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자료실]/인물 [마]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 :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Miguel Hidalgo y Costilla)
[*수호천사*]
2025. 6. 21. 22:56
728x90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 :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Miguel Hidalgo y Costilla)
【출생에서 사제가 되기까지】
【1753년】
- 5월 8일 : 멕시코의 과나후야토(Guanajuato) 근처 헨티오스(Hentios) 마을에서 태어났다.
- 아버지 크리스토발 이달고 이 코스티야 에스피노자 데 로스 몬테로스(Cristóbal Hidalgo y Costilla Espinoza de los Monteros)와 어머니는 마리아 갈라가 만다르떼 비야세뇨르(Ana María Gallaga Mandarte Villaseñor)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 이달고는 태어난 지 8일 후, 쿠이체오 데 로스 나란호스의 본당교회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1765년】
- 이달고가 12살이 되었을 때 미초아칸 주 바야돌리드(현재의 모렐리아)로 보내져 예수회가 운영하는 산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대학(Colegio de San Francisco Javier)에서 형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1767년】
- 예수회가 멕시코에서 추방되자, 이달고는 산 니콜라스 대학(Colegio de San Nicolás)으로 진학하여 사제직을 준비하는 공부를 하였다.
【1771년】
- 사제가 되기 위해 과나후아토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773년】
- 바야돌리드의 예수회 대학인 산니콜라스 대학(현 미초아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학교에서 영리함으로 명성이 자자해 “엘 소로”(El Zorro,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을 담고 있는 저서를 읽고 연구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멕시코에서 가톨릭 교회에 의해 금지된 내용들이었다.
【독립을 위한 선언(돌로레스의 절규) 이전까지】
【1778년】
- 신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779년】
- 바야돌리드에 있는 산 니콜라스 오비스포 콜레지오(Colegio de San Nicolás Obispo) 대학에서 가르쳤다.
【1787년】
- 오비스포 대학의 재무관, 부총장, 비서로 임명되었다.
【1790년】
- 39세의 나이에 오비스포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1792년】
- 전통적인 교육 방법을 수정한 이유로, 그리고 일부 자금을 부정하게 처리한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그는 콜리마(Colima), 산 펠리페 토레스 모차스(San Felipe Torres Mochas)의 교구에서 일하게 되었다.
【1802년】
- 9월 19일에 형 호세 호아킨(José Joaquín)이 사망한 후, 돌로레스(Dolores), 과나후야토(Guanajuato)의 교구장 신부로 임명되었다.
-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전통적인 정치적, 종교적 관점에 도전하였다. 세속 신부로서 가난의 서약을 지킬 필요가 없었고, 정결의 서약에 반해 그는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자식을 낳았다. 그는 마누엘라 라모스 피차르도(Manuela Ramos Pichardo), 비비아나 루세로(Bibiana Lucero), 마리아 마누엘라 에레라(María Manuela Herrera), 호세파 킨타나(Josefa Quintana)라는 여성에게서 자녀를 낳았다 이러한 행동으로 종교재판소에 출두하지만 유죄판결은 받지 않았다.
【1803년】
- 이달고는 돌로레스에 정착한 후 대부분의 성직 업무를 그의 부제인 프란시스코 이글레시아스에게 맡기고, 상업, 지적 활동,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거의 전념하였다. 그는 많은 시간을 문학, 과학적 저서, 포도 재배, 그리고 누에 기르기에 대한 연구에 할애하였고, 그가 얻은 지식을 이용하여 그의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농촌 주민들을 위한 경제 활동을 촉진하였다. 그는 벽돌과 도자기를 만드는 공장을 설립하고, 토착민들에게 가죽 제작을 가르쳤으며, 양봉을 장려하였다. 그는 지역의 자연 자원을 활용하여 상업적 가치를 지닌 활동을 촉진하려 했는데, 그의 목표는 토착민과 메스티소들이 더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스페인에서 농업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상주의 정책을 위반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이달고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게 된다. 이러한 정책들과 혼혈 계층에 대한 착취는 이달고가 멕시코의 스페인 본국 출신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게 하였다.
