 배운 이들도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253]

 

한국군 참령 출신의 기독교인 이동휘는 강화도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100여 개의 보창학교를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07년 평북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과 1908년 평남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운 안창호 역시 기독교인이었으며, 이들 학교에서는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배출하였다. 이밖에 교회에서는 부속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운동가들을 배출하엿다. 이 밖에 교회에서는 부속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는데,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교가 대표적이다. [254]

 

기독교계 학교나 교회 안에 조직된 단체도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하였다. 예컨대 배재학당 학생들이 1896년 조직한 협성회에서는 자주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하고 협성회회보를 발간하였다. 여기서 활동한 노병선ㆍ신흥우ㆍ양홍묵ㆍ오긍선ㆍ이승만ㆍ주시경 등은 모두 기독교인으로 이후 민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1897년부터 조직된 감리교 청년단체인 엡윗청년회에서도 토론회ㆍ연설회를 개최하는 등 계몽운동을 펼쳤다. [254]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 고양에는 「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 등 신문도 크게 기여하였다. 1897년 창간된 이들 신문은 교계신문이었음에도 국가를 위한 기독교인의 사명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254]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언론매체로는 일반신문인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꼽을 수 있다. 1896년 서재필에 의해 창간된 독립신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민의 권익을 대변하는 대중적 언론매체가 전무하였던 상황에서 주권재민을 기초로 한 한글판 독립신문의 계몽적 기능은 일반인들의 국가의식과 민권사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정의 잘못을 비판하고 열강의 경제적 침탈 등을 고발함으로써 자주국권의식과 자유민권의식 등을 배양하는 데 공헌하였다. [255]

 

「독립신문」은 많은 기독교 관련기사를 실었는데, “세상에 교가 많이 있으되 예수교같이 참 착하고 사랑하고 참 남을 불쌍히 여기는 교는 세계에 다시 없다고 한 뒤 크리스트의 교를 착실히 하는 나라들은 지금 세계에 제일 강하고 제일 부요하고 제일 문명하고 제일 개화가 되어 하나님의 큰 복을 입고살고 있으므로 크리스트교가 문명개화하는 데 긴요한 것이며, “문명ㆍ개화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개인의 자유권과 국가의 자주권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255]

 

19047, 쇠잔해가던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양기탁ㆍ신채호ㆍ박은식 등에 의해 창간ㆍ운영되었던 「대한매일신보」는 민족의식 고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신문은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 기사를 많이 실으면서 큰 기대를 걸었으나, 국가의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구원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일 때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256]

 

교육과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의 형성이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민족의식으로 수렴되는 과정에는 성경의 영향이 컸다. 세계 기독교사에서 한국 교회와 교인만큼 성경을 열심히 읽고 이것을 자신의 신앙 및 민족문제와 일체화시킨 예를 찾기란 쉽지 않다. 1930~1940년대 강포한 일제의 탄압하에서 많은 순교자가 배출될 수 있었던 것도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256]

 

1890년대 기독교인의 민족의식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강력하게 침투해 오는 외세로부터 국가를 보위해야 한다는 역사적 과제 앞에 기독교인들은 황실의 안녕을 지키는 것을 곧 국권수호의 길로 이해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와 황태자의 생일을 맞아 각 교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축하행사를 추진하여 기도회와 연설회 등을 개최하였다. 또 행사에서는 애국가 제창을 빼놓지 않았으며, 교회마다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오늘날 31절과 같은 국가적 기념일에 애국가를 부르며, 교회 단상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도 이러한 것도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256]

 

