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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리우스 [Vitellius, AD. 15~69] 로마 제국 제8대 황제(AD. 69)
[*수호천사*]
2025. 6. 2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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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리우스 [Vitellius, AD. 15~69] 로마 제국 제8대 황제(AD. 69)
【개인 정보】
- [이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Aulus Vitellius Germanicus)
- [출생] 기원후 15년 9월 24일, 이탈리아 노체라 수페리오레(Nocera Superiore)
- [사망] 기원후 69년 12월 20일, 이탈리아 로마
- [재위] 기원후 69년 4월 19일 ~ 12월 20일
- [전임] 오토(Otho, AD. 32~69) : 로마 제국 제7대 황제(AD. 69)
- [후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AD. 9~79) : 로마 제국 제9대 황제(AD. 69~79)
【가족 관계】
- [아버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Lucius Vitellius, BC. c.7 ~ AD. 51) : 세 번 집정관을 역임(34년, 43년, 47년)
- [어머니] 섹스틸라(Sextilia, BC. c.5 ~ AD. 69)
- [본인]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Aulus Vitellius Germanicus, AD. 15~69) : 로마제국 제8대 황제(AD. 69)
- [배우자] 페트로니아(Petronia) : 집정관의 딸로 상당한 재산을 지닌 여성이었다. 후에 비텔리우스와 이혼하고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Cornelius Dolabella)와 재혼하였다.
-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페트로니아누스(Aulus Vitellius Petronianus) : 한쪽 눈이 먼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 [배우자] 갈레리아 푼다나(Galeria Fundana) : 법무관의 딸
- [딸] 비텔리아(Vitellia)
- [사위]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Decimus Valerius Asiaticus, ?~69) : 벨기카의 총독. 비텔리우스를 지지했을 때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고 함
- [손자]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Marcus Lollius Paullinus Decimus Valerius Asiaticus Saturninus, 69/70~134)
- [사위]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Libo Rupilius Frugi, ?~101)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상으로 88년에 집정관을 역임. 그의 딸이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의 친할머니라고 한다.
- [손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Rupilia Faustina, c.87~138)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할머니
-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Aulus Vitellius Germanicus c.63~69) : ‘게르마니쿠스’는 오토가 자살했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언어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아버지 비텔리우스가 패배했을 때, 처형당하였다.
- [배우자] 페트로니아(Petronia) : 집정관의 딸로 상당한 재산을 지닌 여성이었다. 후에 비텔리우스와 이혼하고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Cornelius Dolabella)와 재혼하였다.
- [동생] 루키우스 비텔리우스(Lucius Vitellius the Younger, ~69) : 비텔리우스 황제의 동생
- [배우자] 주니나 칼비나(Junia Calvina) :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으로 49년에 이혼하였다. 소 아그리피나가 자신의 아들 네로의 신부로 옥타비아와 결혼시키려고 했고, 네로의 장래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주니아 칼비나가 남동생인 루키우스 주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쿠아투스와 근친상간 혐의를 뒤집어 씌웠고 루키우스 주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쿠아투스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이 고발은 주니나의 남편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를 통해 이루어졌다) 주니나 칼비나는 로마에서 추방당했다.
- [배우자] 트리아리아(Triaria)
【비텔리우스 연보】
【기원후 15년】
- 9월 24일 : 비텔리우스는 이탈리아의 노체라 수페리오레(Nocera Superiore)에서 태어났다.
- 그는 아버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Lucius Vitellius)와 어머니는 섹스틸리아(Sextilia)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그의 형제 중에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라는 이름의 형제가 한 명 있었다.
-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의하면 그의 출신 배경(고귀한 혈통, 비천한 혈통)이 혼란스럽고, 그의 가족은 원로원 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며(그의 아버지는 기사 출신이었다가 나중에 원로원에 진입하였다), 그는 점성술로 인해 불길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 그는 젊은 시절에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가 카프리(Capri) 섬으로 은퇴했을 때 그와 함께 있었으며, 그곳에서 젊은 칼리굴라(Caligula)와도 우정을 쌓았다.
【기원후 48년】
-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기원후 60년 또는 61년】
- 아프리카 총독으로 임명되어 행정 경험을 쌓았다.
【기원후 68년】
- 기원후 68년 말 : 황제 갈바는 비텔리우스를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Lower Germania)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부하 장교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그 이유는 지나칠 정도로 후하고 무척 너그러운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부대 내의 질서와 규율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기원후 69년】
- 기원후 69년 1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와 수페리오르(Germania Superior)의 군대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갈바에 대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두 군단을 지휘하던 카이키나(Caecina)와 파비우스 발렌스(Fabius Valens)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곧이어 갈리아, 브리타니아, 레티아의 군대도 비텔리우스를 지지하였다.
- 비텔리우스가 로마로 진군할 즈음, 그의 상대는 갈바가 아니라 오토였다. 갈바는 1월 15일, 오토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무에 비텔리우스는 오토와의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 기원후 69년 4월 : 비텔리우스는 베드리아쿰(Bedriacum) 전투에서 오토의 군대를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고, 오토는 자살하였다. 비텔리우스는 그의 승리 후 로마로 진군하였고, 군사적 우위를 점하면서 황제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원로원은 4월 16일에 그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그가 로마로 가는 길에 그가 보여준 것은 환락, 축제, 그리고 무분별한 언동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경솔했던 것은 그가 내뱉은 무분별한 말로 “죽은 적의 냄새는 달콤하다”였는데, 이 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적개심을 샀다.
