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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神⽂王, AD. 665~692] 신라의 제31대 국왕(AD. 681~692)
[*수호천사*]
2025. 6. 26.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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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神⽂王, AD. 665~692] 신라의 제31대 국왕(AD. 681~692)
【개인 정보】
- 이름 : 김정명(金政明)
자(字) : 일초(日怊), 일소(日炤) - 출생 : 기원후 665년 8월(음력)
사망 : 기원후 692년 7월 2일(음력)
재위 : 기원후 681년 7월 7일(음력) ~ 692년 7월 2일(음력) - 전임 : 문무왕
후임 : 효소왕
【가계 정보】
- 조부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3~661년)
조모 : 문명왕후(文明王后) - 부왕 : 문무왕(文武王, 626~681년, 재위 : 661~681년)
모후 :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 ?~681년) - 왕비 : 폐비 김씨(廢妃 金氏) – 소판 김흠돌(金欽突)의 딸. 681년 폐위되었다.
- 왕비 : 신목왕후 김씨(神穆王后 金氏, ?~700년 6월 1일) – 일길찬 김흠운(金欽運)과 요석공주의 딸.
아들 : 효소왕(孝昭王, 687~702년, 재위 : 692~702년) – 신라의 제32대 왕.
아들 : 성덕왕(聖德王, 691~737년, 재위 : 702~737년) – 신라의 제33대 왕.
아들 : 김근질(金根質)
아들 : 김사종(金詞宗)
【신문왕 연보】
【기원후 665년】 문무왕 5년
- 이름은 정명(政明)이다.[명(明)의 자(字)는 일초(日怊)이다.] 문무대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또는 의(義) 라고 한다.]王后)이다. 왕비 김씨는 소판 흠돌(欽突)의 딸이다. 임금이 태자로 있을 때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오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훗날 자신의 아버지의 반란에 연루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문무왕 5년(서기 665)에 태자가 되었다.
【기원후 681년】 신문왕 원년
- 7월 7일, 신문왕(神文王)이 왕위에 올랐다. 당 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왕(先王)의 관작(官爵)을 그대로 잇게 하였다.
- 8월, 서불한 진복(眞福)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 8일, 소판 김흠돌(金欽突),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이 반란을 꾀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 13일, 보덕왕이 소형 수덕개(首德皆)를 사신으로 보내 역적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 16일, 다음과 같은 교서(敎書)를 내렸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옛 성인의 좋은 규범이요, 죄가 있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다. 과인은 보잘 것 없는 몸과 두텁지 못한 덕으로써 숭고한 왕업을 이었기에, 먹는 것도 잊고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리에 들면서 충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고 하였더니, 상중(喪中)에 서울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역적의 우두머리인 흠돌ㆍ흥원ㆍ진공 등은 재주가 있어 벼슬에 오른 것이 아니요, 관직도 실은 은전(恩典)에 의하여 오른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실을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고, 인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관료들을 업신여겼으며, 아래 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속였으며, 날마다 탐욕스러운 생각을 멋대로 드러내고 난폭한 마음을 휘둘렀으며, 흉악하고 간사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 서로 결탁하여 화근이 안팎으로 통하게 하였으며, 못된 무리들을 모아 날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내가 위로는 하늘과 땅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는 조상의 신령스러운 보살핌을 받아, 흠돌 등의 악행이 쌓이고 가득 차자 그 음모가 탄로나게 되었다. 이는 곧 사람과 귀신이 모두 배척하는 바요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이니, 의(義)를 범하고 풍속을 해치는 일에 있어 이보다 더 심한 짓은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병사들을 모아 못된 무리를 없애고자 하였더니, 어떤 자는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어떤 자는 대궐 뜰에 와서 항복하였다. 가지나 잎사귀 같은 잔당들은 이미 모두 죽여 없앴으며, 앞으로 사나흘 안에 죄인의 우두머리들도 모두 소탕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조치였으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근심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이미 요망한 무리들을 숙청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염려할 것이 없으니, 소집하였던 병마를 속히 돌려보내고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 28일에 이찬 군관(軍官)의 목을 베고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법은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근본이며, 벼슬살이하는 의리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으뜸이다. 병부령 이찬 군관은 반열의 순서에 따라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임금의 실수와 결점을 보좌하여 결백한 절개를 조정에 바치지 못했고, 명령을 받으면 제 몸을 잊어가며 사직(社稷)에 충성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역적인 흠돌 등과 사귀면서 그들이 반역을 꾀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미리 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공적인 일을 위하여 몸 바칠 뜻도 없는 것이니, 어찌 재상 자리에 두어 나라의 헌장(憲章)을 함부로 흐리게 할 것인가? 무리들과 함께 처형함으로써 뒷사람들을 경계로 삼는 것이 마땅하리라. 군관과 그의 친아들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모두가 이것을 알게 하라.” - 겨울 10월, 시위감(侍衛監)을 없애고 장군 6인을 두었다.
【기원후 682년】 신문왕 2년
- 봄 정월, 임금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여름 4월, 위화부령(位和府令) 2인을 두어 관리를 선발하고 천거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 5월, 태백(太白, 금성)이 달을 침범하였다.
- 6월, 국학(國學)을 세우고 경(卿) 1인을 두었다. 또 공장부감(工匠府監) 1인과 채전감(彩典監) 1인을 두었다.
【기원후 683년】 신문왕 3년
- 3년(서기 683) 봄 2월, 순지(順知)를 중시로 삼았다.