이같은 충군애국적 행사의 개최에는 원활한 선교활동을 위해 고종의 환심을 얻으려는 선교사들의 의중도 작용하였다. 1896년에는 언더우드의 주도로 고종의 생일인 만수성절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는데, 이 기념식은 고종과 정부에 대한 교회의 절대적 지지와 충군애국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7년 만수성절 기념식은 아펜젤러가 주도하였으며, 서울의 대부분 교회들이 기도회를 열었고, 조선개국일을 기념하는 행사도 독립협회 주최로 열렸다. 죠션크리스도인회보그리스도신문에서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교회와 교인들의 충군애국을 부각시켰다. 이어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교회 역시 이를 적극 환영하였다. 아펜젤러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임금을 내시고 또 황제가 되시게 하셨으니 임금의 명령을 거역함은 곳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이라라며, “황제에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257]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정치ㆍ경제적 침투가 강력해지던 시기, 기독교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내재적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며 근대적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의 사회적 기능은 초기에 정치 외적인 사회ㆍ문화적 방면에 변혁의 주체로서 봉건성을 극복하는 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258]

 

기독교는 또 하나의 역사적 과제인 반외세의 극복에서 한계를 보였으나, 이에 기여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부터 1898년 만민공동회까지 5년간은 한국근대사에서 정치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이다.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서구열강의 침투가 노골화되자, 외압으로부터 자주권을 보호하며 더불어 자유민권운동을 통한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정치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던 것이다. 당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근대화 운동에 기독교는 직ㆍ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258]

 

1900년대 들어와 기독교 민족운동은 독립협회ㆍ협성회의 전통을 이은 계몽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계몽운동은 정치적 색채가 옅어 선교사들이나 정부당국의 감시와 견제를 비교적 덜 받을 수 있었으며 그만큼 대중성을 띠기도 하였다. 기독교인들의 계몽운동으로는 학교ㆍ야학ㆍ강습소 등의 설립과 신문ㆍ잡지의 발간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는 이미 1890년대부터 진행되어온 것이었다. [258]

 

1903년 창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계몽운동은 주목할만하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독립협회 해산 이후 사실상 명맥이 끊어진 계몽운동을 재개하였으며, 특히 1904년 대거 입회한 독립협회 출신인사들이 교육부 임원을 맡으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이 청년회의 계몽운동은 크게 대중집회와 실업교육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중집회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연설회ㆍ토론회ㆍ환등회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 청년회에서는 공업과와 강습소를 설립하여 상업ㆍ부기ㆍ대수ㆍ산술ㆍ측량ㆍ건축ㆍ사진 등을 실용적 지식과 기술을 가르쳤으며, 목공ㆍ철공ㆍ제화ㆍ인쇄ㆍ가구제작 등의 실업교육과 영어ㆍ일어ㆍ한어(漢語) 등 외국어교육도 실시하였다. [259]

 

초교파 연합기관인 황성기독교청년회와 달리 교회안에 조직된 청년회도 종교활동뿐 아니라 계몽운동에 동참하엿다. [260]

 

2) 을사늑약 반대운동과 의열투쟁 / 260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기독교 민족운동은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되며, 당시 어느 계열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상동감리교회에서 열린 이른바 상동교회에서 시작된 을사늑약 반대운동이었다. 이 회의의 참석자들은 을사늑약 파기를 위해 45명씩 돌아가며 계속해서 상소하기로 하였다. 첫 번째 상소문은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두가 되어 대한문 앞에서 상소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고, 다시 종로에서 가두연설회를 개최하였으나 역시 해산되었다. [260]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일제는 상동청년회가 청년학원을 경영하며 뜻있는 청년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실제는... 독립협회가 예수교의 가면을 쓰고 가면을 쓰고 대두한 것이며, “정치운동에 광분하였던 인물들비밀결사로서 무서운 음모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뒤 상동청년회 출신들은 만주ㆍ중국ㆍ미주 등지에서 민족운동을 지속하였으며, 정동엡윗회 출신들은 미주에서의 민족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61]

 

1907헤이그특사사건도 기독교인들과 관련이 깊다. 이준은 당시 연동장로교회 교인이었으며, 선교사 헐버트는 고종의 신임장을 이준에게 전달하였다. 또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교인인 이회영ㆍ이동녕 및 전 목사의 질녀인 김상군 등이 배후에서 활동하였다. [261]

