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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아누스 1세 [Gordianus I, AD. 159~238] 로마 제국 제26대 황제(AD. 238)

[*수호천사*] 2025. 6. 24.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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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아누스 1세 [Gordianus I, AD. 159~238] 로마 제국 제26대 황제(AD. 238)

【개인 정보】

  • [이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 [영문] 고르디안 1세(Gordian I)
  • [출생] 기원후 159년경, 피리기아
  • [사망] 기원후 238년 4월 12일, 카르타고
  • [재위 기간] 기원후 238년 3월 22일 ~ 4월 12일
  • [공동 황제] 고르디아누스 2세(Gordianus II)
  • [전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Maximinus Tracus, AD. c.173~238) : 로마 제국 제25대 황제(AD. 235~238)
  • [후임] 푸피에누스(Pupienus, AD. c.164~238) : 로마 제국 제27대 황제(AD. 238)
  • [후임] 발비누스(Balbinus, AD. c.178~238) : 로마 제국 제27대 황제(AD. 238)

【가족 관계】

  • [아버지] 마이키우스 마룰루스(Maecius Marullus) 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 [어머니] 울피아 고르디아나(Ulpia Gordiana) 또는 셈프로니아 로마나(Sempronia Romana)
  • [배우자] 파비아 오레스틸라(possibly Fabia Orestilla)
    • [아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 AC. c.192~238) : 로마 제국 제26대 공동황제 고르디아누스 2세(AD. 238)
    • [딸] 마에키아 파우스티나(Maecia Faustina)
      [배우자]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Junius Licinius Balbus)
      • [아들] 고르디아누스 3세(Gordianus III, 225~244)

【고르디아누스 1세의 생애】

 

【출생 및 가문】

  • 그는 기원후 159년경 소아시아의 프리기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이키우스 마룰루스(Maecius Marullus) 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로 추정된다. 그의 어머니 역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울피아 고르디아나(Ulpia Gordiana) 또는 셈프로니아 로마나(Sempronia Romana)로 추정된다.
  • 그의 아내는 아마도 파비아 오레스틸라(possibly Fabia Orestilla)로,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Gordianus II, c.192~238)와 딸 마에키아 파우스티나(Maecia Faustina)를 낳았다. 딸 마에키아 파우스티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유명한 에스파냐 태생의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원로원 의원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Junius Licinius Balbus)와 결혼하여 아들 고르디아누스 3세(Gordianus III, 225~244)를 낳았다.
  • 친가는 공화정 시대부터 명문으로 400년 동안 계속 원로원에 의석을 갖고 있는 집안이었고, 외가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고 역시 원로원의 단골 가문이었다.
  • 그는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의 치세 동안, 기원후 223년 이전에 보좌집정관을 지낸 후 제비뽑기를 통해 아프리카 총독직에 임명되었고, 237년에 공식적으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로마 기득권 층을 대표하는 인물】

  •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황제였던 5년 전부터 황제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취임한 고르디아누스는 그해에 여든 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3세기 로마 사회의 기득권층을 대표하고 있었다.
  • 기득권층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 재력에서도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동료들을 압도했다.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카일리우스 언덕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생가’는 오현제 시대에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고르디아누스의 부를 상징한 것은 로마 도심에서 동쪽으로 5km쯤 떨어진 교외에 서 있는 광대한 별장이었다.

【고르디아누스, 황제로 추대되다】

  • 막시미누스 황제 시기에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항의 운동이 발생하였다. 카르타고에서 세금을 징수하러 티스드루스(오늘날의 엘젬)에 파견된 황제 재무관에게 농장주들이 반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젊은 농장주들이 격분하여 몸싸움을 벌이다가 재무관을 죽여버렸다. 세금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항의가 공권력에 대한 봉기로 탈바꿈했다. 농장주들은 자신들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들을 무장시켜 그들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몰려갔다. 속주 총독에게 재무관의 가혹한 과세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고르디아누스 총독이 임지의 사정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농장주들이 총독에게, 당신을 황제로 추대할테니까 수락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 고르디아누스는 이 위험한 제의를 진심으로 거절했으며, 자신의 길고 무고했던 삶을 시민들의 피로 더럽히는 일 없이 평화롭게 끝내게 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는 협박에 못이겨 결국 황제 자리를 수락했는데, 사실 이것이 막시미누스의 질서와 잔인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폭군들의 논리에 따르면 황제로 추대될 만큼 존경받는 인물은 신중하게 반란을 도모한 것이며, 그러므로 처형당하는 것이 마땅했기 때문이다. 그가 황제직을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사실로 막시미누스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원로원이 고르디아누스를 황제로 승인하다】

  • 238년 6월 26일, 소집을 받고 원로원 회의장에 모인 의원들 앞에서 그해 집정관인 율리우스 실라누스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드디아누스가 보낸 편지를 낭독했다. ‘자신이 아프리카 속주의 젊은이들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원로원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내용이었다.
  • 트라키아의 남자(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혐오하고 있던 원로원은 구세주를 만난 듯 흥분하였다. 그들은 고르디아누스를 황제로 승인하였고, 그의 아들에게도 공동 황제의 지위를 주었으며,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다. 이튿날 아침 원로원의 통고문은 제국 전역으로 발송되었다.
  • 그러나 고르디아누스는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다양한 작업을 통해서(로마 시민을 회유하여) 원로원이 그를 황제로 승인하도록 술수를 부렸으며, 막시미누스의 근위대장을 암살하려고 자객까지 보냈다는 주장도 있다.

【황제 막시미누스, 로마로 진군할 것을 선언하다】

  • 이 소식을 들은 막시미누스는 원로원이 자신을 거부한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을 추대한 군대까지 거부한 것이라며 야만족과의 싸움은 일단 미루고 수도 로마를 향해 진군할 것을 선언하였다.
  • 특별히 238년을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는 ‘육황제의 해’로 언급하는데, 한해에 여섯 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시대로 로마 제국의 내전 상황을 말한다.

【고르디아누스 2세의 전사, 고르디아누스 1세의 자살】

  • 이때 고르디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된 아프리카 속주 서쪽에 ‘누미디아 속주’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제3아우구스타 군단이 있었다. 이 제3아우구스타 군단이 원로원이 고르디아누스 황제 옹립에 반발한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막시미누스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군대가 옹립한 황제를 원로원이 뒤집었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 카펠리아누스가 지휘하는 제3아우구스타 군단을 맞아 고르디아누스의 아들이 용감하게 싸웠지만 1천 명의 수비병으로 6천 명의 군단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비병은 흩어졌고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로원, 고르디아누스의 손자를 차기 황제로 옹립하다】

  •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당황했다. 그들은 푸비에누스와 발비누스 두 사람을 공동 황제로 옹립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수도를 향해 진격해오는 막시미누스를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도 로마에 살고 있던 고르디아누스의 손자에게 차기 황제의 칭호인 ‘카이사르’를 주었다. 그가 고르디아누스 3세이다.
  • 이후 로마를 향해 진격해 오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아퀼레이아 도시를 공격하다가 부하들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제국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소위 ‘육황제의 해’로 언급되는 내전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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