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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恭愍王, AD. 1330~1374] 고려의 제31대 국왕(재위 : 1351~1374)
[*수호천사*]
2025. 6. 24.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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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恭愍王, AD. 1330~1374] 고려의 제31대 국왕(재위 : 1351~1374)
공민왕(恭愍王, AD. 1330~1374)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재위 : 1351~1374)으로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차남이며 충혜왕의 동복 동생이다. 이름은 왕전(王顓), 왕기(王祺)이며 몽골 이름은 바얀테무르(Bayan Temur, 伯顔帖木兒)이다.
【출생 이후 즉위까지】
【기원후 1330년】 출생하다
- 음력 5월 6일,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 충혜왕의 동복동생이다.
-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몽골어: Bayan Temur, 한자: 伯顔帖木兒 백안첩목아)이며 호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이다.
【기원후 1341년】 강릉대군 신분으로 원에 숙위하다
- 1341년(충혜왕 복위 2) 5월에 왕의 동생 강릉대군(江陵大君)이라는 신분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는데, 때 정승(政丞) 채하중(蔡河中) 등 30여 명이 호종(扈從)하였다.
【기원후 1344년】 충혜왕 사후 추대 움직임, 충목왕 즉위
- 1344년(충혜왕 5)에 충혜왕이 사망하면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고려 신료들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충혜왕과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소생인 충목왕(忠穆王)이 왕위에 올랐다
- 1344년(충목왕 원년)에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에 봉해졌다.
【기원후 1348년】 충목왕 사후 추대 움직임, 충정왕 즉위
- 충목왕 사후 윤택(尹澤) 등 다수의 고려 신료들이 몽골에 글을 올려 공민왕의 즉위를 요청했으나, 고용보(高龍普) 등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지원을 받은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함으로써 왕위 계승에 실패했다.
【기원후 1349년】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다
- 1349년(충정왕 1년)에 원나라의 황족인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기원후 1351년】 충정왕이 폐위되고 즉위하다
- 공민왕은 그대로 원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다가 1351년(충정왕 3) 음력 12월 27일, 원나라 황실이 외척 세력의 전횡과 국정 문란의 책임을 물어 충정왕을 폐위시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 이후 신돈의 등용 이전까지】
【기원후 1352년】 정방을 폐지하고 개혁작업에 돌입하다
- 즉위한 지 두 달 뒤인 이듬해 2월부터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2월 초하루에는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 1352년 8월 공민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날의 임금들이 일심전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친히 국정을 담당함으로써 견문을 넓혔고 하부의 실정 또한 살필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임금이 친히 나라를 맡기에 걸맞은 시기이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판결송사에 관하여 5일에 한 번씩 반드시 계를 올리도록 하라. - 공민왕은 8월의 서연에서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과 전답 및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기탄 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령하였다.
- 이에 따라 그동안 권력에 기생하던 성사달 등 부패한 고급관리들이 대거 하옥되었다. 또한 상장군 진보문의 아내 송씨의 간통사건을 적발하는 등, 부정을 일으킨 자들을 색출하여 하옥함으로써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단속하였다.
【기원후 1352년】 조일신이 권력을 독차지, 조일신 제거
- 홍건적의 난으로 원나라의 지배력이 대폭 약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은 본격적인 반원 자주화 개혁정치를 폈다. 그러나 1352년 9월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判三司事) 조일신(趙日新)이 정천기(鄭天起), 최화상(崔和尙), 장승량(張升亮) 등과 힘을 합쳐 대신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 한달 뒤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였다. 이로써 조일신은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진하였으며, 판군부 감찰을 겸하며 공신 칭호까지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金添壽)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 측근인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였다. 이어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이제현을 우정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적 정권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기원후 1354년】 원나라의 요청으로 파병하다
- 당시 원나라는 피지배층 한족의 반란인 홍건적의 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354년 음력 7월, 원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최영, 이방실, 안우, 김용, 정세운, 유탁(柳濯) 등은 병력 2천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었다. 파병군은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라 불렸다. 파병 후 귀국한 장군들이 원나라의 몰락을 상세히 보고하여,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어주었다.
【기원후 1356년】 기씨 일족 숙청, 쌍성총관부 회복
- 1356년(공민왕 5년) 음력 4월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를 중심으로 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철 등 기씨 일족과 권겸, 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 이를 병신정변(丙申政變)이라 한다. 그 동안 기씨일족들은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기자오의 딸을 중심으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기철(奇轍)ㆍ권겸(權謙)ㆍ노책(盧𩑠) 등 부원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다. 먼저 5월 18일에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주3를 혁파하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였다.
- 6월 4일에는 인당(印璫)이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참(站)을 공격하여 이를 고려 영토에 편입하였다.
- 6월 26일에는 원나라 지정(至正) 연호의 사용을를 중지하여 고려가 원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선언한 다음, 사회 전반의 개혁을 표방하는 개혁교서를 반포하여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기원후 1358년】 최영, 왜구를 물리치다
- 1358년(공민왕 7년)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吾乂浦)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쳤다.
