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규홍(한신대학교 교수)
1.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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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분열을 통해서 성장하였다... 세계를 하나 되게 하고 화해케 하는 복음을 가진 교회가 그 어떠한 이유와 원인이든 분열하는 것은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의 말처럼 그것은 “세계에 대한 교회의 윤리적 패배”이기 때문이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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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한국교회의 분열이 개신교의 개혁전통에 충실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134)
1) 한국교회 분열의 내적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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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는 19세기 영미의 부흥운동과 학생운동에 기원한 복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 다양한 선교단체와 교파들이 내한함으로 서로 공동의 연대와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였다. (134)
(1) 지역분할 선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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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파주의적 선교활동의 문제점과 폐해를 자각한 선교사들이 선교지 ‘예양협정’(Commity Agreements)이란 지역분할 선교정책을 맺어 서로의 선교 담당구역을 나누었다.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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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지역분할 정책이 갖는 문제점은 한국사회가 전통적으로 지역 파벌로 나누어져 있는 배경을 깊이 고려하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시행되며 교파 분열에 지정학적인 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135)
(2) 신학의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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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교파들 사이에서 또는 교파 안에서 신학적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1919년 3ㆍ1운동 이후 문화통치하에서 한국인들이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하게 되면서이다.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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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지도하에 미국의 신학을 공부하고 온 이들과 자발적으로 일본과 미국에서 자유로운 신학을 공부하고 온 이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빙돈 단권 성서주석』 (135)
(3) 교회의 권력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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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점차 성장하여 교권이란 교회 내부의 권력 구조가 형성되었다... 한국교회가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면서 목회지도력을 강화한 것은 교회 발전을 위한 조처이기도 했지만 교권을 강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36)
2) 한국교회 분열의 외적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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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은 새로운 시련의 시작... (136)
(1) 식민지 잔재의 문제와 교파 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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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와 식민지 잔재척결의 핵심 과제는 이후 교회 내부의 논쟁과 분열의 불씨가 되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장로교회의 고신과 분열과 감리교회의 재건파 분열이다. (137)
(2) 반공이데올로기와 신학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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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ㆍ15 해방이 민족분단을 가져온 상황에서 민족과 반민족의 대결구도는 친미반공과 친미반공으로 뒤바뀌면서 한국교회 내의 이념과 신학의 혼란과 대립이 야기되었다... 장로교회의 조신파 분열과 세계교회협의회와 복음주의협의회 사이에 노선 갈등이 빚은 장로교 통합과 합동의 분열, 성결교회의 분열이다. (137)
(3) 선교사들의 귀환과 교권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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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남한을 분할 통치하게 한 8ㆍ15 해방은 일제하에서 한국교회 주도권과 확고한 교권을 가졌던 미국 선교사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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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지도자 선출이나 선교정책에도 일일이 간섭하여 분단 상황 속에서 더욱 미국 선교쇠를 의존하게끔 하였다.... 감리교회와 침례교회의 분열... (138)
2. 한국교회의 분열 과정
1) 장로교회의 분열
(1) 고신파 교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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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파의 분열은 해방후 식민지 잔결 척결의 핵심인 신사참배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한 학교이기에... 1946년 9월 부산에서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박윤선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평양신학교의 정통을 계승하는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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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방의 다수 교권세력인 김길창 목사 등의 반발... 1946년 12월 제48회 경남노회는 김길창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고 고려신학교 인준의 취소와 신학생 추천을 금지... 한상동 목사는 노회 탈퇴 선언... 박형룡 목사의 사퇴...(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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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계속된 제36회 총회조차 경남 법통노회가 파송한 대의원의 대표권을 인정하지 않자, 고려파는 1952년 9월 경남 진주에서 독자적인 총회를 조직하고 분립하게 된 것이다. (140)
(2) 조신파 교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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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4월 21일 개최된 장로교 제36회 총회는 한국교회 역사상 “미증유의 대치욕의 총회”였다. 경찰력을 동원하여 회의장을 폐쇄하고 총회를 유회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 출옥성도 중심의 경남노회 문제, 조선신학교 문제...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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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학교로 편입한 평양신학교 학생 51명이 1947년 5월 총회에 전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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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수행한 역사적 계시로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법칙이라는 것을 자신은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믿는다고 피력하였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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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 목사의 문제제기... 1950년 36회 총회의 최대 쟁점은 두 신학교의 통합 문제... 두 신학교 모두를 취소하고 신설 신학교 설립 결의... 교수진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권세열 등 이전이 장로교 신학교 교수들이고 조선신학교 교수들은 전부 배제됨...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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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파 인사들이 중심이 된 경기노회는 즉각 총회의 불법적인 조치에 반발하고 긴급 건의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1953년 4월 제38회 총회는 조신측의 80명 인사들이 낸 직전 총회의 결의 취소를 요구하는 긴급건의서를 거부하고 이전의 총회 결정을 재확인하였다.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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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0일...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단... 9개노회 대표 47명... 1954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명명하고, 그 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교단 명칭을 변경하였다. (142)