 

기독교인들이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배척한 것도 주목된다. 예컨대 190511월 을사늑약 체결 직후 정동엡윗회와 국민교육회 회원들은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특히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이른바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11월 정부에서는 각지에서 자위단을 조직하게 하고 주민들에게 가입을 강요하였는데, 이 역시기독교인들의 배척 대상이 되었다... 19078월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은 일진회 사무소를 찾아가 항의하며 그 간판을 내리게 하였다. 또 강원 원주에서는 해산된 구한국군 3백여 명과 기독교인 1천여 명이 일진회를 공격하였다. 경기 강화에서는 일진회 간부였던 강화군수가 의병들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진압을 위해 출동안 일본군은 평소 일진회를 규탄하던 감리교인 김동수와 그의 두 동생을 처형하였다. 경기 이천에서도 감리교 전도사 구연영과 그의 아들이 일진회를 배척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경기도 양근에서도 기독교인들과 일진회원들 사이에 무력충돌이 빚어졌고, 충남 목천에서는 일본군과 일진회원들이 교회를 불태우고 교인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일본인들과 친일세력이 자위단과 일진회 가입을 강요하자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19082월 경기 행주의 경무서와 일진회에서 300여 호 주민들에게 자위단 가입을 강요하자 이들은 집단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같은 달 함남 고원에서도 일진회원 수백명이 매국사업을 회개하고 일진회를 퇴회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평북 의주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선교사를 빙자하여자위단을 배척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일진회와 자위단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취하려 노력하였으나 교회는 일진회와 자위단을 배척하는 단체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일진회 및 자위단과의 갈등과 충돌로 기독교인들의 수난과 희생이 늘어나면서 기독교는 일반사회에서 점점 더 항일운동의 구심점으로 인식되었다. [261-262]

 

기독교인이 된 후 의병운동을 전개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선교사들이 시종 의병들을 강도폭도라 비판하며 부정적 입장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선교사들과 달리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는 의병운동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보인 이들도 적지 않았으며, 의병들 또한 기독교인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 일본군 역시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관대히 처분하였다. 장로교 선교사 밀러(F. S. Miller)의 표현대로 성령은 양쪽 진영 모두에서 통하는 안전 통행증이었고 많은 사람을 곤경에서 구출해주었다.” [263]

 

기독교인들 중에는 의병들을 효유하기 위한 선유사(宣諭使)로 활동한 이들도 있었다. 정부에서 기독교인들을 선유사로 임명한 것은 19082월부터였다. 정동감리교회의 최병헌 목사가 충청남도 선유위원, 같은 교회 송기용이 충청북도 선유위원, 장로교인 서상륜이 황해도 선유위원으로 파견된 것이다. 이들의 선유활동을 놓고 예컨대 대표적 민족언론인 대한매일신보와 미국에서 발행되던 공립신문에는 이를 비난하는 기사가 실렸으며, 지역민들의 저항에 부딪히기도 하였고, 연동장로교회 게일 앞으로 이들을 불러들이라는 협박편지가 날아들기도 하였다. 이는 기독교게에서도 의병운동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과 입장이 공존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263-264]

 

개인적 의열투쟁... 1905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동교회의 전덕기ㆍ정순만 등은 평안도 장사들을 모아 을사오적암살을 계획하였으나 불발에 그쳤다고 한다. 19083월에는 기독교인 장인환이 통감부의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저격하였다... 이 사건은 곧 미국 등 세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장인환은 살인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등 재미한인 단체들은 변호사 선임에 필요한 모금운동을 전개, 7,300달러 모금하였다. 한편 아일랜드 출신의 변호사 등은 무료 변론에 나설 것을 자원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언론들도 한국측을 동정하는 논지를 보였다. 그 결과 장인환은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다. [264-265]

 

