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1부 : 북간도 민족교회 구형(構形)과 성격
제2장 : 교회의 성립
1. 민중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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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리들은 기독교도들을 친중(親中)ㆍ친미파(親美派)로 인식하였다. 그 이유는 교회에 모인 한인들은 일반적으로 배일주의를 표방하였고, 이러한 일본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당시 중국인들과도 동일한 처지였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도들은 친중파로 환영받았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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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중국 관리들은 국제적으로 기독교도들의 배후에 있는 영미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같은 교파의 한인에 대해서도 불법적 행위를 자행하지 않았다. 한인들은 첫째, 중국 관리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한 자위수단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둘째로 한인들은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입교하게 되었는데... 셋째, 한인들은 정신생활의 안정을 얻기 위해 입교하기도 하였다. 넷째, 북간도 한인들은 자위단체의 필요성에서 교회를 형성하였다. 다섯째로 경제적 자립은 이주민 개개인으로는 불가능했으므로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노동력과 재력을 집결하여 자립을 이룩할 수 있었다. (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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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형성의 정황은 이주 한인들의 강렬한 자립ㆍ자주의식에 의한 자위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민중들의 신앙공동체이기 이전에 경제적ㆍ사회적 생활공동체였음이 시사된다. (43)
2. 기독교 민족주의자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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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 이동휘가 군대 해산 후에 기독교에 입신한 것은 국권회복을 위해서였다. 이동휘는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간도, 훈춘 등지에 순회하면서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학교를 세워라, 자녀를 교육시켜라, 그래야 우리도 서양문명국과 같이 잘 살 수 있다. 삼천리강산 한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삼천 개의 교회와 학교가 이룩되는 날이 독립되는 날이다.”라고 설파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서양문물의 전달자, 애국계몽운동의 수단, 구국운동의 방법으로 인식하였다. (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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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있어서 민족운동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으므로 기독교의 선교가 용이했고, 한인들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또한 민족주의자들은 교회 조직을 기반으로 한인사회를 통합하였다. (44)
3. 관북지방의 애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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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기독교가 번성하게 된 지리적 영향으로는 관북지방의 역사적 성격을 들 수 있다. 관북지방은 지리적으로 북간도와 가깝고, 기독교 복음전도가 불타오른 곳이며,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중심으로 애국계몽 문화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북간도 교회의 핵심세력은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서 이주한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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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 - 함경남도 지역에는 1906년 이동휘, 이준 등이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북흥학회를 조직 그후 1908년 西友學會와 합하여 西北學會로 발전하였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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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L. Swallen, 『미국 장로교 외지선교부 복음전도보고서』 한국 원산, 1898에 의하면 원산의 교인 80%가 황해도, 평안도의 이주민이요, 함흥교인 60%가 서북 여러 지방에서 들어 온 사람이었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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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부터 1921년에 이르기까지 함경남ㆍ북도의 교회성장률은 우리나라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높았다. 함경도 교회는 1910년대 초기 2천명 내외의 세례교인이 1920년 4천 8백 내외로 증가. 성장률의 원인은 평안도 교인들이 함경도에 이주하였다는 주장과 함경도 교회는 정치경제적 압박이 남쪽 지방보다 적었기 때문이라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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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성진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한 기독교도는 다음과 같이 그 당시 성진의 상황을 술회하고 있다. “1900년을 전후하여 그때 함경남북은 암흑 세상이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서당이 있었을 뿐이고 학교는 없었다. 성진이 개항되자 일본인들이 거류권을 갖고 상권을 독점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 경찰서와 처처에 주재소가 설치되었고, 일본 수비대와 헌병대가 배치되어 대한제국은 이름 뿐 일본인이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처처에는 순사보와 헌병보가 날뛰었고 쓰러져가는 조국을 일으킬 애국지사들은 함구무언 남모르게 한탄만 하고 있었다.” (45)
4. 이주 한인사회의 대표 김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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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 김약연은 1868(고종 5년) 회령군 동촌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30대의 청년기에 친족ㆍ친지와 함께 집단적으로 종성 간도의 명동촌에 이주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한인촌이 이루어지고 1901년 그가 규암재라는 사숙을 열어 청소년을 교육할 때도 맹자의 정치철학인 ‘신(信)ㆍ식(食)ㆍ병(兵)’을 교육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서북지방의 신교육 물결이 밀려오고, 또한 북간도에서 최초로 근대교육을 실시했던 서전서숙을 이끌어 간 인물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게 되자 신문화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1907년 서전서숙이 사정에 의하여 폐교하게 된 후, 1908년 서전의 전통을 계승하여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된 명동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명동학교는 신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서울 상동 청년학당에서 수학한 정재면을 교사로 초빙하면서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기독교학교로 전환하게 되었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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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인사회를 이끌어간 민족지도자들로서는 김약연, 문치정, 박무림, 김하규, 김영학, 남위언, 유찬희, 구춘선, 강백규, 마진 등이 있었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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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은 기독교를 민족구원의 종교로 인식하였고, 용정 남쪽 4개 촌을 명동이라 명명하고 촌락 공동출재(共同出財)로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인을 청하여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에게 집단 입신을 권하였다... 이주촌락의 일반적 특징은 혈연 중심의 동족마을의 형성이었으므로 가족관계의 경로를 통하여 기독교의 전파는 북간도에 있어서 민중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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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은 1915년 명동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1930년에는 평양신학에서 수학한 후 목사가 되었다. (47)
