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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 [聖德王, AD. 691~737] 신라 제33대 국왕(AD. 702~737년)

[*수호천사*] 2025. 6. 2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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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 [聖德王, AD. 691~737] 신라 제33대 국왕(AD. 702~737년)


【개인 정보】

  • 이름 : 김흥광(金興光), 김융기(金隆基)
  • 출생 : 691년 – 효소왕이 사망 당시 삼국사기 기록이 맞다고 가정하고 성덕왕의 즉위 당시 나이를 12세로 보는 학계에서는 691년생으로 본다.
    사망 : 기원후 737년 2월(음력)
    재위 : 기원후 702년 7월(음력) ~ 기원후 737년 2월(음력)
  • 전임 : 효소왕(孝昭王)
    후임 : 효성왕(孝成王)

【가계 정보】

  • 조부 : 문무왕(文武王, 626~681 재위: 661~681) – 신라 제30대 왕
    조모 :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 ?~681)
  • 외조부 : 김흠운(金歆運, ?~655)
    외조모 : 요석공주(瑤石公主)
  • 아버지 : 신문왕(神文王, 653?~692, 재위 : 681~692) – 신라 제31대 왕
    어머니 : 신목왕후 김씨
  • 형 : 효소왕(孝昭王, 687~702 재위 : 692~702)
    동생 : 김근질(金根質)
    동생 : 김사종(金詞宗)
  • 왕비 : 성정왕후(成貞王后 金氏) – 승부령(乘府令) 소판(蘇判) 김원태(金元太)의 딸, 엄정왕후(嚴貞王后)라고도 한다. 3년(704년) 여름 5월에 입궁했다가 15년(716년) 3월에 출궁. 채색비단 5백 필과 밭 2백 결(結), 조(租) 1만 섬을 받았으며,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사들여 궁밖에서의 거처로 내려 주었다.
    • 딸 : 사소부인 – 이찬 김효방(金孝芳)에게 출가.
      외손 : 선덕왕
    • 아들 : 김중경(金重慶) – 태자였으나, 16년(717년) 사망. 시호는 효상태자(孝殤太子)
    • 아들 : 김수충(金守忠) – 721년 불교에 귀의.
  • 왕비 : 소덕왕후 김씨(炤德王后 金氏) (점물왕후) –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19년(720년) 3월에 납비(納妃). 23년(724년)에 사망.
    • 아들 : 효성왕(승경 承慶) – 신라 제34대 왕
    • 아들 : 경덕왕(헌영 憲英) – 신라 제35대 왕
      며느리 : 경수왕후 김씨 (만월부인)
      손자 : 혜공왕 – 신라 제36대 왕

【성덕왕 연보】

 

【기원후 702년】 성덕왕 원년

  • 성덕왕(聖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본래 이름은 융기(隆基)였는데, 당나라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先天) 연간에 고친 것이다.[『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이고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웠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효소왕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그를 애도하기 위하여 이틀간 조회를 쉬었으며,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아울러 임금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형(효소왕)의 칭호인 장군도독(將軍都督)을 이어받게 하였다.
  • 9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 관리들에게 관작 한 급씩을 올려 주었으며, 여러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하였다.
  • 아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다.
  • 겨울 10월, 삽량주(歃良州)에서 도토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기원후 703년】 성덕왕 2년

  • 봄 정월,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냈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가을 7월, 영묘사(靈廟寺)에 불이 났다.
  • 서울에 홍수가 나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 중시 원훈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
  • 일본국 사신이 당도했는데, 모두 2백4명이었다.
  • 아찬 김사양(金思讓)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였다.