-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기로 하고, 우선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 남자 집에서 혼인을 하고자 예를 갖추어 청하면 여자 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이고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백 3십 5수레였으며, 벼가 1백5십 수레였다.
- 여름 4월, 평지에 눈이 한 자나 내렸다.
- 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愷元)을 김흠운의 집에 보내 책봉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大常)ㆍ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ㆍ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양(梁)과 사량(沙梁) 두 부(部)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아오도록 하였다. 부인이 탄 수레의 곁에서 시종하는 관원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왔다.
- 겨울 10월, 보덕왕 안승(安勝)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주어 서울에 머물게 하고 훌륭한 집과 좋은 밭을 주었다.
- 혜성이 오거(五車)성좌에 나타났다.
【기원후 684년】 신문왕 4년
- 겨울 10월, 저녁부터 새벽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 11월, 안승의 조카뻘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남은 무리들은 대문이 목이 베여 죽은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토벌하였는데, 그들과 맞서 싸우던 당주 핍실(逼實)이 그곳에서 죽었다. 성을 함락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대문(大文)을 혹은 실복(悉伏)이라고 한다.]
【기원후 685년】 신문왕 5년
- 봄,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를 다시 설치하고 용원(龍元)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居列州)를 나누어 청주(菁州)를 설치하니 비로소 9주(九州)가 갖추어졌는데, 대아찬 복세(福世)를 총관으로 삼았다.
- 3월,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으로 삼았으며,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그곳에 나누어 살도록 하였다.
- 봉성사(奉聖寺)를 완성하였다.
- 여름 4월, 망덕사(望德寺)를 완성하였다.
【기원후 686년】 신문왕 6년
- 봄 정월, 이찬 대장(大莊)[또는 장(將)이라고 한다.]을 중시로 삼았다.
- 예작부(例作府)에 경(卿) 2인을 두었다.
- 2월, 석산(石山), 마산(馬山), 고산(孤山), 사평(沙平)의 네 현(縣)을 설치하였다. 사비주(泗沘州)를 군(郡)으로 삼고, 웅천군(熊川郡)을 주(州)로 삼았다. 발라주(發羅州)를 군으로 삼고, 무진군(武珍郡)을 주로 삼았다.
-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기(禮記)』와 여러 문장을 청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담당관에게 명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를 베끼고 『문관사림(文館詞林)』중에서 규범에 대한 글을 골라 50권으로 만들어 주었다.
【기원후 687년】 신문왕 7년
- 봄 2월, 임금의 맏아들이 태어났다. 이날 날씨가 음침하고 어둑어둑하였으며 우레와 번개가 심하게 쳤다.
- 3월, 일선주(一善州)를 없애고 다시 사벌주(沙伐州)를 두어 파진찬 관장(官長)을 총관으로 삼았다.
- 여름 4월, 음성서(音聲署)의 장관을 고쳐 경(卿)이라 하였다.
- 대신을 보내 조상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에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ㆍ진지대왕(眞智大王)ㆍ문흥대왕(文興大王)ㆍ태종대왕(太宗大王)ㆍ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이었기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종묘의 보살핌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의 할 도리를 잃어서 정의가 하늘의 뜻에 어긋났는지, 별의 형상이 괴이하고 해는 빛을 잃어가니, 두려워 몸이 벌벌 떨려옴이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듯하옵니다. 모모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제물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 신령 앞에 정성을 드리며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자그마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몸을 가련히 여기시어, 사철의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자손들에게 넉넉히 남겨 오래도록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뢰옵니다.” - 5월, 교서를 내려, 문무 관료들에게 토지를 차등있게 주었다.
- 가을, 사벌주(沙伐州)와 삽량주(歃良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기원후 688년】 신문왕 8년
- 봄 정월, 중시 대장이 죽었으므로 이찬 원사(元師)를 중시로 삼았다.
- 2월, 선부(船府)에 경(卿) 1인을 더 두었다.
【기원후 689년】 신문왕 9년
- 봄 정월,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해마다 직위에 따라 벼를 차등있게 주는 것을 법으로 삼았다.
- 가을 윤 9월, 임금이 장산군(獐山郡)에 행차하였다.
- 서원경(西原京, 충북 청주)에 성을 쌓았다.
- 임금이 달구벌(達句伐, 대구)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기원후 690년】 신문왕 10년
- 봄 2월, 중시 원사가 병이 들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아찬 선원(仙元)을 중시로 삼았다.
- 겨울 10월,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다.
【기원후 691년】 신문왕 11년
- 봄 3월 1일, 왕자 이홍(理洪)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 13일,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사화주(沙火州)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
- 남원성(南原城)을 쌓았다.
【기원후 692년】 신문왕 12년
- 봄, 대나무가 말랐다.
-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조칙을 구두로 전하였다.
“우리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는 신묘한 공과 성스런 덕이 천고(千古)에 뛰어났으므로, 황제께서 돌아가신 날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너희 나라의 선왕 김춘추(金春秋)도 그것과 같은 묘호를 쓰니 이는 매우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빨리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의 묘호와 서로 저촉되어(같게 되어) 이를 고치라는 칙명을 내리니,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으리오. 그러나 생각해보니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훌륭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다스려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 이룩한 공적이 적다고 할 수 없다. 그가 돌아가셨을 때에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와 서로 저촉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교칙(敎勅)을 들으니 두려움을 이길 수 없도다. 삼가 바라건대, 사신이 대궐의 뜰에서 복명할 때 이대로 아뢰어 주시오.”
그 후에 다시는 별다른 칙명이 없었다. - 가을 7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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