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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us Severus, AD. 145~211] 로마 제국 제20대 황제(AD. 193~211)
[*수호천사*]
2025. 6. 26.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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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us Severus, AD. 145~211] 로마 제국 제20대 황제(AD. 193~211)
【개인 정보】
- [이름]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Lucius Septimius Severus)
- [출생] 기원후 145년 4월 11일, 리비아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
- [사망] 기원후 211년 2월 4일, 브리타니아 에보라쿰(Eboracum)
- [통치] 기원후 193년 4월 9일 ~ 211년 2월 4일
- [공동 황제] 카라칼라 : 기원후 198년 ~ 211년
[공동 황제] 게타 : 기원후 209년 ~ 211년 - [전임 황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기원후 193년
- [후임 황제] 카라칼라(Caracalla, AD. 188~217) : 로마 제국 제21대 황제(AD. 211~217)
[후임 황제] 게타(Geta, AD. 189~211) : 로마 제국 제21대 황제(AD. 217)
【가족 관계】
- [아버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Publius Septimius Geta)
[어머니] 풀비아 피아(Fulvia Pia) - [형]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Publius Septimius Geta)
- [여동생] 셉티미아 옥타빌라(Septimia Octavilla)였다.
- [사촌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아페르(Publius Septimius Aper)와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Gaius Septimius Severus)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절에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 [외사촌]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로, 프라이토리안 총독(Praetorian Prefect)이자 집정관(Consul)을 지낸 인물이었다.
- [첫 번째 아내] 파키아 마르키아나(Paccia Marciana) : 175년경 결혼하였고 186년경 병사하였다.
- [두 번째 아내] 율리아 돔나(Julia Domna, c.160~217) : 187년 경 결혼하였다.
- [첫째 아들] 카라칼라(Caracalla, 188~217)는 출생 이름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Lucius Septimius Bassianus)였으며 세베루스의 뒤를 이어 제21대 로마 황제가 된다.
- [둘째 아들]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Publius Septimius Geta, 189~211)
【출생과 가문】
-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146년 4월 11일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랩티스 마그나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리비아에 있는 도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 세베루스는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공부하기 위해 18세에 고향을 떠났다. 5년쯤 수도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동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마르쿠스는 세베루스가 ‘명예로운 경력’을 거칠 수 있게 해주었다.
- 24세에 그는 회계감사관이 되었고, 26세에 에스파냐 남부 베티가 속주, 27세에 사르데냐 섬에 파견되어 근무했다. 그 이후 아프리카 속주의 카르타고에서 근무하였다.
- 176년, 30세가 된 세베루스는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 호민관 임기를 마친 그는 원로원 의석을 얻었다. 원로원에 들어간 이듬해에는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다. 32세 때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그는 에스파냐에 파견되어 군단 기지에서 근무하였다.
- 30대 초반의 나이에 삼촌과 사촌형의 소개 아래 동향 출신의 파카 마르키아나(Pacca Marciana)와 결혼했고, 사이에 두 딸을 얻었는데 두 딸 모두 요절했고 아내마저 186년경 병으로 잃었다.
- 그후 그는 시리아 속주에 주둔해 있는 제4 스키티카 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세베루스는 이곳에서 파르티아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나날을 2년쯤 보내었다.
【콤모두스 황제 시대】
- 황제가 콤모두스로 바뀐 지 세베루스는 젊은 황제의 호감을 사지 못해서 제국의 출세 코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사인으로 돌아간 세베루스는 아테네로 유학을 떠나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하였다.
- 41세가 되어 콤모두스 황제는 세베루스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세베루스는 거기에서 2년 동안 머물면서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상대는 시리아 제사장의 딸인 율리아 돔나였다. 둘 사이에 태어난 맏아들이 나중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카라칼라다.
- 갈리아에서 근무한 뒤, 세베루스는 시칠리아 섬의 총독으로 근무하였다가 44세 때인 190년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인 191년, 세베루스는 ‘전직 집정관’이라는 직함으로 ‘가까운 판노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3개 군단을 이끌고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193년, 로마를 접수하고 황제가 되다】
[로마를 접수하다]
- 192년 말에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되고, 페르티낙스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페르티낙스가 살해되고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는 움직였다. 그후 ‘일단 움직인 이상 끝까지 달린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 세베루스는 우선 브리타니아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공동으로 로마를 다스리자는 제안을 하고 군단병들을 빠르게 로마로 진군하여 수도 로마를 빠르게 접수하였다. 황제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근위대에게 살해당한 뒤었다.