【기원후 704년】 성덕왕 3년

  • 봄 정월, 웅천주(熊川州)에서 금빛 영지를 바쳤다.
  • 3월, 당나라에 갔던 김사양(金思讓)이 돌아와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바쳤다.
  • 여름 5월, 승부령 소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기원후 705년】 성덕왕 4년

  • 봄 정월, 중시 원문이 죽었으므로 아찬 신정(信貞)을 중시로 삼았다.
  • 3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 가을 8월,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려주었다.
  • 9월,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겨울 10월, 동쪽 지방의 주와 군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유랑하였다. 임금이 사자를 보내 구제하였다.

【기원후 706년】 성덕왕 5년

  • 봄 정월, 이찬 인품(仁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 나라 안이 기근이 들었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 3월, 뭇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 여름 4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가을 8월, 중시 신정이 병이 들어 관직을 그만두었기에, 대아찬 문량(文良)을 중시로 삼았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이 해에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 겨울 10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1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기원후 707년】 성덕왕 6년

  • 봄 정월,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으므로 한 사람에게 하루 좁쌀 석 되 씩을 7월까지 나누어 주었다.
  • 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백성들에게 오곡 종자를 어려운 정도에 따라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다.
  • 겨울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기원후 708년】 성덕왕 7년

  • 봄 정월, 사벌주(沙伐州)에서 상서로운 식물을 바쳤다.
  • 2월, 지진이 났다.
  • 여름 4월, 진성(鎭星, 토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기원후 709년】 성덕왕 8년

  • 봄 3월, 청주(菁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가을 8월,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기원후 710년】 성덕왕 9년

  • 봄 정월, 천구성(天狗星)이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떨어졌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지진이 났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기원후 711년】 성덕왕 10년

  • 봄 3월, 눈이 많이 내렸다.
  • 여름 5월, 짐승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하였다.
  • 겨울 10월, 임금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살펴보았다.
  • 중시 문량이 죽었다.
  • 11월, 임금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기원후 712년】 성덕왕 11년

  • 봄 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3월,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 당나라에서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 임금의 이름을 고치라는 칙명을 내렸다.
  • 여름 4월, 임금이 온수(溫水)에 행차하였다.
  • 가을 8월, 김유신의 아내를 부인(夫人)으로 책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 섬을 주도록 하였다.

【기원후 713년】 성덕왕 12년

  • 12년(서기 713) 봄 2월,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하였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당 현종이 문루(門樓)에 나와 사신을 접견하였다.
  • 겨울 10월, 당나라에 갔던 사신 김정종(金貞宗)이 돌아왔다. 조서를 내려 임금을 표기장군특진행좌위위대장군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계림주자사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驃騎將軍特進行左威衛大將軍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雞林州刺史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하였다.
  • 겨울 10월, 중시 위문이 나이가 많아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기에 승낙하였다.
  • 12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개성(開城)을 쌓았다.

【기원후 714년】 성덕왕 13년

  • 봄 정월, 이찬 효정(孝貞)을 중시로 삼았다.
  • 2월, 상문사(詳文師)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쳐 표문을 쓰는 일을 맡게 하였다.
  •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어 그를 총애하고, 조당(朝堂, 조정)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 윤 2월, 급찬 박유(朴裕)를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인사를 드리니, 조산대부(朝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 여름, 가뭄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렸다.
  • 가을, 삽량주(歃良州) 산에서 도토리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 겨울 10월, 당나라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우리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조칙으로 재상과 4품 이상의 주요 관리들에게 참여하도록 하였다.

【기원후 715년】 성덕왕 14년

  • 봄 3월, 김풍후(金楓厚)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여름 4월, 청주(菁州)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
  • 5월,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 6월, 크게 가뭄이 들었다. 임금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의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가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더니, 곧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 가을 9월, 태백(太白, 금성)이 서자성(庶子星)을 가렸다.
  • 겨울 10월, 유성이 자미(紫微)성좌를 침범하였다.
  • 12월, 유성이 천창(天倉)으로부터 태미(太微)성좌로 들어갔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 왕자 중경(重慶)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기원후 716년】 성덕왕 15년