【1807~1808년】
- 1807년과 1808년 사이의 가뭄은 돌로레스 지역에서 기근을 일으켰고, 스페인 상인들은 시장에 쌓아둔 곡식을 풀지 않고 가격 상승을 노리며 매점을 방해하였다. 이달고는 이러한 관행에 반대하여 활동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 한편, 1808년에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위를 찬탈한 후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책봉하자 중남미 식민지에서는 정통성을 문제삼아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런 권력의 공백은 1810년부터 라틴 아메리카에서 본격적인 독립 투쟁이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돌로레스의 절규”로 스페인 식민체제에 저항하다】
【1810년】
- 케레타로 지방의 비밀결사조직에 소속된 크리욜로(식민지 출신 백인)들은 1810년 12월 8일을 기해서 페르난도 7세의 이름 아래 멕시코의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이 누설되어 이 비밀결사 조직의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런 사실이 멕시코시티에서 북서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돌로레스라는 마을에도 전해졌다.
- 9월 16일, 그는 도르도 마을에서 독립을 위한 첫 발을 내딛으며, 그 유명한 “엘 그리토 데 도를로레스”(Grito de Dolores, 돌로레스의 절규)를 외친다. 그의 연설은 단순한 독립투쟁 참여만이 아니라 인종 평등과 토지 재분배 내용을 비롯해 노예제도의 폐지와 특정 생산품의 정부 독점 폐지 등을 담고 있었다. 이것으로써 이로써 멕시코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농민, 노동자 등과 함께 스페인 식민지 체제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 9월 21일, 이달고는 셀라야(Celaya)에 도착한 후 장군이자 최고 사령관으로 선포되었다. 이 시점에서 이달고의 군은 약 5,000명이었다. 그러나 규율 부족으로 반란군은 곧 강도질, 약탈, 마을을 파괴하고 포로들을 처형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1810년 9월 말, 산미겔을 함락한 직후부터 아옌데(Ignacio Allende, 1769~1811)와 이달고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아옌데는 자신의 칼날을 평평하게 사용해 반란군을 제지하려 했고, 이로 인해 이달고에게 꾸중을 듣게 되었다.
- 9월 28일, 이달고는 대부분 몽둥이, 돌, 마체테로 무장한 반란군과 함께 과나후아토(Guanajuato) 시에 도착하였다. 반란군은 이틀 만에 방어를 압도하고 약 400명에서 600명 사이의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아옌데는 이러한 사건에 강력히 항의했으며, 이달고는 그것들이 잔혹하다고 동의했지만, 또한 그러한 반응을 형성한 역사적 패턴을 이해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공격은 크리욜로(식민지 출신 백인)과 페니술라르(스페인 본토 출신)들이 반란군에 맞서 연합하게 만들었고, 이달고는 자유주의 크리욜로(식민지 출신 백인)들로부터 지지를 잃게 되었다.
- 10월 10일, 이달고는 1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과나후아토를 떠나 발라도리드(Valladolid)를 향해 출발하였다. 아캄바로(Acámbaro)에 도착했을 때, 그는 총사령관(Generalissimo)으로 임명되었고 “His Most Serene Highness”(가장 고귀한 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법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 10월 17일, 이달고와 그의 군은 거의 저항 없이 발라도리드를 점령하였다. 이곳에서 이달고는 펜인술라르(스페인 본토 출신)들을 상대로 한 선언을 발표했으며, 그들을 오만과 폭정으로 비난하고, 거의 300년 동안 아메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이달고는 전쟁의 목적이 “가추핀(스페인 본토 출신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탐욕과 폭정이 멕시코인들의 시간적, 영적 퇴보를 초래했다고 비난하였다. 이달고는 미초아칸(Michoacan)의 주교 지명자 마누엘 아바드 이 케이포(Manuel Abad y Queipo)에게 1810년 9월 24일 그가 자신에 대해 퍼뜨린 파문 명령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다. 이후, 이달고가 발라도리드를 점령하기 전인 1810년 10월 13일, 종교 재판소는 이달고를 반란자, 배교자, 이단자로 선언하는 파문 명령을 내렸다.
- 10월 19일, 이달고는 발라도리드를 떠나 멕시코 시티로 향하면서 대성당에서 400,000 페소를 빼앗아 경비를 마련하였다. 이달고와 그의 군은 미초아칸 주를 떠나 마라바티오(Maravatio), 익슬라와카(Ixtlahuaca), 톨루카(Toluca)의 마을들을 지나 몬테 데 라스 크루세스(Monte de las Cruces)의 숲이 우거진 산지에서 멈췄다. 여기서 반란군은 토르쿠아토 트루히요(Torcuato Trujillo)의 왕당파 군과 교전하였다. 이달고의 군은 왕당파 군을 퇴각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반란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 1810년 10월 30일 몬테 데 라스 크루세스 전투(Battle of Monte de las Cruces) 후, 이달고는 약 100,000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있었으며, 멕시코 시티를 공격할 전략적인 위치에 있었다. 숫자상으로 그의 군은 왕당파 군을 능가하였다. 멕시코 시티의 왕당파 정부는 부왕 프란시스코 베네가스(Francisco Javier Venegas)의 지도 하에 심리적 및 군사적 방어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바히오(Bajío) 지역에서의 반란군의 폭력을 광고하며, 반란군이 사회적 안정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이달고의 반란은 또한 멕시코 계곡의 정착된 토착민들과 카스타(혼혈 계층)들로부터 반대에 직면하였다.
