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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넬리오 [Cornelius, AD. ?~253] 제21대 교황(AD. 251~253)
[*수호천사*]
2025. 6. 24.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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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넬리오 [Cornelius, AD. ?~253] 제21대 교황(AD. 251~253)
【개인 정보】
- 이름 : 고르넬리오, 코르넬리우스
- 라틴어 : Cornelius
- 이탈리아어 : Cornelio
- 그리스어 : Κορνήλιος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253년 6월
【제21대 로마 교황】
- 시작 : 기원후 251년 3/4월
- 종료 : 기원후 253년 6월
- 전임자 : 파비아노 [Fabianus, AD. 178~250] 제20대 로마 교황(AD. 236~250)
- 후임자 : 루치오 1세 [Lucius I, AD. ?~254] 제22대 로마 교황(AD. 253~254)
- 축일 : 9월 16일
【교황 고르넬리오】
【박해와 배교의 시대】
- 고르넬리오 시대는 박해의 시대에서 파생된 배교의 시대였고, 배교의 시대는 교회 분열의 시대로 안내하였다.
- 데키우스 황제는 249년부터 251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하였는데,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비교적 간헐적이고 지역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250년 1월부터는 모든 시민에게 종교적인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하며, 이를 거부하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선언을 하였다. 이로 인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순교했으며, 그 중에는 250년 1월 20일 교황 파비안도 포함되었다. 반면, 일부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제사에 참여하였다.
【분열의 시대】
- 박해 후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등장하였다. 한쪽은 로마 교구의 사제 노바티안(Novatian)이 이끌었으며, 그는 박해 중에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은 회개하더라도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상 숭배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이며, 교회는 배교자들을 용서할 권한이 없고, 그들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께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고르넬리오와 카르타고의 키프리안(Cyprian)은 배교자들도 회개와 참회 과정을 거친 후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르넬리오, 제21대 교황으로 선출되다】
- 박해 중에는 교황의 후임자를 선출할 수 없었고, 교황좌는 1년 동안 공석이었다. 데키우스가 고트족의 침략에 맞서 로마를 떠난 후, 로마의 성직자들은 새로운 주교를 선출하였다. 14개월 동안 교황이 없었던 동안, 유력한 후보였던 모세(Moses)는 박해 중에 사망하였으며, 더 온건한 성향의 고르넬리오가 마지못해 251년 3월 제21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대립교황, 노바티안】
- 그러나 더 엄격한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노바티안(Novatian)을 주교로 서품하고, 고르넬리오를 로마의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양측은 서로 다른 교회 주교들에게 자신을 인정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고르넬리오는 키프리안(Cyprian), 디오니시우스(Dionysius, 제25대 교황) 그리고 대부분의 아프리카와 동방 교회 주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반면 노바티안(Novatian, 노바티아누스)은 로마에서 소수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지지를 받았다.
【고르넬리오, 노바티안을 파문하다】
- 고르넬리오의 다음 행동은 60명의 주교 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이 합법적인 교황임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노바티안(Novatian)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파문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동안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이 참회한 후에 기독교 공동체로 재입교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 이 회의의 결과가 기독교의 주교들에게 보내졌는데, 특히 노바티안(Novatian)을 강력히 지지하는 안티오키아의 주교를 설득하여 고르넬리오를 로마의 교황으로 인정하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한편 이 편지는 당시에 로마 교회의 규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고르넬리오는 서신에서 로마 교회에 대해 사제 46명, 부제 7명, 차부제 7명, 시종직 42명, 수문직 52명 및 1,500명 이상의 과부와 약 5만 명 이상의 신자로 구성된 공동체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수치를 바탕으로, 교황 고르넬리오의 교황 재임 기간 동안 로마에는 최소 50,00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개된 박해, 추방, 순교】
-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후임자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래에서 박해가 재개되었다. 고르넬리오는 이탈리아의 센툼첼라이로 추방되었고, 253년 6월에 사망하였다. 그는 교황들의 예배당 근처의 카타콤에 묻혔으며, 그곳에는 그의 선임인 교황 파비아노와 후임 교황 루치오 1세와는 달리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고르넬리오 순교자(Cornelius Martyr)”라고 번역되고 있다.
- 고르넬리오가 추방 중에 보낸 편지들은 당시의 구어체 라틴어로 쓰여 있었으며, 이는 키프리안과 같은 교육을 받은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사용한 고전적인 라틴어 스타일과는 달랐다. 이는 고르넬리오가 경제적으로 평균적인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에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 편지에서는 교회에서 처음으로 “구마자”(Exorcist)라는 직책이 언급되기도 했다.
【존경과 숭배】
- 카르낙(Carnac)에서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그곳의 돌들은 한때 고르넬리오를 쫓던 이교도의 군인들이었으며, 고르넬리오가 그들을 피하려고 도망치다가 그들을 돌로 변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 중세 동안 일부 고르넬리오의 유물을 독일로 가져갔으며, 그의 머리는 아헨 근처의 코르넬리문스터((Kornelimünster) 수도원에 보관되고 있다. 라인란트 지역에서는 그가 연인의 수호성인으로도 숭배되었다.
- 고르넬리오의 성스러운 이름은 “전투의 나팔”(battle horn)을 의미하며, 그는 아이콘에서 소의 뿔을 들고 있거나 소가 옆에 있는 교황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 그는 귀통증, 간질, 열, 경련 등을 치유하는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축,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 귀통증을 겪는 사람들, 간질 환자들, 그리고 그의 머리가 모셔진 독일 코르넬리문스터(Kornelimünster) 마을의 수호성인으로도 숭배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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