- 기원후 69년 5월 : 자신의 게르마니아군을 근위대로 승격시키고 기존에 있던 수도의 근위대는 해체시켰다.
- 기원후 69년 7월 1일 :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다.
- 기원후 69년 7월 18일 : 비텔리우스는 로마에 입성하였고, 군사적 권력으로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그는 과도한 사치와 무능한 통치로 로마 시민과 군대의 불만을 자초하였다.
- 기원후 69년 10월 1일,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점성술사들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반응하여 일부 점성술사들은 익명으로 자신들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점성술사들이 축복하며 선언하노니, 비텔리우스는 정해진 날짜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비텔리우스는 점성술사들을 처형하였다.
- 동부 군대, 달마티아, 일리리쿰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한 것이 알려지자, 비텔리우스는 카이키나를 지휘관으로 하여 군대를 보내 동부 군대가 이탈리아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카이키나가 비텔리우스의 부진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배반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비텔리우스 군대의 사기는 크게 떨어지고,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게 되었다. 그 후 파비우스 발렌스가 비텔리우스의 명령을 받아 갈리아에서 지원군을 모으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 기원후 69년 12월 20일, 도나우 군단에 맞서 군대를 보냈지만 보낸 군사들이 쉽게 도나우 군단에 항복하게 되어 위기를 맞게 된다. 비텔리우스는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친위대에 의해 거부당하였다.
- 베스파시아누스 군대가 로마에 입성했을 때, 비텔리우스의 지지자들(주로 시민들)이 강력하게 저항하여 싸웠다. 이로 인해 도시 전투에서 베스파시아누스 군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카시우스 디오는 이 전투에서 5만 명이 사망했다고 전한다. 로마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고, 주피터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도 포함되었다.
- 결국 비텔리우스는 숨어있던 곳에서 끌려 나왔고(타키투스에 따르면 문지기의 오두막), 게모니아 계단으로 끌려가 기원후 12월 22일에 처형되었다. 죽기 직전 “나는 그래도 한때나마 너희들의 황제였다”라고 외쳤는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살아 생전에 그가 황제답게 행동한 유일한 모습이었다”라고 비웃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티베르 강에 던져졌고,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에 의하면 비텔리우스는 참수된 뒤 로마를 돌아다니며 그의 머리가 전시되었으며, 그의 형과 아들도 처형되었다고 한다.
【비텔리우스에 대한 평가】
【타키투스의 평가】
- 비텔리우스(Vitellius)는 비록 짧은 기간 동안만 황제로 재임했지만, 타키투스(Tacitus)에 의하면 그의 통치 이후에도 지속된 두 가지 중요한 행정 개혁을 남겼다.
- 백인대장들의 부패 관행 중단 : 비텔리우스는 백인대장(centurions)들이 병사들에게 휴가(furlough)나 면제(exemptions of duty)를 돈을 받고 판매하는 관행을 금지했다.
- 행정직 인사 시스템 개방 : 그는 또한 황제의 해방노예(freedmen)들만이 독점하던 황실 관료직(Imperial administration)을, 기사 계급(Equites) 출신 인물들에게도 개방하였다. 이로 인해 제국의 행정 체계가 보다 개방적이고 효율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사치와 무능】
- 한편, 비텔리우스는 오토(Otho)의 정책을 이어받아 네로(Nero)의 기억을 존중하며, 고인의 영혼에게 제사를 지내고 희생 제물을 바쳤다. 그는 네로의 노래를 공개적으로 연주하도록 하였고, 네로를 모방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왜냐하면, 네로는 여전히 로마 제국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 비텔리우스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과도한 사치와 무능한 통치로 비판을 받았으며, 로마 제국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통치가 끝난 후,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며 로마 제국에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수에토니우스의 평가】
-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그의 아버지가 베드리아쿰(Bedriacum) 전투에서 오토(Otho)를 위해 싸웠던 인물로,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짧은 통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평가를 남겼다.
- 그에 따르면, 비텔리우스는 야망이 없는 인물이었고, 처음에는 현명하게 통치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지만, 발렌스(Valens)와 카이키나(Caecina)라는 두 장군이 그를 방탕과 과도한 쾌락의 길로 유도하여, 그의 본래의 장점들이 묻히고 말았다고 한다.
- 또한, 그는 카티족(Chattian) 출신의 예언자 여인이 “어머니가 먼저 죽으면 황제로 더 오래 살 것이다”라고 예언하자, 자신의 어머니를 굶겨 죽였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어머니가 스스로 죽기를 원하며 독약을 요청했고, 비텔리우스는 이를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 수에토니우스는 비텔리우스의 대표적인 결점으로 ‘사치’와 ‘잔혹함’을 언급한다. 다른 고대 사가들인 타키투스(Tacitus)와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 중 일부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비텔리우스를 긍정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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