  • 봄 정월, 유성이 달을 범하여 달빛이 없어졌다.
  • 3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성정왕후(成貞王后)[혹은 엄정(嚴貞)이라고 한다.]를 궁에서 내보냈다. 채색 비단 5백 필과 밭 2백 결, 벼 1만 섬과 집 한 채를 주었다, 그 집은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사서 준 것이다.
  • 커다란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렸으며 숭례전(崇禮殿)이 무너졌다.
  • 당나라에 들어갔던 하정사(賀正使) 김풍후가 귀국하려 하니, 그에게 원외랑(員外郞)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 여름 6월, 가뭄이 들어서, 다시 거사 이효를 불러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왔다.
  •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기원후 717년】 성덕왕 16년

  • 봄 2월,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筭博士) 각각 1인씩을 두었다.
  • 3월, 새로 궁궐을 지었다.
  • 여름 4월, 지진이 났다.
  • 6월, 태자 중경이 죽었다,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
  • 가을 9월,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 수충(守忠)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공자)과 10철(十哲) 및 72제자(七十二弟子)의 초상화를 바쳤으므로 대학(大學)에 안치하였다.

【기원후 718년】 성덕왕 17년

  • 봄 정월, 중시 효정이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파진찬 사공(思恭)을 중시로 삼았다.
  • 2월, 임금이 서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며 위문하였는데, 나이 많은 이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몸소 위로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 3월, 지진이 났다.
  •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떨어졌다.
  • 처음으로 누각(漏刻)을 만들었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수중랑장(守中郞將)의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 겨울 10월, 유성이 묘(昴)성좌로부터 규(奎)성좌로 들어가고,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뒤따랐다. 천구성(天狗星)이 동북방에 떨어졌다.
  • 한산주(漢山州) 도독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

【기원후 719년】 성덕왕 18년

  •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 가을 9월, 금마군(金馬郡) 미륵사(彌勒寺)에 벼락이 떨어졌다.

【기원후 720년】 성덕왕 19년

  • 봄 정월, 지진이 났다.
  • 상대등 인품이 죽었기에, 대아찬 배부(裵賦)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 3월, 이찬 순원(順元)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
  • 여름 4월, 큰 비가 와서 산 13곳이 무너졌고, 우박이 떨어져 볏모가 상하였다.
  • 5월, 관리에게 명하여 해골을 땅에 묻게 하였다.
  • 완산주(完山州)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 6월, 왕비를 왕후로 책봉하였다.
  • 가을 7월, 웅천주(熊川州)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 메뚜기떼가 곡식을 해쳤다.
  • 중시 사공이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파진찬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았다.

【기원후 721년】 성덕왕 20년

  • 가을 7월, 하슬라(何瑟羅) 지방의 장정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 겨울, 눈이 내리지 않았다.

【기원후 722년】 성덕왕 21년

  • 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었기에 이찬 선종(宣宗)을 중시로 삼았다.
  • 2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 가을 8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주었다.
  • 겨울 10월, 대나마 김인일(金仁壹)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 모벌군(毛伐郡)에 성을 쌓아 일본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기원후 723년】 성덕왕 22년

  • 봄 3월,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쳤다. 한 명의 이름은 포정(抱貞)으로 아버지가 나마 천승(天承)이고, 또 한 명의 이름은 정완(貞菀)으로 아버지가 대사 충훈(忠訓)이다. 그들에게 의복, 그릇, 노비, 수레, 말 등을 주어 예를 갖추어 보냈더니, 당 현종(玄宗)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왕의 내종 자매로서 친척과 헤어져 고국을 떠났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도록 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후하게 선물을 주어 돌려보냈다.
  • 정완의 비석에는 ‘효성왕(孝成王) 6년 즉 천보(天寶) 원년(서기 742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라고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여름 4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과하마(果下馬) 한 필과 우황, 인삼, 머리 장식,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紬), 매를 아로새긴 방울, 바다표범 가죽, 금ㆍ은 등을 바쳤다. 아울러 글을 올려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바다 구석진 곳 먼 귀퉁이에 있어서, 본래부터 천주(泉州) 상인의 진귀한 보배도 없고 남만인(南蠻人)의 귀한 재화도 없어서, 감히 지방 토산물로 황제의 관청을 더럽히고 노둔한 말로 황제의 마구간을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동에서 흰 돼지를 바친 일과 같고, 초나라의 닭1)과 비슷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워서 떨리고 진땀이 흐를 뿐입니다.”
  • 지진이 났다.