(3) 합동과 통합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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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창립된 세계교회협의회 가입 문제가 장로교회와 후에 언급될 성결교회의 분열에 이데올로기적 요인으로 작용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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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와 공산주의... 가톨릭...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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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 목사와 정규오 목사... 1955년 8월 세계 복음주의 진영에 가입... 분열을 두 사건... 1) 총회신학교 부지 확보를 위해 교장인 박형룡 목사가 임의적으로 사용한 삼천만환 사건... 2) 1959년 제44차 정기총회에 파송될 경기노회의 총대 선출과정에서의 갈등...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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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칼 진영은 연동교회에서... 복음주의 진영은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함... (144)
2) 감리교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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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는 감독제 정치제도를 가진 교회로서 3차에 걸친 교회의 분열에는 자연히 감독 선출 문제가 배후에 놓여 있다. (144-145)
(1) 재건파와 부흥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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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감리교회는 교파 환원 운동을 주도하며 일제하에서 옥고를 치르거나 휴직되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교단을 재건하겠다는 재건파와 기존 교단을 유지하며 성장시키겠다는 부흥파의 정통성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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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의 1차 분열의 이유는 일제 잔재의 척결과 교회 재건의 주도권 확보 문제였다. 이와 같은 분열은 1949년 4월 30일 교회의 분열을 통탄하는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통합하게되었다. (145)
(2) 총회원측과 호헌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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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부산에서 모인 특별총회가 유형기 목사를 긴급하게 감독으로 선출... 유형기 목사는 친일 감독인 정춘수 목사에 의해 교직에서 파면당했기 때문에 결격사유가 있었다고 주장됨... 한 번만 예외로 감독직 추대... (한국감리교회의 재건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총괄한 무어 감독의 지지가 유효)... 미국교회와의 긴밀한 협조와 폭넓은 교류에서 유형기 목사의 역할이 절실했기 때문...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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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기 목사의 선교달러 유용사건... 호헌파는 1955년 3월 천안에서 단독 총회를 개최하고 김응태 목사를 신임감독으로 추대하여 분열... 그러나 4년 후 분립 당사자인 유형기 감독의 양 교회의 합동을 원하는 탄원서가 받아들여져 1959년 3월 연합 총회로 다시 교단 통합을 이루었다. (146-147)
3) 성결교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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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현 한국교회협의회) 가입... 미국의 복음주의협의회가 소개되자 가입 결의... 교회 선교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교회가 분열하는 계기가 됨...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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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남북 분단의 상황은 성결교회로 하여금 한국기독교연합회가 가입한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 노선을 용공과 자유주의 신학노선으로 비판하는 복음주의협의회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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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회는 성결ㆍ중생ㆍ신유ㆍ재림의 복음적 순수성과 전도를 강조하며 그 외 사회봉사사업이나 역사참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점에서 복음주의진영은 에큐메니칼 진영과 선교 노선에서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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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두 기관 동시 탈퇴안... 보류... 복음진리수호동지회는 성결교회의 보수 동지회로 바꾸고 1961년 8월 독립문교회에서 총회를 열어 분립하였다. (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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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4월 보수 총회는 신학교를 따로 세우고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명칭을 내걸고 기존의 성결교회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부터 분립하였다. (148)
4) 침례교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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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재림사상이 문제가 되어 강제 해산된 침례교회는 1946년 2월 교단 재건을 결의하고 그해 9월에 대화회를 모여 제도혁신을 추진하였다... 1949년 동아기독교를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명의를 새롭게 하고 미국 남침례교회와 정식유대를 맺고 재정 후원을 받게 되었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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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적 교회운영의 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선교사들을 통해서 들어온 선교자금은 교회 내에 지배적 교권 구조를 만들게 되고 그것은 더 나아가 총회를 양분하고 분열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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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벽 목사... 총회 주류 세력... 1958년 미국 남침례교 해외선교부의 안대벽 목사의 불신임안 통보... 안대벽 목사를 중심한 총회 주류 세력은 민족적 감정을 결합하여 항의... 포항 총회... 미국 남침례회 해외선교부는 대전총회 인정... 1968년 교단 통합... (149)
3.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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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성장역사에 대한 최초의 연구... 서명원의 『한국교회 성장사』... 한국교회 최초의 분열사 연구는 전성천의 Schism and Unity in the Protestant Churches of Korea이다(1955년 예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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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분열을 역사적으로 집대성한 글은 1956년에 출판된 김양선의 『한국기독교 해방 후 10년사』이다... 한국교회의 분열 요인을 교회의 영도권 문제와 한국 신학 수립의 태도로 해석...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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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분열을 민족교회 사관이라는 역사 신학적 관점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이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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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분열을 공동집필 과정을 통해 교파주의나 신학사상적 편향을 극복하고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은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의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권이다.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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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분열사의 연구는 분열의 요인과 그 과정을 밝히고 정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분열을 넘어 하나로 통합하는 교회의 일치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1) 지역별로 교파, 교단들이 연합하는 지역협의회를 형성하는 것, 2) 개인에게 집중되는 교권을 주변부로 확산하는 교회정치제도를 정착하는 것, 3) 신학사상과 의례전통의 차이를 수용하고 대화를 통해 서로를 배우는 학습과정의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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