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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眞平王, AD. 567~632] 신라의 제26대 국왕(AD. 579~632)

[*수호천사*] 2025. 6. 2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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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眞平王, AD. 567~632] 신라의 제26대 국왕(AD. 579~632)


【개인 정보】

  • 이름 : 김백정(金伯淨)
  • 출생 : 기원후 567년 – 화랑세기에 의함
    사망 : 기원후 632년 1월
    재위 : 기원후 579년 7월 ~ 기원후 632년 1월
  • 전임 : 진지왕
    후임 : 선덕여왕

【가계 정보】

  • 아버지 : 동륜태자(銅輪太子, ?~572년)
    어머니 : 만호부인 김씨(萬呼太后 金氏, 생몰년미상)
  • 동생 : 김백반(金伯飯, 생몰년 미상)
  • 동생 : 김국반(金國飯, 생몰년 미상)
    조카 : 승만(勝曼, ?~654년) – 제28대 진덕여왕으로 즉위.
  • 이부여동생 : 만명부인(萬明夫人, 생몰년 미상)
  • 이부조카 : 김유신(金庾信, 595년~673년)
  • 왕비 : 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 金氏, 생몰년 미상) –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
    딸 : 덕만공주(德曼公主, ?~647년) – 제27대 선덕여왕으로 즉위.
    딸 : 천명공주(天明公主, 생몰년 미상) –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존되었다.
    – 외손 : 김춘추(金春秋, 604년~661년) – 제29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
    딸 : 선화공주(善花公主, 생몰년 미상)
  • 왕비 : 승만부인 손씨(僧滿夫人 孫氏, 생몰년 미상)
    딸 : 연화공주(姸花公主, 생몰년 미상)
  • 후궁 : 미실궁주(美室宮主, 546/548년 ~ 612년)
    딸 : 보화공주(寶花公主, 생몰년 미상)
  • 후궁 : 보량궁주 설씨(寶良宮主 薛氏, 생몰년 미상)
    아들 : 보로전군(寶路殿君, 생몰년 미상)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와 지소태후의 딸인 만호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동륜은 태자시절 사망하였고 어머니 만호부인은 작은 할아버지 숙흘종과 재혼하여 만명부인을 낳았다. 만명부인은 김서현과 혼인하여 김유신을 낳았으므로 진평왕은 김유신의 외숙부이다. 동생 국반의 딸인 승만이 선덕여왕 사후 진덕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진평왕은 왕비 마야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을 진평왕의 장녀로, 《삼국유사》에는 공주들의 서열에 관한 기록이 없다.

 

덕만공주는 진평왕 사후 성골 남성이 없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어 선덕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천명공주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결혼하여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낳았다.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의 왕비가 되었고, 천화공주는 《화랑세기》에만 등장한다.


【진평왕 연보】

 

【서기 579년】

  • 진평왕(眞平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백정(白淨)이며,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부인(萬呼夫人)으로 갈문왕 입종(立宗)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이다. 임금은 태어날 때부터 생김새가 기이했다. 체구가 장대하였으며, 뜻이 깊고 굳세었으며, 지혜가 밝고 통달하였다.
  • 원년(서기 579) 8월,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서기 580년】

  • 2년(서기 580) 봄 2월, 몸소 신궁에 제사 지냈다.
  •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으로 삼았다.

【서기 581년】

  • 3년(서기 581) 봄 정월, 처음으로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다. 그것은 지금의 이부(吏部)와 같다.

【서기 583년】

  • 5년(서기 583) 봄 정월, 처음으로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 각 1인을 두었다.

【서기 584년】

  • 6년(서기 584) 봄 2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
  • 3월, 조부령(調府令) 1인을 두어 세금과 부역을 관장하게 하였고, 승부령(乘府令) 1인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서기 585년】

  • 7년(서기 585) 봄 3월, 가뭄이 들자 임금이 정전(正殿)에 거처하기를 피하고, 평시보다 음식을 줄였으며, 남당(南堂)에 나아가 몸소 죄수의 사정을 살폈다.
  • 가을 7월, 고승 지명(智明)이 불법을 배우고자 진(陳)나라에 들어갔다.

【서기 586년】

  • 8년(서기 586) 봄 정월, 예부령(禮部令) 2인을 두었다.
  • 여름 5월, 우레와 벼락이 치고, 별이 비오듯이 떨어졌다.