[근위대를 해산하고 시민의 지지를 얻다]
- 세베루스는 근위병들을 해산시키고 자신의 군단병을 새롭게 근위병으로 승격시켰다. 그는 원로원에게 자신이 움직인 것은 나라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고, 페르티낙스의 원수를 갚은 것이며, 자신의 통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계승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갈리아에 있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취임하는 것을 승인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 그는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민중이 ‘안전’과 ‘식량’을 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심복인 데스트로스를 ‘수도 장관’에 임명하고 치안을 확보하고, 인구가 120만 명이라는 수도의 ‘식량’ 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식으로 밀을 앞으로 7년 동안 확보하라고 명령하였다.
【경쟁자를 제거하다】
[시리아 총독 니게르]
- 세베루스의 군사적 목표는 시리아 총독인 니게르였다. 그는 원로원에 니게르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는 근위대 가운데 1개 대대만 거느리고 니게르가 기다리고 있는 동방을 향해 떠났다. 그는 동방으로 가는 도중에 도나우 강 방위선을 지키는 군단기지를 돌면서 정예부대를 선발하여 수적 열세를 양적 우세로 대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베루스가 동방으로 향했을 때 알비누스는 공동 황제에 만족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 193년 말에 페린투스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에서는 니게르의 군대가 승리하였다. 이듬해인 194년 1월에 벌어진 두 번째 전투는 소아시아의 니카이아 근처 평원에서였는데 세베루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 후에 소아시아 전역이 세베루스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 니게르는 194년 10월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 시리아로 들어오려는 세베루스 군대를 맞아 이수스 평원에서 결전을 벌였다. 최종 승리는 세베루스에게 돌아갔다. 세베루스는 달아나는 니게르를 추격하였고, 니게르는 붙잡히기보다는 죽기를 바라고 스스로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살해되었다.
- 니게르를 죽인 뒤 세베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갔다. 이것은 니게르에게 호의적이었던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의 움직임을 미리 봉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후 1년 동안 세베루스는 제국 동방의 방위체제를 재편성한 뒤, 196년 여름에 안티오키아를 떠났다.
[리옹의 알비누스]
- 세베루스가 니게르에게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는 시점에 리옹의 알비누스는 자기가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3년이 지난 지금, 세베루스의 군사력은 갑절로 늘어난 반면 알비누스의 군사력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니게르의 패배와 함께 라인 강 방위선의 4개 군단이 알비누스의 진영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알비누스에게는 브리타니아의 3개 군단과 에스파냐의 1개군단만 남았다. 세베루스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197년 2월 19일 리옹 근처의 평원에서 세베루스의 부대와 알비누스의 부대가 전투를 벌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세베루스의 부대가 승리했고, 알비누스는 자결을 택했다.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의 주검을 말발굽으로 짓밟게 했다고 한다. 세베루스가 브리타니아의 3개 군단을 재편성한 뒤 수도 로마로 개선한 것은 197년 6월이었다. 유일한 승리자, 단독 황제가 되어 돌아온 그는 51세가 되어 있었다.
【단독 황제로 통치를 시작하다】
[콤모두스의 ‘기록말살형’을 철회하라]
- 세베루스는 193년 6월에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을 얻었지만 이후 경쟁자를 타도하는데 3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하였고 사실상의 그의 치세는 197년 6월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실제로 그가 193년에 원로원에서 한 연설과 197년에 한 연설은 말투도 다르고 내용도 달랐다.
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후계자다.
콤모두스가 살해된 이튿날 원로원이 콤모두스에게 내린 ‘기록말살형’을 철회하라.
