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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 [憲康王, AD. ?~886] 신라 제49대 국왕(AD. 875~886)

[*수호천사*] 2025. 6. 1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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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 [憲康王, AD. ?~886] 신라 제49대 국왕(AD. 875~886)

 

【개인 정보】

  • 이름 : 김정(金晸)
  • 출생 : 미상
  • 사망 : 886년 7월 5일(음력)
  • 재위 : 기원후 875년 7월 8일(음력) ~ 기원후 886년 7월 5일(음력)
  • 전임 : 경문왕
  • 후임 : 정강왕

 

【가계 정보】

  • 부왕 : 경문왕(景文王)
    모후 : 문의왕후(文懿王后) – 문자왕후(文資王后), 영화부인(寧花夫人)라고도 한다.
  • 왕비 : 의명부인(懿明夫人) –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로 추존
  • 딸 : 의성왕후(義成王后) – 제53대 신덕왕 비, 제54대 경명왕, 제55대 경애왕 모후
    딸 : 계아태후(桂娥太后) – 신흥왕(神興王) 김효종(金孝宗) 비, 제56대 경순왕 모후
    아들 : 김요(金嶢) : 897년 제52대 효공왕 즉위

 

【헌강왕 연보】

 

【기원후 875년】 헌강왕 원년

  • 헌강왕(憲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晸)이며, 경문왕(景文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이며,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임금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책보기를 좋아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 왕위에 오르면서 이찬 위홍(魏弘)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예겸(乂謙)을 시중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기원후 876년】 헌강왕 2년

  • 봄 2월, 황룡사(皇龍寺)에서 모든 스님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백고좌(百高座)1)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들었다.
  •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기원후 877년】 헌강왕 3년

  • 봄 정월, 고려 태조대왕(왕건)이 송악군(松岳郡)에서 태어났다.

 

【기원후 878년】 헌강왕 4년

  • 여름 4월, 당나라 희종(僖宗)이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使持節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大都督雞林州諸軍事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려다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 8월, 일본국 사신이 오니, 임금이 조원전(朝元殿)에서 접견하였다.

 

【기원후 879년】 헌강왕 5년

  • 봄 2월, 임금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에게 강론을 하도록 명하였다.
  • 3월, 임금이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임금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습이 해괴하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精靈)이라고 여겼다.[고기(古記)에는 이 사건이 왕위에 오른 원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 여름 6월, 일길찬 신홍(信弘)이 반역을 일으켰기에 사형에 처하였다.
  • 겨울 10월, 임금이 준례문(遵禮門)에 나아가 활 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 11월, 임금이 혈성(穴城)의 들에서 사냥을 하였다.

 

【기원후 880년】 헌강왕 6년

  • 봄 2월, 태백(太白, 금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 시중 예겸이 사직하였기에, 이찬 민공(敏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 가을 8월, 웅주(熊州)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 9월 9일,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랫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임금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들었는데,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민공이 대답하였다.
    “저도 역시 일찍이 이와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또 아뢰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롭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며, 국경이 안정되고 도시에서는 즐거워하니, 이것은 임금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것은 그대들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

 

【기원후 881년】 헌강왕 7년

  • 봄 3월, 임금이 임해전(臨海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에 감흥이 오르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노래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기원후 882년】 헌강왕 8년

  • 여름 4월,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명주(明珠) 10개를 진상하였다.
  • 겨울 12월, 고미현(枯彌縣)의 여자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기원후 883년】 헌강왕 9년

  • 봄 2월, 임금이 삼랑사(三郞寺)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각각 시 한 수씩을 짓도록 명하였다.

 

【기원후 885년】 헌강왕 11년

  • 봄 2월,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왔다.
  • 3월, 최치원(致遠還)이 돌아왔다.
  • 겨울 10월, 임자일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기원후 886년】 헌강왕 12년

  • 봄, 북진(北鎭)에서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그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2)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 여름 6월, 임금이 병으로 편안하지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고, 또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 가을 7월 5일,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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