5. 훈춘현의 기독교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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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김율제는 훈춘현 탑자구에 기독교를 전하였다. 1911년 12년 이동휘와 함북, 함남지방의 서북학회 회원들은 훈춘현에 나타나 국권회복을 위하여서는 기독교도들이 단결하여야 하며, 기독교로 뭉쳐 민족운동을 전개하자고 주장하였다. 그 후 민족운동가 황병길, 오병묵은 훈춘기독교강서당을 설치하고 기독교 교우회를 조직하였으며, 평양 대성학교 출신 김동한은 대황구 지방에서, 오수현은 흑정자 지방에서 각기 기독교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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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부터 선교사 박걸(朴傑), 전도사 박태환, 한수현, 김정규의 활약으로 수선향에 훈춘현성내교회, 경신향에 금당촌교회, 순의향에 전선촌교회, 숭례향에 연통뢰자교회, 용지향에 구도구교회, 중강자교회, 춘화향에 남별리교회, 요지구교회, 사도구교회 등이 설립되었고, 1918년 교인 총수는 1천여 명이었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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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북간도 기독교 상황 보고서에서 북간도 교회 형성의 계기를 종교적 동기보다도 정치적ㆍ사회적 동기로 파악하고 있다. 즉 “북간도에서 장로교가 인기 있는 것은 장로교의 진수가 자유, 평등주의며 합중국이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신앙으로 단결하였기 때문이라는 신념이 북간도 기독교인들 뇌리에 깊이 새겨 있어서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최종 목적을 제2의 미국이 되어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일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 (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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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선교사들이 미국 정부의 비정치화 정책에 맞추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못했지만 북간도 한인교회와 관계가 깊은 캐나다 선교부 선교사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는 다르게 배일적 태도를 분명히 표명했고, 한인들의 배일행동을 직접, 간접으로 지원해 주었다. 1909년 성진을 중심으로 이동휘가 캐나다 선교부의 조사로서 애국운동에 헌신하자 그리어슨(구례선) 선교사는 이동휘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고, 김약연, 정재면, 구춘선 등이 간도에서 한인들을 중심으로 교육운동ㆍ사회결사운동에 전념하자 선교부의 바커(박걸), 푸트(부두일), 스코트(서고도), 마틴(민산해) 등은 자신들의 위해를 돌보지 않고 한인들의 민족운동에 도움을 주었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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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보수적인 근본주의, 복음주의 신앙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하였는데,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은 자유주의, 진보주의 신학노선으로 종교의 사회구원과 현실참여를 지향하는 신학노선을 견지하였다. 일제 침략에 고민하는 한국인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국권회복의 날은 반드시 올 것이며, 독립을 위한 교도들의 단결과 열망은 하나님의 은총, 즉 기독교 열강의 원조를 결과할 것이다”라고 설교하였다. (50)
6. 북간도 교회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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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북간도의 기독교도들은 민중과 고난을 함께 하면서 자기 자신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였고, 또 민중들과 더불어 교회의 사명에 충실하였다.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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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교회가 형성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민중들의 자주, 자립의식과 민족운동가들의 자치의식이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구현될 수 있었던 점이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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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지방에는 천도교, 대종교, 사천교, 유교 등 제종교가 성행하였지만 그 중에서 기독교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기독교의 여러 종파 중에서도 캐나다 장로교회가 가장 그 세력이 컸음을 살필 수 있다. 지역적으로도 기독교의 전파는 만주 전 지역 안에서 용정, 두도구, 연길, 훈춘, 백초구 등 북간도지역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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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북간도 한인교회가 진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민중교회로 성립된 것은 기독교적 민족주의가 시대정신을 반영하였다는 데 기인한다. (56)
7. 복음의 전파(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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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지역에 교회 개척사업이 시작된 것은 1892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원산에 선교지부를 설치한 데서 시작된다. 그후 1898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원산에 선교지부를 설치하였으며, 또한 1898년 캐나다 장로교회가 이곳에 선교사를 파송하자, 두 선교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함경남북도, 북간도, 해삼위 일대의 선교사업은 카나다 장로교회에서 맡게 되었다.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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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노회록』 서문... “조선 인민이 간도에 거주한 지 40여 년에 예수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그늘 아래 있을 때에 조선 내지 함경북도에 전도하는 캐나다 장로회에 파송한 선교사 그리어슨씨가 1902년 간도와 해삼위까지 전도 중에 믿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1903년 전도인 안순영을 보내어 전도를 개척하고 1906년에 중국 교인 싼진(單金) 선생이 전도하여 동양리 양무정자에 믿는 사람이 생기매 성진에서 그리어슨이 김문삼을 조사로 보내어 교회를 설립하고, 1907년에 선교사 럽(A. F. Bobb, 鄴亞力)은 양무정자교회를 시찰하고 용정교회를 설립하였고, 그리어슨 목사는 간도교회를 특별히 주의하므로 삼국전도회를 조직하였다.” (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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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교회의 설립은 『간도노회록』 서문에서 말하는 1907년이 정확한 연대일 것이다. 그러나 용정교회가 출발한 시기는 한해전인 1908년으로 보아야 한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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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미국 남감리회에서도 선교활동을 전개, 전도인 이화춘에 의하여 이주 한인 망명촌인 와룡동교회가 설립되었는데, 1909년 장감 양 교의 분계조약에 의해 북간도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구역으로 작정되었다.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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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나 “독립정신은 교육으로 단결은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이상설의 신조와 그가 설립한 서전서숙에 참가한 윤정희, 정순만, 박무림 등 신민회 회원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는 간도 기독교 전파의 시발을 이상설로 인식하고 있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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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최초로 교회가 설립된 것은 러일전쟁 이후 1906년임을 알 수 있다. 러일전쟁 당시 간도의 이주 한인들은 러일 양국 간에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그들의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선교사들이 보호하는 교도는 일군에 의하여 존중되었으므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독립을 지키는 데 의지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기독교의 전파가 용이하였다. (58)
8. 교회의 개척과 부흥(1906~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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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부터 1911년까지는 북간도 교회성장의 황금기였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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