【기원후 724년】 성덕왕 23년

  • 봄에 왕자 승경(承慶)을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웅천주에서 상서로운 식물을 바쳤다.
  • 2월, 김무훈(金武勳)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무훈이 돌아올 때 당 현종이 글을 보냈다.
    “경(卿)은 정삭(正朔)을 받들 때마다 궁궐에 조공하고, 가슴에 품은 뜻을 말함이 매우 가상하다. 또한 그대가 바친 여러 물건들을 받고 보니 모두가 푸른 바다를 건너고 거친 들판을 넘어 왔건만, 한결같이 정결하고 고와서 그대의 마음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그대에게 비단 두루마기와 금 띠 및 채색 비단과 흰 비단을 합하여 2천 필을 주어 정성스러운 예물에 답례하노니, 물건이 도착하거든 잘 받도록 하라.”
  • 겨울 1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소덕왕비(炤德王妃)가 죽었다.

【기원후 725년】 성덕왕 24년

  • 봄 정월,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 3월, 눈이 내렸다.
  • 여름 4월, 우박이 떨어졌다.
  • 중시 선종이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이찬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기원후 726년】 성덕왕 25년

  • 여름 4월, 김충신(金忠臣)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 5월, 임금의 아우인 김근질(金釿質)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그에게 낭장(郞將) 관작을 주어 돌려보냈다.

【기원후 727년】 성덕왕 26년

  • 봄 정월,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 여름 4월, 일길찬 위원(魏元)을 대아찬으로 삼고 급찬 대양(大讓)을 사찬으로 삼았다.
  • 겨울 12월,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하였다.
  • 상대등 배부가 늙어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기원후 728년】 성덕왕 27년

  • 가을 7월, 임금의 아우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아울러 글을 올려 자제들의 국학(國學) 입학을 청하니, 황제가 조칙으로 이를 허락하였으며, 김사종에게 과의(果毅)의 관작을 주고 남아서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 상대등 배부가 늙어 물러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이찬 사공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기원후 729년】 성덕왕 28년

  •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기원후 730년】 성덕왕 29년

  • 봄 2월, 왕족 지만(志滿)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고 작은 말 다섯 필, 개 한 마리, 금 2천 냥, 머리카락 80냥,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바쳤다. 당 현종이 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백 필, 자줏빛 두루마기, 비단 띠를 주고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 겨울 10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을 바치니, 당 현종이 사신들에게 선물을 직위에 따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기원후 731년】 성덕왕 30년