천주교인 안중근과 개신교인 우덕순(일면 우연준)이 함께 거사한 이토 히로부미 포살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의 조선병합에 대한 양해를 얻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하고 19091026일 오전 하르빈역에 내린 이토를 안중근이 사살하였다... 이토 저격사건은 천주교인 안중근과 개신교인 우덕순이 함께 추진한 것이다. 우덕순은 상동교회에서 민족운동에 참여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그는 1906년 계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펼치는 한편 북간도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이범윤과 연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08년 안중근을 만나 거사를 협의하였다.,, 처음에는 우덕순이 하르빈 쪽을 맡기로 하고, 안중근이 채가구 쪽을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안중근이 하르빈 쪽을 자신이 맡겠다고 주장하여 장소가 바뀌었다. 그 후 이토가 탄 열차는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였고, 안중근의 거사가 성공하였음을 알게 된 그는 러시아어로 까레이시케우라(대한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265-266]

 

1909년에는 기독교인 이재명이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완용을 습격하였다. 평북 선천 출신의 이재명은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905년 안창호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190710월 귀국한 그는 시베리아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수차 왕래하면서 이토를 살해할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의 거사소식을 듣고 국내로 잠입하여 동지들과 계획을 세웠다. 190912월 그는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 후 인력거를 타고 돌아가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찔렀다. 이완용은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갔고, 이재명은 호위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김병록ㆍ김정익ㆍ이동수ㆍ이학필ㆍ전태선ㆍ조창호 등도 기독교인이었다. [266]

 

의열투쟁의 일환으로 자결을 선택한 기독교인... 경기도 인천의 교육가로 명성이 높았던 기독교인 정재홍은 19076월 서울 농상소에서 열린 박영효환영회에 참석하여 행사 도중 연단 앞으로 나아가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19077월 경기도 양주의 목사 홍태순은 고종의 퇴위에 격분하여 대한문 앞에서 약을 삼키고 자살하였다. [266-267]

 

안중근은 신문과정에서, 천주교에서는 살인이 죄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 데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죄악이므로 그 죄악을 제거한 것이라 주장하였고, 이토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며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면서 대한만세를 불렀다. 우덕순도 거사에 앞서 앉을 때나 섰을 때나 仰天하고 기도하길 /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예수여 살피소서 / 東半島大帝國을 내대로 하소서라는 시를 지었다. [267]

 

3) 항일경제운동과 국가를 위한 기도회 / 268

 

기독교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이 기독교계의 지도급 인사들에 의한 정치운동과 관련된 것이라면, 항일경제운동은 대체로 일반 기독교인들의 생존권 운동의 성격이 더욱 짙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에 의한 항일경제운동은 서북지방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268]

 

한편 한국에 입국한 초기 선교사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단한 ‘사업가적 감각’을 갖고 있었다. 첫 내한 선교사인 알렌과 언더우드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알렌은 한국의 최대의 금광인 운산금광의 채광권을 무상으로 하사받을 만큼의 대단한 수완가였으며, 이를 미국 광산업자에게 넘기면서 거액의 구전을 받은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에 넘기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그는 사어바로서의 선교사라 불릴 인물이다... 언더우드 역시 상업적 활동을 벌였다. ‘백만장자 선교사라고도 불렸던 그는 선교활동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고 한국인들에게 서양문명의 이기를 알린다는 명분하에 석유, 석탄, 농기구 등을 수입ㆍ판매하였다. 빈튼(C. C. Vinton)은 백여 대의 재봉틀을 들여다 팔았고, 심지어 서울의 한 선교사는 여관업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 보수 신앙의 대부라 불리는 마펫(S. A. Moffett)(G. Lee)도 압록강 연변의 3천여 그루의 나무를 세금지불도 하지 않고 벌채하려는 이권에 관계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상행위는 당시 미국공사를 난처하게 만들어 우리 선교사들의 상업적 경향성이... 우리 상인들을 대단히 괴롭히고 있다고 하였는가 하면, 이때 한국에서의 경제적 이권경쟁에 깊이 관계하였던 타운센트(W. D. Townsend)는 자기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선교단체에 기부하는 일을 중지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268-269]