세베루스가 콤모두스를 좋게 평가한 것은 아니다. 17년 전에 세베루스는 15살이나 아래인 콤모두스에게 박대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베루스가 콤모두스의 명예를 회복한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후계자를 자칭한 이상 그가 후계자로 삼은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형’의 낙인이 찍힌 상태로 방치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베루스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8세의 카라칼라를 ‘임페라토르 데시그나투스’(Imperator designatus, 황제 지명자)로 승인해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제위를 세습하겠다는 세베루스의 뜻을 알아차렸지만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세베루스는 26명의 원로원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이 알비누스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규탄했다. - 세베루스는 콜로세움과 대경기장에서 검투 시합과 전차 경주를 개최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공공사업의 하나로 ‘세베리아나 가도’ 공사를 시작하였다.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
- 그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전력이 군단병 개개인의 처우를 봉급 인상으로 개선하였고, 개개인의 능력이나 실적에 따라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정식 결혼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세베루스의 개혁은 로마 제국의 군사 정권화의 시초가 되었다. 병사들이 군대 생활에 전혀 불만을 갖지 않게 된 결과, 민간인이 되어 제2의 인생을 개척하려는 의욕이 줄어들었고, 그것이 로마 사회에서 군사 관계자를 격리시키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 군사 관계자가 로마 사회에서 격리되면, 자신이 속한 조직을 더욱 강화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고립화의 당연한 귀결이다. 구체적으로는 군사비 증액을 주장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국가 재정이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군대는 무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균형감각을 잃고 혼자 폭주하기 시작하면 쉽게 멈출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로마적인 전제군주]
- 역사가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대해서 ‘비로마적인 전제군주, 로마 제국의 군사 정권화로 방향키를 돌린 통치자’라고 평가한다.
- 비로마적이라는 말은 ‘오리엔트적’이라는 뜻이다. 이 비판에는 세베루스의 아내이자 로마 제국의 황후인 율리아 돔나가 시리아 제사장의 딸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율리아 돔나의 아버지는 태양을 숭배하는 종교의 제사장이었다.
- 율리아 돔나는 ‘퍼스트 레이디’가 된 후 가십을 좋아하고 음모를 좋아하는 상류층 부인들보다는 학자나 문인들에게 둘러싸이기를 좋아했다. 그런 방법으로 남편을 따라다니는 군사적 색채를 희석시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종교에 대한 평가]
- 로마 편에 선 역사가들은 세베루스의 아내가 태양신 숭배에 영향을 받아 일신교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비난한다.
- 기독교 편에 선 연구자들은, 치세의 전반에는 기독교도 공동체 결성을 인정하고 측근 가운데 기독교도가 있어도 신앙은 자유라면서 문제삼지 않았던 세베루스가 치세 후반기에는 과거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믿는 것은 자유지만 포교는 금지하는 태도를 취했다면서 콤모두스 시대의 평화를 그리워한다. 이런 세베루스의 태도가 달라지자 속주 총독의 태도도 달라져서, 특히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공식 견해는 로마에 반대하지 않는 한 신앙은 자유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포교를 금지한 것은 기독교도의 전도 방식이 로마인의 사고방식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동방 원정, 그리고 그 결과]
- 199년 그는 다시 동방 원정을 떠났다. 쳐들어왔으니까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쳐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미리 공격한다는 느낌을 주는 전쟁이었다. 이번 파르티아 원정은 서방 군단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동방 군단만으로 추진하였다.
- 파르티아는 무려 300년 동안이나 로마의 가상 적국 제1호였다. 지금까지 오랜 경험으로 보아 로마와 파르티아는 상대를 공격할 힘은 있지만 계속 점령할 힘은 없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로마와 파르티아는 오랫동안 서로 타협점을 찾아내는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 그런 파르티아가 이제 페르시아 세력에 밀려 존망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의 몰락으로 이어질 만한 일은 일절 해서는 안되었는데 세베루스는 그 선을 넘은 것이다. 파르티아 왕국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교체된 것은 세베루스가 죽은 지 15년이 지나서였다. 세베루스는 파르티아 내부에서 신흥 세력이 대두하는 것을 본의 아니게 도와준 것이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 오리엔트는 이제 가사 적국이 아니라 진짜 적국이 되어버린다.
- 세베루스는 티그리스 강변가지 쳐들어간 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펼쳐져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하고 서쪽으로 돌아왔다. 원로원 의원들도 일반 시민들도 이 승전보에 열광하여 개선문을 건립하였다.