  • 봄 2월, 김지량(金志良)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니, 당 현종이 그에게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의 관작과 무늬없는 비단 60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또 조서를 내렸다.
    “우황과 금은 등의 물건을 보낸 것은 그대의 글을 보고 잘 알아보았다. 그대의 나라 해와 달이 경사스럽고 복되며, 삼한이 사이좋게 잘 지내니 오늘날 어질고 의로운 나라로 불리고, 대대로 훌륭하고 어진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장과 예악은 군자의 기풍을 드러내었고, 성의껏 받들고 충성을 지키며 왕의 도리를 다하니, 진실로 변방을 지키는 울타리요 충성과 의로움의 모범이니, 어찌 이역(異域) 오랑캐들의 문화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대는 의(義)를 사모함에 매우 근실하고 조정에 조회함을 더욱 정성스럽게 하여 산 넘고 물 건넘에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폐백과 보물을 바침에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으니, 우리 왕법을 지켜서 나라의 기록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 간곡한 정성을 돌아보니 깊이 가상한 일이다. 짐은 새벽마다 일어나 그대를 생각하고 밤에도 옷을 입은 채 어진 이를 기다렸다. 그대를 만나면 마음속을 털어놓으리라 생각하였고, 그대를 기다려 마음 속 품은 뜻을 나누고자 하였는데, 지금 사신이 와서 그대가 병 때문에 오라는 명을 받들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걱정이 더할 따름이다. 날씨가 점차 따스해지면 병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그대에게 무늬있는 채색비단 5백 필과 무늬없는 비단 2천5백 필을 드리니 잘 받기를 바란다.”
  • 여름 4월, 죄수들을 사면하고, 늙은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었다.
  • 일본국 병선 3백 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임금이 장수를 시켜 병사를 일으켜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
  • 가을 9월, 백관을 적문(的門)에 모이게 하여, 수레에 달린 쇠뇌 쏘는 것을 함께 관람하였다.

【기원후 732년】 성덕왕 31년

  • 겨울 12월, 각간 사공과 이찬 정종(貞宗)ㆍ윤충ㆍ사인(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기원후 733년】 성덕왕 32년

  • 가을 7월, 발해(渤海)와 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침범하였다.
  • 당 현종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임금에게 관작을 더해 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로 삼고 병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치도록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한 길이 넘게 내려 산길이 막히고 병사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도 없이 돌아왔다. 김사란은 본래 왕족이었는데, 앞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을 때 사람됨이 공손하고 예의가 있었으므로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외지로 나가는 사신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 겨울 12월, 임금의 조카 지렴(志廉)을 당나라에 보내 조회하고 은혜에 감사하였다. 이에 앞서 황제가 임금에게 흰 앵무새 암수 각 한 마리와 자주색 비단에 수를 놓은 두루마기와 금ㆍ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의 비단, 오색으로 물들인 비단 등 도합 3백여 단(段)을 주었다. 임금이 글을 올려 감사하였다.
    “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께서 법도에 따라 나라를 다스림에 문(文)은 성스럽고 무(武)는 신이하니, 운수가 천년 동안 왕성하고 만물의 상서로움을 이룩할 것입니다.
    바람과 구름이 가는 곳마다 모두 폐하의 지극한 덕(德)을 받게 되고, 해와 달이 비치는 곳마다 폐하의 깊은 은덕을 입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봉래(蓬萊, 봉래산)와 방호(方壺, 방장산)로 막혔으나 황제의 자애로움은 먼 데까지 닿았으며, 궁벽한 지방에서 대국을 바라보니 황제의 은택은 어두운 곳까지 뻗쳤습니다. 엎드려 조서를 읽고서 꿇어앉아 옥장식 함을 열어보니, 하늘의 비와 이슬을 머금은 듯하고, 오색의 봉황과 난새가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말할 줄 아는 영물인 앵무새는 흰 것과 푸른 것 둘이 신묘하게 어울려 혹은 장안(長安)의 노래를 부르고 혹은 황제의 은혜를 말하는 듯합니다. 비단의 다채로운 문양과 보물의 금은 장식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이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정성을 바친 공의 근원을 따지자면 사실 선조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이토록 커다란 은총을 내리어 말대의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시니, 충성은 티끌처럼 작은데 은혜는 태산 같이 무겁습니다. 저의 분수를 헤아려보니, 무엇으로 은혜를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조칙으로 지렴을 내전에서 대접하도록 하고 그에게 비단을 내려주었다.