 

초기 한국인 기독교인 중 상공업 종사자가 많았던 점과 선교사들 역시 사업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강력해지기 시작한 청일전쟁 이후 한쪽은 생존권 확보를 위해, 다른 한쪽은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중삼중의 경제적 수탈을 당했다. 따라서 경제적 이해를 달리하게 된 선교사측과 한국인들 사이에는 틈이 벌어졌다.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려는 데 반하여 한국인들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인들의 항일경제운동은 선교사들의 권면과는 관계없이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었다. [269-270]

 

청일전쟁 이전까지 경제적 상권경쟁은 청ㆍ일간의 ‘행상(行商)’ 중심의 소박한 경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상인들이 개항지는 물론 내지 깊숙이까지 침투하여 상설점포를 개설하면서 토착적인 한국상인들의 상권을 잠식하였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일제의 횡포 앞에 무력하기만 하였다. [270]

 

기독교계의 항일경제운동은 두 가지 양태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열악한 소규모의 토착자본을 규합해서 강력하게 침투해 오는 일제의 자본과 상품에 대항할 만한 민족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상품에 대한 불매운동과 시장세 등 잡세 징수에 대한 항세운동 등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전자는 신민회 지도부가 구상, 실천에 옮긴 것으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실력양성에 입각하여 민족자본을 형성하려는 방책이었다. 후자는 당장 생존권 위협을 받는 소상공자들 사이에서 자구책으로 표출된 방책이었다. 또한 전자가 종교를 초월한 대규모 조직의 민족운동적인 차원에서 추진되었다면, 후자는 기독교인 중심의 운동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270]

 

신민회 지도급 인사인 서북지방의 토착자본가 및 상공업자들은 1908년 이후 항일경제운동에 나섰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같은 해 2월 용천 양시에 설립된 상무동사(商務同事)와 선천의 상무동사 총지점, 그리고 청주 납청정에 설립된 협성동사(協成同事)이다. 이들 상사는 본래 수입상품을 주로 취급하던 잡화업에 종사하는 토착상인들을 규합, 이들로부터 일정한 출자금을 받아 이윤을 배당하는 오늘날 주식회사 형태의 회사였다. 선천의 상무동사 총지점의 경우 출자자는 백 여명, 자본금은 9천원에 이르렀다. [270-271]

 

일련의 민족자본 형성을 위한 단체 결성이 신민회의 평안도 총감 이승훈이 제창한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 실천운동으로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승훈은 실추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전국적인 토착자본의 규합에 앞서 우선 서북지방 토착상인들이 그 모본을 보임으로써 앞으로 영호남의 토착자본도 규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도에서 관서자문론을 제창하였다. [271]

 

관서자문론에 따라 이승훈이 심혈을 기울여 시도한 사업은 평양 마산동 자기주식회사 설립이다. 19082월 평양 관동에서 자본금 6만원의 자기회사 설립을 목표로 추진된 이 계획은 한 주당 50원으로 하여 1차로 1,200주의 주식을 공모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1012월 현재 8백주만이 소화되었을 뿐 그 이상은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나머지 4백주를 채우기 위해 이승훈은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이를 달성할 수 없었으며, 그가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으로써 이 사업은 중도에 좌절되었다. [271-272]

 

비록 경제적 측면에서는 실패하였으나... 이 회사가 설립된 후 배일의식이 강하였던 많은 청년들이 이 회사에 입사하여 민족의식을 공고히 하였으며 그 결과 다수의 신민회 회원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272]

 

