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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실]/[도서 정리]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1부 : 제3장 - 북간도 교회의 발전

by [수호천사] 2021.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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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제1부. 북간도 민족교회 구형(構形)과 성격

제3장. 북간도 교회의 발전

 

1. 교단 조직의 내실기(1912~1917년)

 

  • 1912105인 사건이 발생하자 북간도 교회에도 영향이 미치었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신민회를 타도할 계획으로 조작한 것인데, 북간도 교회는 신민회의 이동휘와 관계가 깊고, 간도 훈춘 지역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간에는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선천 신성학교, 평양 숭실학교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안명근 사건과 105인 사건에 관계되어 북간도에서는 16명의 연루자가 체포되었고, 이 사건에 관련된 간도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도망, 전거(轉居), 또는 탈교자(脫敎者)도 있었다. (65)

  • 북간도 기독교는 1912년을 계기로 표면적으로는 쇠퇴기였으나 내면적으로는 교회의 교단 조직이 내실화되고 교인수도 더욱 증가하여 1917년가지 꾸준히 발전함으로써 1918년 독립운동의 발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 [1912~1917 북간도 교회 일람] (66-68)

  • 1912년 대한독노회는 드디어 한국 교회의 최고 기관은 총회를 창설하고 이에 따라 1912129일 원산상리교회에서 함경노회를 조직하였다. 함경노회 설립과 함께 북간도지역은 바커 선교사와 한인 목사 김내범이 임명되었고, 그들은 간도 넓은 지역에 이곳저곳 분산되어 정착한 한인 이주촌을 순회하면서 교회 설립에 힘썼다. (68)

  • 베커는 그리어슨의 파송으로 1912년 북간도 용정 동산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치외법권지역(영국 덕이)를 명시하고 의료ㆍ교육사업을 전개했다. 용정의 제창병원은 일제의 손이 미치지 못하여 독립운동자들의 은신처 본거지가 되었다. 이 병원 지하실에서 간도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현규환, 앞의 책, 648. (68)

  • 1913년 당시 북간도의 교세를 함경북도 지방과 비교해 보면 원산에 34처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함흥에 33, 성진에 47, 회령에 21, 4곳의 교인 총수는 8,557명이었다. 그런데 이때 북간도에는 26처의 교회가 발전하고 있었으니 이 숫자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68)

  • 1915년 북간도 교회 형편을 김내범 목사는, “조선인 14, 교회의 수가 14(함경노회시대 발전한 교회들이며 전체 교회 총수는 34) 교인 도합 5, 그 중 세례인이 5, 장로 이하 직원 106, 학교 10여 처 중학교도 있고, 소학교도 10여 곳이오며, 낙심하였던 형제가 회개한 일도 많다고 보고하고 있다. (69-70)

  • 1915년 선교지역 분계 결정에 따라 길림성 선교구역 분계위원에 의해 연길, 화룡현 동편과 봉천 장백 부근이 함경노회 전도구역으로 결정되었다. (70)

  • 1912년 함경노회가 설립된 지 6년 만인 1917, 함경노회는 지리적 형편과 모임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남북 분립의 방법으로 종성 이북 간도 일대는 함북노회로, 명천(明川) 이남과 해삼위는 함남노회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19171120조선예수교장로회함북노회가 북간도 용정교회에서 조직되었다. (71)

 

2. 교회의 활동과 박해기(1918~1920년)

 

  • [1918~1921년간에 설립된 교회 및 중요사건에 관계된 교회의 명칭] (72-73)

  • 191812월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사들과 한인 목사, 전도사, 각 교회 장로 등은 전간도 교회의 대표자들로 발기인을 구성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연합을 촉구하였다. 그들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용정교회에서 전간도 교인들이 함께 하는 연합기도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기도회는 5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전세계적으로 인종차별이 철폐되고 불평등조약이 폐기되고 영토 침략주의가 종식되어 자유ㆍ평등ㆍ박애의 기독교적 이념의 사회가 구현될 것임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개최되었다. 191812월 하순부터 19192월 하순에 이르는 기간에 북간도의 기독교도들은 독립운동에 적극 매진하였다. (74)

  • 일제가 조사한 기독교도 독립운동가들의 명단 (75)

  • 31운동 두 달 전에 함북노회 제3회 모임이 명동학교에서 열렸다. 간도시찰회는 이 모임에서 전간도를 동ㆍ서ㆍ북의 3구역으로 구분하였다. 간도 동구역은 박예헌 목사가 시찰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간도 서구역은 이하영 목사, 간도 북구역은 최덕준 목사가 각각 책임을 맡았다. (75)

  • 1919313일 만주에서의 31 독립선언은 그 첫 봉화가 북간도 용정촌에서 올려졌다... 용정 시위를 준비한 구춘선 장로, 마진 집사, 배형식, 박예헌, 김내범 목사, 김약연, 정재면, 유찬희 장로 등 이 밖에도 기독교학교 교사 김정, 김상호, 이태현, 김순문, 기독청년회의 대표 서성권, 이홍준, 선교부의 스코트, 푸트, 마틴 등 선교사들은 교인들과 기독교학교 학생들은 이끌고 민중을 지도하였다. (76)