【기원후 1359년】 홍건적의 1차 침입
- 1359년(공민왕 8년) 음력 12월부터 1360년(공민왕 9) 음력 2월까지,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한반도 고려 국경을 침공하였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 이방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물러갔다.
- 홍건적의 1차 침입을 물리치자 마자 왜구가 큰 규모로 쳐들어 왔다. 이때부터 왜구는 양민학살을 서슴치 않으며 이전보다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고려군의 토벌작전에 대한 거친 대응이었다. 이들이 수도 개경 입구인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에까지 출몰해 개경의 치안을 위협하였는데, 이로인해 고려 조정은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다.
- 1359년(공민왕 8)에 발발한 제1차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은 공민왕 5년 개혁의 성과를 상당부분 후퇴시켰다.
【기원후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입
-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홍건적이 2차로 침입해 오자, 11월에 공민왕은 복주(福州)로 파천했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총병관을 김용(金鏞)에서 정세운(鄭世雲)으로 대체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1월에 정세운은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는 컸다. 정세운이 전쟁에서의 공으로 공민왕에게 총애받을 것을 우려한 김용은 왕명이라 속여 이방실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했고, 다시 이들에게 지휘관을 살해한 죄를 씌워 살해한 것이다.
- 홍건적은 몽골에 반대하는 한족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홍건적 침입의 영향으로 고려의 반원 개혁은 부분 차질을 빚었으며,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때 관제를 개혁 이전으로 되돌리기도 하였다.
【기원후 1362년】 나하추가 동북면을 침공, 김용의 야망
- 1362년(공민왕 11년)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는 쌍성총관부의 잔당인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에 침공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 공민왕이 왕세자로 원나라에 입조했을때 김용은 시종이었는데, 그때의 인연으로 인해 공민왕 즉위후 순조로운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간통사건에 연루되는 등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으나 공민왕의 총애를 받는 측근으로서 가벼운 처벌을 받은 후 다시 중용되기도 했다. 권력 욕심이 컸던 그는 1362년(공민왕 11년) 음모를 꾸며 자신과 권력을 다투던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을 주살한 후 더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기원후 1363년】 덕흥군 추대, 김용의 공민왕 암살 시도
- 한편, 고려에서 죄를 짓고 원으로 도망쳐온 최유는 기황후에게 접근하여 공민왕 폐위와 덕흥군(德興君) 추대라는 거사 추진을 부추겼다. 기황후가 지난 1356년에 자신의 오라비 기철을 죽인 공민왕에게 복수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황실로로부터 거사에 대한 내응 요구를 받은 김용은 1363년(공민왕 12년) 음력 3월, 공민왕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홍건적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피난하였다가 개경 근처에 있는 흥왕사에 행궁을 차리고 있던 공민왕의 처소를 자객들을 이끌고 급습했던 것이다. 공민왕은 피신하여 화를 면했고 최영이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김용은 경주로 유배되었다가 참수당했다.
【기원후 1364년】 덕흥군과 최유가 고려를 침입, 여진의 침입, 왜구 침입
- 김용의 공민왕 시해가 실패하자 덕흥군은 1364년 음력 1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하였다. 침입소식을 접한 공민왕은 경천홍과 안우경에게 군사를 내주어 서북부 일대를 방비토록 하였다. 최유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그후 선주를 근거지로 삼고 남하를 준비하고 있는데 최영의 군대가 급습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다. 패배 후 원나라로 돌아간 최유는 고려정벌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반대에 부딪쳤고 오히려 포박당한 뒤 고려로 압송된 후 사형되고 말았다.
- 1364년(공민왕 13년) 음력 1월,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金三善), 김삼개(金三介)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또한 같은 달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朴伯也大)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다.
- 1364년(공민왕 13년) 음력 5월에는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이후 왜구들은 원명교체기로 인해 해안경비가 소홀해진 중국대륙으로 약탈지를 변경하였다. 이로인해 한반도에 출몰횟수는 줄어드는듯 했으나 곧 왜구가 다시 출몰하였고 이들은 기마병까지 동원하였다. 공민왕은 최영을 왜구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퇴치에 노력하는 한편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적인 노력도 기울였다. 그밖에도 왜구에 대한 유화책을 펼치기도 했으나 약탈을 근절시키지 못했으며 왜구에 의한 피해는 공민왕의 치세내내 이어졌다.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신돈의 등용과 개혁정책】
【기원후 1365년】 노국대장공주의 사망, 신돈의 등용
-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 왕비의 사후 그는 술로써 시름을 달랬다.
-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을 등용하였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된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록하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使)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다.
【기원후 1366년】 신돈, 전민변정도감 설치, 제주도 공격하였으나 패전
- 1366년 신돈의 건의로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수상직과 감찰서와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또한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신돈은 민중들에게 ‘성인’ 칭송을 받았다. 결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들은 곧 신돈의 정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다.