- 이달고의 군은 현재 멕시코 시티의 쿠아히말파(Cuajimalpa) 구역까지 다가갔다. 아옌데는 계속해서 전진해 멕시코 시티를 공격하길 원했지만, 이달고는 이에 반대했다. 이달고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불분명하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는데, 그중 한 가지 설명은 이달고의 군이 훈련되지 않았고, 훈련된 군대와 맞붙을 때마다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멕시코 시티는 뉴 스페인에서 가장 훈련된 군인들이 수비하고 있었기에, 이달고는 멕시코 시티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향하기로 결심하였고, 그들은 톨루카(Toluca)와 익슬라와카(Ixtlahuaca)를 거쳐 과달라하라(Guadalajara)를 목표로 이동하였다.
- 방향을 전환한 후 많은 반란군이 탈영하였다. 톨루카 북쪽의 아쿨코(Aculco)에 도달했을 때, 이달고의 군은 40,0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뉴 스페인의 장군 펠릭스 칼레하(Felix Calleja)가 이달고의 군을 공격해 1810년 11월 7일 그들을 물리쳤다. 아옌데는 과달라하라 대신 과나후아토(Guanajuato)로 군을 이끌기로 결정하였다.
- 이달고는 11월 26일, 7,000명 이상의 무장 미비한 군을 이끌고 과달라하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과달라하라를 점령하고 하층민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는 이달고가 노예제도, 세금, 술과 담배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 이달고는 과달라하라에서 대체 정부를 수립하고 자신을 수장으로 임명하며 두 명의 장관을 임명하였다. 1810년 12월 6일, 이달고는 노예제를 폐지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사형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또한 원주민들이 크리올과 페니술라르 귀족에게 지불해야 했던 세금도 폐지하였다. 이달고는 “데스페르타도르 아메리카노(미국의 깨어남)”라는 신문을 발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는 파스카시오 오르티스 데 레토나(Pascacio Ortiz de Letona)를 반란 정부의 대표로 임명하고 미국으로 보내 지원을 요청하게 했으나, 오르티스 데 레토나는 스페인 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이 시기 동안, 과달라하라에서 반란군의 폭력이 심화되었다. 왕당파 정부에 충성하는 시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무차별적인 약탈은 피했으나, 반란군은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크리올과 스페인 사람들의 재산을 목표로 삼았다. 그 동안, 왕당파 군은 과나후아토를 재탈환하였고, 아옌데가 과달라하라로 도망쳐왔다. 아옌데가 도시로 도착한 후, 그는 다시 한 번 반란군의 폭력에 대해 이달고에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달고는 왕당파 군이 과달라하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 과나후아토가 왕당파 군에 의해 재탈환된 후, 1810년 12월 24일, 마누엘 아바드 이 케이포(Manuel Abad y Queipo) 주교는 이달고와 그를 따르거나 도운 사람들에게 파문을 내렸다. 아바드 이 케이포는 원래 이달고의 친구였으나, 이달고의 전술과 그로 인한 혼란, 주장된 “신성모독”과 신부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종교 재판소는 이달고에 대한 칙령을 발표하며 그를 다음과 같은 죄로 고발하였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죄를 벌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고, 성경의 진위에 의문을 제기하며, 교황과 교회 정부를 비난하고,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용하며,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을 부인하고, 지옥이 없다고 설교하며, 성찬에 관한 루터교 교리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달고는 자신이 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응답하였다.
【“내가 죽을지라도, 나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1811년】
- 왕당파 군은 1811년 1월, 약 6,000명의 군을 이끌고 과달라하라로 진격하였다. 아옌데(Allende)와 아바소로(Abasolo)는 도시에서 군을 집결시키고, 만약 패배할 경우 탈출 경로를 계획하려 했으나, 이달고는 이를 거부하고 과달라하라 외곽의 칼데론 다리(Puente de Calderón)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달고는 80,000에서 100,000명의 군과 95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훈련된 왕당파 군에 의해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이달고는 아과스칼리엔테스(Aguascalientes)로 도망쳐야 했다.