【기원후 734년】 성덕왕 33년

  • 봄 정월, 백관들에게 교서를 내려,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아뢰고 대답하도록 하였다.
  •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 김충신(金忠信)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臣)이 받은 분부는 폐하의 신임표(節)를 가지고 본국에 가서 병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물리쳐 없애고, 일이 있으면 계속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제의 명을 받고부터 장차 목숨을 바치리라 맹세하였으나, 마침 저를 대신하러 온 김효방(金孝方)이 죽었기 때문에 제가 숙위로 계속 머물게 되었습니다.
    본국의 왕은 제가 오랫동안 황제를 모셨다 하여 종질(從姪)인 지렴을 보내어 저와 교대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이미 당도하였으니 저는 곧바로 돌아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전에 받은 황제의 명을 늘 생각하여 밤낮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폐하께서 앞서 명을 내려 본국왕 흥광(興光)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을 더하고 신임표를 주어 흉악한 잔당을 토벌하게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이 임하면 비록 먼 곳이라도 가까운 듯하여, 군주가 명을 내리면 신하는 감히 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오랑캐들은 이미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으리라 생각되나, 악을 제거하려면 근본을 다스려야 하고 법령을 펴는 데는 새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대를 내는 데는 정의가 세 번의 승리보다도 귀중한 것이고, 적을 풀어놓으면 후환이 여러 대에 끼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기회에 저에게 부사(副使)의 직책을 임시로 주시어 황제의 뜻을 먼 지역까지 거듭 선포하도록 하옵소서.
    그러면 이것이 어찌 황제의 위엄만을 떨칠 뿐이겠습니까? 병사들도 또한 기운을 내어 반드시 오랑캐의 소굴을 뒤엎어 거친 변방을 안정시킬 것이며, 마침내 작은 나라 신하인 저의 작은 정성이 국가의 커다란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신 등은 다시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고 승전보를 대궐에 바칠 것입니다. 터럭같이 작은 공적이나마 세워서 비와 이슬과 같은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감히 폐하께서 제 뜻을 생각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 여름 4월, 대신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니, 황제가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접견하고 위위소경(衛尉少卿)의 관작을 제수하고, 비색 난포(襴袍)와 평만은대(平漫銀帶) 및 명주 6십 필을 주었다. 이에 앞서서 임금의 조카 지렴을 보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고 작은 말 두 필, 개 세 마리, 금 5백 냥, 은 2십 냥, 베 6십 필, 우황 2십 냥, 인삼 2백 근, 머리카락 1백 냥, 바다표범 가죽 16장을 바쳤는데, 이때에 지렴에게도 홍려소경원외치(鴻臚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주었다.

【기원후 735년】 성덕왕 34년

  • 봄 정월, 형혹(熒惑, 화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 김의충(金義忠)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 2월,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나라에서 죽자, 광록소경(光祿少卿) 벼슬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돌아올 때 황제는 조칙을 내려 신라에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

【기원후 736년】 성덕왕 35년

  • 여름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고, 아울러 표(表)를 올려 사례하였다.
    “삼가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준다는 은혜로운 칙서를 받았습니다. 저는 바다의 먼 귀퉁이에 태어나 살면서 성스러운 황제의 교화를 입었습니다. 비록 충성된 마음을 먹기는 하였으나 나타낼 만한 공적은 없었으며, 충성과 정절로 일을 삼았으나 노력은 상을 받기에 부족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비와 이슬 같은 은덕을 베풀고, 해와 달처럼 밝은 조서를 내려, 저에게 땅을 주시어 고을이 넓어졌습니다. 드디어 땅을 개간할 기대를 갖게 되었고, 농사짓고 누에칠 장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칙의 뜻을 받들어 영화로운 은덕을 깊이 입었으니, 뼈가 부서지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 겨울 11월, 임금의 종제(從弟)인 대아찬 김상(金相)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는데, 도중에서 죽고 말았다. 황제가 그것을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보내 평양(平壤)과 우두(牛頭) 두 주(州)의 지세를 조사하게 하였다.
  • 개가 재성(在城) 누각에 올라가 사흘간 짖었다.

【기원후 737년】 성덕왕 36년

  • 봄 2월, 사찬 김포질(金抱質)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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