【서기 587년】

  • 9년(서기 587) 가을 7월, 대세(大世)와 구칠(仇柒) 두 사람이 바다로 떠났다. 대세는 내물왕의 7세손이며 이찬 동대(冬臺)의 아들로, 자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었다. 그는 승려 담수(淡水)와 사귀던 어느 날 말하였다.
    “이 신라와 같은 산골에서 살다 일생을 마친다면, 연못 속의 물고기가 푸른 바다의 넓음을 모르고 새장의 새가 산림의 넉넉하고 한가함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오월(吳越)에 이르러 스승을 찾아 명산에서 도를 구하려 한다. 만약 범속한 인간에서 벗어나 신선을 배울 수 있다면, 넓다란 허공을 표표히 바람을 타고 날 터이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놀이요, 장한 광경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담수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세는 물러나와 다시 벗을 찾다가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구칠은 기개가 굳세고 절도가 뛰어났다. 그와 함께 남산의 절에 놀러 갔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니 나뭇잎이 떨어져 뜰에 고인 물에 떠다니는 것이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유람할 마음이 있다네. 지금 각자 나뭇잎 하나씩을 집어 그것을 배로 삼아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세.”
    조금 후에 대세의 잎이 앞섰다. 대세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먼저 가겠네!”
    구칠이 발끈하며 말하였다.
    “나 또한 남자인데 어찌 나만 못 가리오!”
    대세는 구칠이 함께 행동할 만한 사람임을 알고 자기의 뜻을 은근히 말하였다.
    구칠이 말하였다.
    “그것이 곧 내가 바라던 바일세.”
    마침내 서로 벗삼아 남해(南海)에서 배를 타고 떠나갔다. 그 후로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한다.

【서기 588년】

  • 10년(서기 588) 겨울 12월,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기에 이찬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서기 589년】

  • 11년(서기 589) 봄 3월,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불법을 배우러 진나라에 들어갔다.
  • 가을 7월,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긴 집이 3만 3백 6십호였으며, 죽은 이가 200여 명이었다. 임금이 사자를 보내 그들을 구제하였다.

【서기 591년】

  • 13년(서기 591) 봄 2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 가을 7월,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8백 5십 4보였다.

【서기 593년】

  • 15년(서기 593)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 보였고, 서형산성(西兄山城)은 둘레가 2천 보였다.

【서기 594년】

  • 16년(서기 594), 수(隋)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임금을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으로 임명하였다.

【서기 596년】

  • 18년(서기 596) 봄 3월, 고승 담육(曇育)이 불법을 배우러 수나라에 들어갔다.
  •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겨울 10월, 영흥사(永興寺)에 불이 났는데, 불길이 번져 가옥 3백5십 채를 태웠다. 임금이 몸소 가서 구제하였다.

【서기 597년】

  • 19년(서기 597), 삼랑사(三郞寺)를 완성하였다.

【서기 600년】

  • 22년(서기 600), 고승 원광(圓光)이 조빙사(朝聘使) 나마 제문(諸文)과 대사 횡천(橫川)을 따라 돌아왔다.

【서기 602년】

  • 24년(서기 602), 대나마 상군(上軍)을 수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가을 8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에 쳐들어왔다. 임금이 장수와 졸병들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여 크게 쳐부수었으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 9월, 고승 지명이 입조사(入朝使) 상군을 따라 돌아왔다. 임금이 지명의 계행(戒行)을 존경하여 대덕(大德)으로 삼았다.

【서기 603년】

  • 25년(서기 603) 가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였다. 임금이 몸소 병사 1만을 이끌고 그들을 물리쳤다.

【서기 604년】

  • 26년(서기 604) 가을 7월, 사신으로 대나마 만세(萬世)와 혜문(惠文) 등을 보내 수나라에 조공하였다.
  • 남천주(南川州)를 없애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서기 605년】

  • 27년(서기 605) 봄 3월, 고승 담육이 입조사 혜문을 따라 돌아왔다.
  • 가을 8월, 병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하였다.

【서기 608년】

  • 30년(서기 608), 임금이 고구려가 자주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염려하여 수나라에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려 하였다. 원광에게 명하여 군사를 청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원광이 말하였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다른 이를 멸하는 것은 승려에 걸맞는 행동이 아닙니다만, 저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곧 글을 지어서 올렸다.
  • 2월, 고구려가 북쪽 변방을 침범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 4월,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서기 609년】

  • 31년(서기 609) 봄 정월, 모지악(毛只嶽) 아래의 땅이 불에 탔다. 불탄 넓이가 4보, 길이가 8보였으며 깊이가 5척이었다. 10월 15일에 이르러 꺼졌다.

【서기 611년】

  • 33년(서기 611), 임금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청하는 글을 올리니, 수 양제(煬帝)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병사를 움직인 일에 관해서는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다.
  •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가잠성(椵岑城)을 백일간 포위하였다. 현령 찬덕(讚德)이 굳게 지켰으나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으며, 성은 함락되었다.

【서기 613년】

  • 35년(서기 613) 봄, 가뭄이 들었다.
  •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 가을 7월,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원광 등의 법사(法師)를 맞아들여 불경을 설법하게 하였다.