- 1811년 1월 25일, 아과스칼리엔테스 근처의 파벨론 농장에서, 아옌데와 다른 반란군 지도자들은 이달고에게 군사 지휘권을 빼앗고 그들의 패배를 이달고의 탓으로 돌렸다. 이달고는 정치적 지도자로 남았지만, 군사 지휘권은 아옌데에게 넘어갔다.
- 반란군은 미국과의 지원 연결을 목표로 사카테카스(Zacatecas)와 살티요(Saltillo)로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얼마 후, 그들은 배신당해 1811년 3월 21일, 바한의 우물(Norias de Baján, 노리아스 데 바한)에서 왕당파 이그나시오 엘리존도(Ignacio Elizondo)에게 포로로 잡혀 치와와(Chihuahua)로 끌려갔다.
- 이달고는 두랑고(Durango)로 넘겨졌고, 거기서 프란시스코 가브리엘 데 올리바레스(Gabriel de Olivares) 주교에 의해 1811년 7월 27일 공식적으로 면직되고 파문되었다. 이후 그는 군사 법정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고문을 당했는데, 사제 서품 당시 받은 성유의 흔적을 상징적으로 지우기 위해 손바닥의 피부를 벗겨내었다. 그 후 그는 처형되었고,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바에 따르면 7월 30일 아침 총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다.
- 처형 직전, 그는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준 두 명의 감시 병사인 오르테가(Ortega)와 멜초르(Melchor)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처형 당시 이달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을지라도, 나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너희는 곧 잊혀질 것이다.”(Though I may die, I shall be remembered forever; you all will soon be forgotten.) - 그의 시신과 함께 아옌데, 알다마(Aldama), 호세 마리아노 히메네스(José Mariano Jiménez)의 시신도 참수되었고, 머리는 과나후아토의 알온디가 데 그라나디타스 네 모퉁이에 전시되었다. 이 머리들은 독립전쟁이 끝나는 10년 동안 반란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그대로 전시되었다.
- 이달고의 참수된 시신은 처음엔 감옥 밖에 전시되었다가, 치와와의 성 프란시스코(Church of St Francis) 교회에 매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1824년 멕시코시티로 이장되었다.
【1811년】
- 7월 30일 : 이달고는 처형되었으며, 독립 운동의 주역으로서의 이름은 후에 멕시코 독립의 상징적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 이달고의 죽음은 1812년까지 반란군 측에 정치적 공백을 초래하였다. 왕당파 군 사령관 펠릭스 칼레하 장군은 반란군을 계속 추격하였다. 반란군의 전투는 점차 게릴라전으로 변화하였고, 결국 이달고와 함께 반란 운동을 이끌었던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페레스 이 파본이 다음 주요 지도자가 되어 반란군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모렐로스 또한 1815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
- 이달고의 죽음 이후에도 독립 운동은 계속되었으며,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 등 다른 지도자들이 그의 이념을 이어갔다. 결국, 1821년 9월 27일 멕시코는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하였다.
-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는 ‘아버지’라는 단어의 세 가지 의미에서 모두 해당되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적 아버지, 성직자 서약을 어기고 혼외 자녀를 둔 생물학적 아버지, 그리고 조국의 아버지였다.
- 그는 종종 국부(國父)로 불리지만, 실제로 1821년에 멕시코의 첫 국가원수가 된 사람은 이달고가 아닌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였다. 멕시코가 독립을 얻은 직후, 독립기념일은 이달고가 “그리토 데 돌로레스(Grito de Dolores)”를 외친 9월 16일과, 이투르비데의 군대가 멕시코시티를 점령해 독립 전쟁을 끝낸 9월 27일 중 어느 날로 기념할지를 두고 혼란이 있었다.
이후 정치적 움직임들은 보수적인 이투르비데보다 더 자유주의적 성향의 이달고를 선호하게 되었고, 1810년 9월 16일이 공식적으로 멕시코 독립기념일로 인정되었다. 그 이유는 이달고가 “멕시코 독립 전쟁의 다른 모든 영웅들의 선구자이자 창조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이달고의 유해는 멕시코시티의 독립의 천사 기념탑(Angel of Independence) 안에 안치되어 있다. 그 옆에는 멕시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등불이 밝혀져 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