직접적이고도 현실적인 항일경제운동... 평북 용천 양시와 평남 순천의 기독교 상인봉기운동’... 1909년 통감부령으로 시장세를 제정ㆍ공포한 일제는 이를 강제로 징수하고자 하였다. 이에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상인들이 일제히 이를 거부하는 항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백일세사건(百一稅事件)’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이 처음 일어난 곳은 용천 양시의 장터였다... 송자현 등이 주도한 이 운동은 각지로 확산되었다. 그 중 가장 강렬한 항세운동이 전개된 곳이 평남 순천이었다. 19101월 시장세 징수에 반대하는 순천의 상인들이 연합하여 일본인 상점을 파괴ㆍ방화하였으며, 일본인 수명을 타살하기도 하였다. 그후 항세운동은 서북지방 전체로 확산되었다. [272]

 

지역에 따라 선교사들이 운동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함경도 경성에서는 선교사와 교인들이 연계하여 연초경작세ㆍ주세를 받으러 온 징수원과 마찰을 빚었고, 성진에서는 그리어슨과 로스의 지시로 각종 시장세를 불납하였다. 진남포에서도 기독교인들이 항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는 교회에 헌금으로 1년에 16만원씩이나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들이 1~2전 하는 시장세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은 미국인들의 종용이라며 비난하였다. [273]

 

1900년대 기독교인들이 참여한 항일경제운동은 국채보상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2월 대구에 있던 출판사 광문회의 사장 김광세와 부사장 서상돈 등을 중심으로 발족한 국채보상기성회가 모체가 되었다. 이 운동은 당시 정부가 일본에 지고 있던 1,300만원의 국채를 2천만 국민이 3개월간 금주ㆍ단연의 방법으로 모금하여 갚자는 것이었다. [273]

 

기독교인들의 국채보상운동은 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73월 평양에서 임기반ㆍ최신실 부부가 은장도를 희사한 것이 평양지역 국채보상운동의 효시였다. 이후 임기반ㆍ박봉도 등이 발기하여 평양국채보상회가 조직되었다. 같은 달 인천의 감리교회 부인들이 국미적성회(掬米積誠會)를 조직하여 가족수에 따라 성미를 모아 헌금으로 냈는데, 회원이 500명에 이르렀다. 이 국미적성회는 부흥운동 기간 중 북부지역에서 활발히 일어난 성미운동(誠米運動)’을 민족운동과 접목시킨 것이었다. [273]

 

삼화ㆍ해주ㆍ여주 등지에서는 교회 여성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여성들이 이 운동을 여권회복운동의 차원에서도 전개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19074월 여성들이 국채보상을 위한 탈환회(奪環會)를 조직하면서 발표한 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지방마다 이 운동의 추진을 위한 각종 기독교계 단체가 결성되어 서울여자교육회ㆍ진명부인회ㆍ대한부인회 등의 여성단체와 지방의 선천의성회ㆍ안악국채보상탈환회ㆍ제주도의 삼도리부인회 등이 결성되었으며, 미주 하와이 교포들과 일본에 유학중인 학생 8백명이 성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274]

 

일제는 이 운동을 배일운동으로 간주하고 와해공작에 나섰다. 즉 이때 모아진 성금 일부를 보관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사의 총무 양기탁이 이를 횡령하였다는 조작극을 꾸며 재판에 회부하였고, 그 후 이 운동은 침체에 빠졌다. [274]

 

국가를 위한 기도회 개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1905년 시작되었다... 7월 연동장로교회에서는 위국기도문(爲國祈禱文)’ 1만 장을 인쇄ㆍ배포하고 매일 호우 3~4시 국가를 위해 기도하도록 교인들에게 당부하였다. 기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 한국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沈淪[깊은 물]에 들었으며 오직 하나님밖에 빌데 없사와 우리가 일시에 기도하오니 한국을 불상히 여기사 耶利未亞[예레미야]以賽亞[이사야]但以理[다니엘]이 자기 나라를 위하야 간구함을 들으심같이 한국을 구원하사 전국 인민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고 다 천국백성이 되어 나라이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받아 지구상에 독립국이 확실케 하야주심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이처럼 기도문에서는 당시 정국의 혼란 원인을 일제의 침략이 아닌 한국의 죄악이라 하였지만 지구상에 독립국이 확실케해달라고 간구함으로써 민족적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을사늑약 체결을 앞두고는 상동교회에 천여 명이 모여 통곡하며 기도회를 드렸고, 이 같은 기도회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장로교ㆍ감리교ㆍ침레교 교인들이 연합하여 매일 오후 2~4위국기도문에 따라 기도하기도 하였다. 위기에 빠진 국가를 위해 모든 기독교인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구국기도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275]