【서기 614년】

  • 36년(서기 614) 봄 2월, 사벌주(沙伐州)를 없애고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여, 일길찬 일부(日夫)를 군주로 삼았다.
  • 영흥사(永興寺)의 흙으로 만든 불상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안 있어 진흥왕의 왕비였던 비구니(比丘尼)가 죽었다.

【서기 615년】

  • 37년(서기 615) 봄 2월, 큰 잔치를 3일 동안 베풀었다.
  •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서기 616년】

  • 38년(서기 616)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에 쳐들어왔다.

【서기 618년】

  • 40년(서기 618), 북한산주의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고자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다. 해론(奚論)이 종군하여 적과 마주쳐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서기 621년】

  • 43년(서기 621) 가을 7월, 임금이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 당 고조(高祖)가 직접 사신을 위문하고,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유문소(庾文素)를 보내 예방하고 조서와 그림, 병풍 및 채색비단 3백 단을 내려주었다.

【서기 622년】

  • 44년(서기 622) 봄 정월, 임금이 몸소 황룡사에 행차하였다.
  • 2월,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內省)의 사신(私臣)으로 삼았다. 일찍이 즉위 7년에 대궁(大宮)ㆍ양궁(梁宮)ㆍ사량궁(沙梁宮)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한 사람을 두어 세 궁(宮)의 업무를 겸하여 관장하도록 한 것이다.

【서기 623년】

  • 45년(서기 623) 봄 정월, 병부(兵部)에 대감(大監) 2인을 두었다.
  • 겨울 10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습격하였다.

【서기 624년】

  • 46년(서기 624) 봄 정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인을 두고, 상사서(賞賜署)에 대정(大正) 1인, 대도서(大道署)에 대정 1인을 두었다.
  • 3월,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임금을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 겨울 10월, 백제 병사가 쳐들어와 우리의 속함(速含)ㆍ앵잠(櫻岑)ㆍ기잠(歧暫)ㆍ봉잠(烽岑)ㆍ기현(旗縣)ㆍ혈책(穴柵) 등 여섯 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세 성은 함락되거나 혹은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訥催)는 봉잠ㆍ앵잠ㆍ기현 세 성의 병사를 합하여 굳게 지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서기 625년】

  • 47년(서기 625) 겨울 11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고구려가 길을 막고서 조공하지 못하게 하며 또 자주 침입한다고 호소하였다.

【서기 626년】

  • 48년(서기 626)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당 고조가 주자사(朱子奢)를 통해 조칙을 보내 고구려와 서로 화친하기를 권하였다.
  • 8월,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했는데, 성주인 동소(東所)가 막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 고허성(高墟城)을 쌓았다

【서기 627년】

  • 49년(서기 627) 봄 3월,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리는 날이 닷새나 계속되었다.
  • 여름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가을 7월, 백제의 장군 사걸(沙乞)이 서쪽 변방의 성 두 곳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 겨울 11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서기 628년】

  • 50년(서기 628) 봄 2월,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임금이 병사를 내어 쳐부수었다.
  • 여름, 크게 가뭄이 들었으므로 시장을 옮기고 용 그림을 그려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 가을과 겨울, 백성들이 굶주려서 자녀를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기 629년】

  • 51년(서기 629) 가을 8월,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가 매우 강성하여 우리 병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싸울 생각을 못했다.
    유신이 말하였다.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들었다, 내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노라!”
    그리고는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향하여 곧바로 나아갔다. 적진에 세 번 들어갔다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의 목을 베거나 군기를 뽑았다.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여 5천여 명을 목 베어 죽이니, 낭비성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서기 630년】

  • 52년(서기 630), 대궐 뜰의 땅이 갈라졌다.

【서기 631년】

  • 53년(서기 631) 봄 2월, 흰 개가 궁궐의 담장에 올라갔다.
  • 여름 5월,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쪽 시장에서 목 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으나, 처와 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총산(叢山)까지 돌아오다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쳤다. 위징(魏徵)이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자 황제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저 임읍(林邑)에서 바친 앵무새도 오히려 추위의 괴로움을 말하면서 자기 나라에 돌아가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친척과 멀리 이별하고 온 두 여자는 어떠하리오!”
    곧바로 사신에게 맡기어 돌려보냈다.
  • 흰 무지개가 궁궐 우물에 들어가고, 토성(土星)이 달을 범하였다.

【서기 632년】

  • 54년(서기 632) 봄 정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 지냈다. 당 태종이 조칙을 내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의(賻儀)로 비단 2백 필을 주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 임진(서기 632) 정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 와 자치통감(資治通鑑) 에는 모두 ‘정관 5년 신묘(서기 631)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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