- 1366년(공민왕 15년) 음력 10월 김유(金庾)가 1백 척의 규모의 토벌군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패전했다. 당시 제주도는 삼별초의 항쟁에 진압된 뒤 몽골의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으며, 다수의 몽골인들이 주둔하여 친원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후 약 10여 년 넘게 제주도는 고려 조정에 반발하였다.
【기원후 1368년】 순자법 실시, 명나라와 협력
- 1368년(공민왕 17)에 관리의 근무일수에 따라 그 승진을 결정하는 순자법[순자격](循資法)을 실시하여 무장세력들이 군공으로 급속히 승진함으로 해서 발생했던 관료체계상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고자 했다.
- 1368년(공민왕 17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기원후 1367년】 성균관 중영
-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고려](成均館)을 중영하였다.
【기원후 1368년】 친시를 단행하여 신흥 유신들을 모으다
- 1368년(공민왕 17)에 친시(親試)를 단행하였다. 유신들의 좌주-문생 관계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성균관 중영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신흥유신들이 집결하여 새로이 정치세력화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원후 1369년】 명나라가 몽골을 중원에서 몰아내다
- 1368년(공민왕 17) 9월에 몽골의 수도인 대도가 명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몽골 황제가 막북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다. 이어 1369년(공민왕 18) 4월에는 명 황제가 자신이 오랑캐인 몽골을 몰아내었으니 명에 조공하라는 내용을 담은 친서를 보내왔다. 이에 공민왕은 5월에 몽골의 지정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6월에 관제를 개편하였다.
- 1369년(공민왕 18) 12월에 고려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지용수(池龍壽)를 원수로 삼아 우라산성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기원후 1370년】 명의 연호를 사용하며 몽골과의 관계를 청산하다
- 1370년(공민왕 19)에 명의 홍무 연호 사용을 선포함으로써 100여 년간 지속되었던 몽골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 1370년(공민왕 19) 11월에는 2차 정벌을 단행하여 요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는 당시 기철의 아들이자 몽골 평장사였던 기새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몽골의 유민을 모아 동녕부 지역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고려를 침입했던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아울러 이 지역의 고려 유민을 추쇄하는 한편으로 몽골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돈 제거 이후 말년까지】
【기원후 1371년】 신해환국으로 신돈이 유배 후 처형되다
- 1371년(공민왕 20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써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신돈을 잃은 공민왕도 더 이상 개혁의지를 갖지 못하고 방황하고 만다.
- 음력 9월 동녕부를 다시 공격하는 명을 내렸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제거 이후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하게 된다.
【기원후 1372년】 자제위 구성, 술과 남색에 빠지다
- 1372년(공민왕 21) 10월, 공민왕은 세가의 자제들로 자제위를 구성하고 궁중에 배치했다. 김흥경[고려](金興慶)이 이를 총괄했으며, 홍륜(洪倫), 권진(權瑨), 한안(韓安), 홍관(洪寬), 노선(盧瑄) 등이 이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자제위는 요동 문제를 둘러싼 명과의 긴장관계 및 왜구 침구로 인해 무장들의 세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왕의 신변을 보호하고 국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
-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1372년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곁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기원후 1374년】 홍륜이 공민왕을 살해하다, 이인임이 우왕을 즉위시키다
- 1374년(공민왕 23년) 9월, 자제위 중 한명인 홍륜(洪倫)이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益妃)와 간통하였는데, 내시 최만생이 은밀히 왕에게 보고하자,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 겠다.”고 말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최만생은 홍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날 밤에 홍륜은 권진(權瑨), 홍관(洪寬), 한안(韓安), 노선(盧瑄) 등과 더불어 모의하여 술에 취한 공민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는 ‘도적이 침입했다’고 소리쳤다.
- 하지만 위사(衛士)들은 벌벌 떨기만 하고 움직이지 못하였으며, 재상과 백집사들은 변을 듣고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날이 밝을 무렵에 명덕태후가 강녕대군(江寧大君) 우(禑)를 데리고 내전에 들어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다.
- 이인임은 처음에 승려인 중 신조(神照)가 항상 대궐 안에 있었으며, 완력이 있고 남을 속이는 꾀가 많았으므로 그가 난을 일으킨 것이라 여겨 감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풍과 최만생의 옷 위에 피가 뿌려진 흔적이 있음을 보고서, 이에 최만생을 하옥시켜 국문(鞫問)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었다. 최만생과 홍륜을 비롯하여 변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그들의 삼쪽 또한 멸족되었다.
- 이 사건 이후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이인임의 섭정이 전개되었다. 우왕은 공식적으로 궁녀 한씨의 소생이었으나 실은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에 시달렸으며, 이성계 일파는 이를 사실로 내세워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데도 고려의 왕권을 찬탈하여 고려 왕조의 맥이 끊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 공민왕의 능은 현릉(玄陵)이며, 노국대장공주의 능인 정릉(正陵)은 그 옆에 나란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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