 

4)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 / 276

 

신민회는 1900년대 국내 최대의 항일비밀결사였으며, 그 중심인물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신민회가 조직된 것은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한 지 2개월만인 19074월이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조직된 데는 상동청년회와 같은 기존의 항일민족단체가 큰 역할을 하였다... 신민회의 창립취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부패한 구시대의 사상과 관습을 타파하고 근대적인 교육과 산업을 육성시켜 유신한 국면을 통일ㆍ연합하여 자유문명국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중세적 봉건왕조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공화정에 입각한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276]

 

안창호 등은 서울에 중앙조직을 두고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지방조직을 구축하였다... 평양을 중심한 평안남도의 신민회 조직은 대성ㆍ숭실ㆍ일신ㆍ양실 등 학교와 교사와 학생, 그리고 근대적인 상공업 종사자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신민회 회원의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었다. 뒷날 105인사건으로 기소된 123명 중 104명이 교인이었다. [276-277]

 

신민회의 활동은 민족의 의식개혁을 위한 계몽운동에 주력하였으며, 이를 위해 대성학교ㆍ오산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또 민족산업의 육성에도 노력하여 태극서관과 무역상사, 자기회사 등을 설립하였다. 일제의 병탄을 목전에 둔 19104월에는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회의를 열고 국외 독립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하여 항일무력투쟁을 준비하였다. [277]

 

신민회가 결성된 1907년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 시기였다. 한편에서는 선교사와 교회를 중심으로 탈정치적인 신앙부흥운동이 추진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정치적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가 창립되었다. 이는 정치적 현실참여문제를 놓고 한국교회가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를 보이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77]

 

5) 해외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 277

 

을사늑약 직후 해외로 망명한 이상설ㆍ이동녕ㆍ정순만ㆍ여준 등은 1906북간도 용정촌에 한인촌을 건설하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는데, 이들은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 이어 김약연 목사 등은 명동촌에 한인촌을 건설하고 1908년 명동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동휘ㆍ정재면 등 기독교인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278]

이들은 연변교민회(1907)ㆍ간민회(1909) 등도 조직하였다. 비밀조직인 연변교민회는 한국인들의 단결ㆍ친목과 복리증진ㆍ사상계몽 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김약연ㆍ김영학ㆍ구춘선ㆍ문치정ㆍ마진 등 기독교인이 주도하였다. 간민회의 목적도 비슷하였으나, 표면조직으로서 한국인들을 대표하여 관청과 교섭하며 중재역할을 맡았다. 또 이들은 명동학교를 비롯하여 모범학당ㆍ태광학교ㆍ교향학교ㆍ제등학교ㆍ창동학교ㆍ광성학교ㆍ배영학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278]

한편 1909년부터 논의된 신민회의 무장독립전쟁론에 따라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특히 19104청도회담이후 이같은 이주가 더욱 증가하였다. 1910년 일제의 병탄이후에는 서간도로 망명하여 한인촌을 건설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한 기독교인들도 나타났다. [278-279]

 

일본에서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도쿄의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중심이 되었다... 한편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해 19068월 김정식을 파견, 기독교청년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1월 동경 YMCA 건물 2층에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되었으며, 이듬해 8월 간다구[神田區]에 독립된 회관을 마련하였다... 19095월에는 한석진 목사가 파송되어 청년회관 내에 동경한인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김정식ㆍ조만식ㆍ오순형 등이 영수, 김현수ㆍ장원배ㆍ장혜순ㆍ백남훈 등이 집사로 봉직하였다. 기독교청년회와 한인교회는 재일한국인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279]

