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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 [憲安王, AD. ?~861] 신라 제47대 국왕(AD. 857~861)
[*수호천사*]
2025. 6. 1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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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 [憲安王, AD. ?~861] 신라 제47대 국왕(AD. 857~861)
【개인 정보】
- 이름 : 김의정(金誼靖), 김우정(金祐靖)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861년 1월 29일(음력)
- 재위 : 기원후 857년 9월(음력) ~ 기원후 861년 1월 29일(음력)
- 전임 : 문성왕(文聖王)
- 후임 : 경문왕(景文王)
【가계 정보】
- 아버지 : 김균정(金均貞, ?~836) – 성덕왕(成德王)으로 추존
어머니 : 조명부인(照明夫人) – 충공(忠恭)의 딸. - 이복 형 또는 이종사촌형 : 신라 신무왕(新羅 神武王)
이복 형수 또는 이종사촌형수 : 정계부인(貞繼夫人) - 왕비 : 안정왕후 김씨(安貞王后 金氏)
- 장녀 : 문의왕후 김씨(文懿王后 金氏, 841~870)
사위 : 김응렴(경문왕, 景文王) – 신라 제48대 국왕 - 차녀 : 차비 김씨(金氏, 842~?) 문의왕후의 동생
- 서자(추정) : 궁예(弓裔)(친부가 헌안왕인지 경문왕인지 불분명)
【헌안왕 연보】
【기원후 857년】 헌안왕 원년
- 헌안왕(憲安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誼靖)[우정(祐靖)이라고도 한다.]이다. 신무왕(神武王)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으로 선강왕(宣康王)의 딸이다. 문성왕(文聖王)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이찬 김안(金安)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기원후 858년】 헌안왕 2년
- 봄 정월, 임금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냈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 당성군(唐城郡) 남쪽 강변에서 큰 고기가 나왔는데 길이가 40보, 넓이가 6장이었다.
【기원후 859년】 헌안왕 3년
-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리므로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구제하였다.
- 여름 4월, 임금이 교서를 내려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다.
【기원후 860년】 헌안왕 4년
- 가을 9월, 임금이 임해전(臨海殿)에 여러 신하들을 모이게 하였는데, 왕족 응렴(膺廉)이 열다섯 살의 나이로 참석하였다. 임금이 그의 뜻을 알아보려고 갑작스레 물었다.
“너는 한동안 유람하며 배웠는데 착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는가?”
응렴이 대답하였다.
“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이 착한 행동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임금이 물었다.
“어떤 행동인가?”
응렴이 대답하였다.
“한 사람은 높은 집안의 자제인데 다른 사람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한 사람은 재물이 많은 부자로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고도 기뻐하였으며, 한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내가 사람을 많이 겪었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
그리고 사위를 삼을 생각으로 응렴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스스로 삼가고 사랑해라. 나에게 딸이 있으니 사위를 삼도록 하겠다.”
임금은 다시 술을 가져오게 하여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딸이 둘 있는데, 큰 아이는 금년에 스무 살이요, 작은 아이는 열아홉 살인데 그대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장가를 들라!”
응렴이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부모가 말하였다.
“듣건대 임금의 두 딸의 얼굴은 언니가 동생보다 못생겼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 장가를 가야 한다면 동생에게 장가를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응렴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흥륜사(興輪寺)의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이 말하였다.
“언니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세 가지 손해가 있을 것입니다.”
응렴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제가 감히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겠사오니 그저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하였고, 임금이 맏딸을 시집보냈다.
【기원후 861년】 헌안왕 5년
- 봄 정월, 임금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불행하게도 아들이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나라 옛 일에 선덕(善德)과 진덕(眞德)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가까운 일이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노련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祖宗)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나라에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 이달 29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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