  • 함북노회 제3회 회록, 1919, 14~15쪽에 의하면... / 시찰위원장 간도 동구역 박예헌 목사, 간도 서구역 이하영 목사, 간도 북구역 최덕준 목사 / 규칙위원 - 최덕준, 최경재 / 헌의위원 - 박예헌, 정명주, 강두화 / 재경위원 - 유찬희, 양종식, 최수성 / 총계위원 - 김내범, 김문협 / 절차위원 - 채필근, 정재면 / 총회보고위원 - 김내범, 채필근 / 열람위원 - 박예헌, 김문협 / 신학준시위원 - 푸트, 채필근, 이하영 / 주일학교위원 - 간도 서구역(이하영, 정명주), 간도 북구역(최덕준, 남인상), 간도 동구역(스코트, 정재면) / 학무위원 - 김내범, 김약연 (76)

  • 31운동 후 처음으로 열린 함북노회 제4(1919913, 와룡동교회) 모임에서 북간도의 세 시찰 구역이 보고한 그 참상은 이러하다. 먼저 간북시찰은 금년 독립만세 사건에 우리 교인 중에 죽은 자가 최익선, 장학관, 최광범 삼인이요, 중상된 이가 김진서, 원용석, 이명찬 삼인이요, 옥중에 있는 자가 십인, 구석되었다 풀린 자가 십이 인이라.” 또한 장은평교회, 구세동교회, 영생동교회, 천보산교회가 속해 있는 간서시찰회에서도 금년 만세사건에 관계하여 죽은 교인이 박문협, 리요섭, 채창홍 삼인이요, 중상자는 전창조, 리봉섭이며, 감금자도 수인이라.” 명동교회, 용정교회가 소속된 간동시찰회의 보고는 만세사건에 죽은 교인은 이유주, 김병연 2인이요, 갇힌 자 32명 중 6인이 구속 중임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간북ㆍ간서ㆍ간동시찰회의 보고와 함께 총회록에도, “금년 봄 독립만세사건으로 교인 중 총과 창에 별세한 이가 9인인데, 그 중에는 교사와 학생이 많다. 중상자는 10인이요, 일 년 반 이하 징역으로 선고받고 감옥 중에 있는 이가 아직도 30여 인인데, 그 중에 명동교회 김약연 장로는 국자가에 갇혔고, 또 얼마 동안 감금되었다가 태형만 받고 석방된 자가 용정 등지에서 여러 사람이요, 설유만 받고 풀린 자도 회령, 용정, 두도구, 국자가 등지에 백 명 가량 된다.” (77-78)

 

3. 간도노회의 성립기(1920~1921년)

 

 

  • 함북노회록의 보고를 보면 교회는 환난 중에 신앙심이 더욱 깊어지고 전도의 기회를 찾았으며, 박해에 비례하여 회집하는 횟수가 늘어나 교인수가 증가되었다. (79)

  • 교회는 한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1921년 간도노회를 설립하였다. 함북노회는 교통의 불편, 재정상의 관계, 기타 사정에 의하여 간도 및 회령구역을 서로 나누어, 간도는 독립하여 간도노회가 되고, 회령구역은 함남노회 구역인 성진시찰구역과 합하여 함북노회에 소속시키기로 하였다. (81)

  • [1912~1921년 노회 회집 상황표] (81-82)

  • 1921121일에 간도노회는 조직회로 토성보예배당에서 회집하였다. 조직회장 박예헌의 기도로 개회하니 회원은 선교사 2, 목사 5, 장로가 18인이었다. 임원 선출은 회장에 김내범, 부회장에 프라저, 서기에 문재린, 부서기에 허상훈, 회계에 강도화, 부회계에 바커, 선교사가 선정되었다. (83)

  • 그들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신앙의 의로서 인식했고, 적극적인 참여로써 그들이 처한 정치적 현실을 변혁시키려 했다. 그것은 간도노회 설립을 위해 모인 각 교회의 목사, 장로들의 명단 속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다름 아닌 간도 독립운동의 중추세력을 이루었던 국민회 지도자들이었다. 안심입명의 복음과 흥한(興韓)운동의 후원은, 기독교를 두고 다른 데서 구할 수 없다는 관념이 북간도 한인들의 상하를 막론하고 깊이 뇌리에 침투하기에 이르렀다[목사는 바커, 프라저, 김내범, 강두화, 최덕준, 박예헌, 이병하, 장로는 이종식, 문재린, 정재면, 서민환, 허삼훈, 유한풍, 현기윤, 이윤준, 채일선, 장학수, 최학봉, 양형식, 이태현, 박용홍, 염창화, 조명환, 함주익, 유우일]는 일제의 견해는 시대적 요청에 민감하였던 북간도 교회의 사회참여를 의미한다. 북간도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의 주동적 세력이 되었고 북간도 교회, 북간도 기독교학교, 배일주의는 삼위일체로 북간도 교회가 민족교회로 구형되는 요소가 되었다.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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