[개선 이후]
- 성년식은 이미 치렀지만 아직 열네 살인 카라칼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신부는 황제가 없는 로마에서 막강한 세력을 휘두른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이었다. 카라칼라의 장인인 이 근위대장은 세베루스와 동년배 친구였고, 같은 북아프리카 출신이었다.
- 세베루스는 둘째 아들 게타와 이 근위대장을 이듬해인 203년도 집정관으로 취임시켰다. 게타도 그해에 겨우 열네 살이었다.
- 세베루스는 204년부터 205년까지 틈틈이 고향 렙티스 마그나를 찾았다. 세베루스는 고향의 개조 공사를 추진하였다.
[권력의 균열]
- 205년 제1의 제위계승자인 카라칼라와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 사이에 생긴 불화가 표면화되었다. 아내 플라우틸라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도 장인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을 것이다. 황제와 황후는 둘 사이에서 누구 편을 들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이었다.
- 이 불화에는 카라칼라의 동생 게타가 있었다. 205년 1월 1일, 17세의 카라칼라와 16세의 게타가 공동으로 집정관에 취임했다. 1월 22일, 근위대장 플라우티우스의 말에 카라칼라의 분노가 폭발했다. 17세의 ‘황제 지명자’는 아버지의 면전에서 허리에 찬 칼을 빼어 플라우티아누스를 찔러 죽였다. 다음날 원로원에서 카라칼라는 플라우틸라가 황제 일가족을 죽이고 제위에 오르려 했다고 비난했다. 카라칼라가 아내와 처남의 유배지로 결정한 곳은 시칠리아 섬 근처에 있는 리파리 섬이었다. 이곳에 유배된 남매는 6년 뒤 카라칼라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그가 보낸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브리타니아 원정과 죽음】
- 60대 노인이 된 세베루스는 통풍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세베루스는 병든 몸을 스스로 바로 잡기라도 하려는 듯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 브리타니아에서 성벽을 넘어 쳐들어온 브리간테스가 약탈하고 군단병을 포로로 잡아가자 브리타니아 총독은 돈을 주고 그들을 구출했다. 로마의 속주 총독이 도적의 협박에 굴복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세베루스가 원정을 단행한 것이다.
- 세베루스는 208년 원정을 준비하였고, 209년 봄이 오기를 기다려 황후와 두 아들을 데리고 수도 로마를 떠났다. 본격적인 전쟁은 210년 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앞장서서 병사들을 지휘한 것은 카라칼라였다. 동생 게타는 론디니움(오늘날의 런던)에 머물러 있었다. 세베루스도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세베루스는 에부라쿰(오늘날의 요크)에 머물렀다.
세베루스의 마음은 우울했다. 칼레도니아 전역을 재패하려면 치밀하면서도 적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전략이 필요한데, 22세의 카라칼라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다. 나이가 젊어서라기보다 결국 군사적 재능이 문제였다. - 해가 바뀐 211년 2월 4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에부라쿰에서 숨을 거두었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의하면, 세베루스는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형제가 서로 아끼면서 사이좋게 나라를 다스려라. 병사들을 우대하고, 그것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말한 세베루스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나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원로원 의원도 했고, 변호사도 했다. 집정관도 했고, 대대장도 했다. 장군도 했다. 그리고 황제도 했다. 국가 요직은 모두 거쳤고, 임무를 충실히 해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이 다 헛된 것 같구나.” - 세베루스는 고향을 꿈꾸면서, 음산하고 춥고 온종일 비가 그치지 않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죽어갔다. 세베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어 두 번째로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황제였다.
【세베루스 사후】
- 세베루스가 죽은 직후, 새로 황제가 된 23세의 카라칼라는 재빨리 칼레도기아인과 강화를 맺고, 선제의 유골을 수도에 매장해야 한다면서 로마로 돌아가버렸다. 칼레도기아를 완전 재패하려는 계획도 이것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 세베루스가 죽은 지 1년 뒤인 212년 2월 12일,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는 예상된 참극이 일어났다. 어머니의 면전에서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칼로 찌른 것이다. 카라칼라는 로마에 있는 모든 ‘가족 초상화’에서 동생 얼굴만 지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 명령은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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