 

미주지역의 한인사회1902년 12월부터 시작된 하와이 이민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038월 호놀룰루에서는 홍승하ㆍ윤병구ㆍ임형주ㆍ이교담ㆍ임치정ㆍ안정수 등 기독교인들이 동족단결ㆍ민지계발(民智啓發)ㆍ국정쇄신을 강령으로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비록 단명하였으나, 1907년 국내에서 신민회가 결성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밖에 하와이에서설립된 한국인 단체로는 혈성단(1906)ㆍ자강회(1906)ㆍ공진회(1906)ㆍ의성회(1907) 등이 있었으며, 1907년에는 24개 단체 대표 30명이 호놀룰루에서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창립하였다. [280]

 

미국 본토에서는 1903년 9월 상항친목회가 결성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공립협회가 창립되었다. 공립협회는 열강과 대한군주와 신하빈자와 부자가 서로 공립하는 입헌공화주의를 추구하였으며 회원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이밖에 대동교육회(1905)ㆍ대동보국회(1907)ㆍ공제회(1907)ㆍ동맹신흥회(1907) 등이 결성되었으며, 1906년부터 재미한인단체의 통일연합론이 대두되면서 1909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어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280-281]

 

6) 선교사와 민족운동 / 281

 

1890년대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기면서까지 한국왕실과 유착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각 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외국인으로서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렸으며, 정부로부터 호조(여행증명서)를 받아 각지를 여행하면서 각종 이권에도 개입하였다. 그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진흙탕 같은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뛰어들어 몸을 더럽히고 있다는 비난이 일었고, 1897년 주한미국공사는 선교사들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81]

 

1910년대에 들어와 한국에 대한 일제의 지배가 강화되자 선교사들은 현실문제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스크랜턴의 지적처럼 거의 대부분 친일본적이 되었다. 그러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권위에 대한 복종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강조하고 과격한 민족운동을 비난하며 정교분리를 강조하였다. [281]

 

1901년 9월 장로회공의회에서 선교사들이 천명한 교회의 비정치화선언(5개항)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그 중요한 내용은 선교사들은 한국 백성들의 정치 참여 문제를 간섭할 수는 없으며, 국가의 백성으로서 교인으로서 개인의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교회가 간섭할 수 없으나, 교회는 나라 일을 의논하는 집이 아니니 그 집(교회)에서 나라 일을 공론하러 모이는 곳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요컨대 교인의 개인적 정치운동은 가능하나 교회가 정치운동의 직접적인 장이 될 수는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281-282]

 

1904~1905년의 러일전쟁 직후 선교사들은 일제당국과 한국교인들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조약을 거치며 일제의 한국병탄이 가시화되자 이들은 ‘친일’로 방향을 굳혔으며, 여기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선교사 회유책도 주효하였다. 이로써 선교사들이 천명하였던 교회의 비정치화내지 정교분리선언은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오히려 정교유착의 방향으로 흘렀다. 나아가 어떤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통치를 환영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문명국인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부패한 한국정부의 통치를 받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였다. [282]

 

1907년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그 여파가 교회에까지 미칠 조짐이 보이자 선교사들은 우리는 의병운동에 반대하며, 여기에 교회가 말려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이들 게일은 미친 듯한 사이비 애국주의(mad sort of spurious patriotism)”로 보기도 하였다. 선교 초기 복음전파와 함께 자유사상과 민족의식을 일깨워 준 선교사들이 이처럼 일제의주권 침탈을 묵인ㆍ방조한 점은 한국교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282]

 

헐버트처럼 한국인들의 민족운동을 지원한 선교사도 있었다. 그는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한 이래 1909년 일제의 압력으로 출국하기까지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며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을사늑약을 한 달 앞둔 190510월 고종의 친서를 갖고 미국에 건너가 백악관ㆍ국무성ㆍ의회를 찾아 한국의 국권유지를 호소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특사의 파견을 중재하고 그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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