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문성왕 [⽂聖王, AD. ?~857] 신라 제46대 국왕(AD. 839~857)
【개인 정보】
- 이름 : 김경응(金慶膺)
- 출생 : 미상
사망 : 기원후 857년 9월(음력)
재위 : 기원후 839년 7월 23일(음력) ~ 기원후 857년 9월(음력) - 전임 : 신무왕
후임 : 헌안왕
【가계 정보】
- 부왕 : 신무왕(神武王, ?~839, 재위 : 839~839)
모후 : 정계부인(貞繼夫人) 또는 정종태후(定宗太后) - 왕비 : 소명왕후(炤明王后) 박씨(朴氏) – 김충공(金忠恭)의 딸
- 양자 : 헌안왕(憲安王, ?~861, 재위 : 857~861)
- 왕비 : 흔명부인(昕明夫人) – 이찬(伊飡) 위흔(魏昕)의 딸
- 아들 : 김안(金安)
- 손자 : 김민공(金敏恭), 각간(角干)
- 증손자 : 김인경(金仁慶) – 벼슬이 각간(角干) 또는 제3재상(宰相)
- 손자 : 김민공(金敏恭), 각간(角干)
- 아들 : 김안(金安)
【문성왕 연보】
【기원후 839년】 문성왕 원년
- 문성왕(文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응(慶膺)이다. 신무왕(神武王)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정종태후(定宗太后)라고도 한다.]
-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이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아버지 신무왕을 도와 선왕의 큰 적을 없앴으니, 그의 공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곧 바로 궁복을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아울러 관복을 하사하였다.
【기원후 840년】 문성왕 2년
- 봄 정월, 예징(禮徵)을 상대등으로 삼고, 의종(義琮)을 시중으로 삼았으며, 양순(良順)을 이찬으로 삼았다.
- 여름 4월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 당나라 문종(文宗)이 홍려시(鴻臚寺)에 조칙을 내려, 볼모로 온 사람 및 기한을 다 채워 귀국하려는 학생을 합쳐 105명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 겨울, 기근이 들었다.
【기원후 841년】 문성왕 3년
- 봄,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 일길찬 홍필(弘弼)이 반역을 모의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섬으로 도망하였다. 그를 잡지 못했다.
- 가을 7월, 당나라 무종(武宗)이 조칙을 내려 신라로 귀국하는 관리로 이전에도 신라에 들어갔던, 선위부사충연주도독부사마사비어대(宣慰副使充兗州都督府司馬賜緋魚袋) 김운경(金雲卿)을 치주장사(淄州長史)로 임명하고 사신으로 삼았다. 신라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녕해제군사상주국신라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諸軍使上柱國新羅王)으로 삼아 책봉하고, 부인 박씨를 왕비로 봉하였다.
【기원후 842년】 문성왕 4년
- 봄 3월, 이찬 위흔(魏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기원후 843년】 문성왕 5년
- 봄 정월, 시중 의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양순을 시중으로 삼았다.
- 가을 7월, 호랑이 다섯 마리가 신궁(神宮)의 정원에 들어왔다.
【기원후 844년】 문성왕 6년
- 봄 2월, 초하루 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태백(太白, 금성)이 진성(鎭星, 토성)을 범하였다.
-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 시중 양순이 사직하여, 대아찬 김여(金茹)를 시중으로 삼았다.
- 가을 8월,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고, 아찬 계홍(啓弘)을 진두(鎭頭)로 삼았다.
【기원후 845년】 문성왕 7년
- 봄 3월, 임금이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삼고자 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였다.
“부부의 도는 사람의 큰 윤리입니다. 그러므로 하(夏)나라는 도산(塗山)으로 흥하였고, 은(殷)나라는 신씨로 번창하였으며, 주(周)나라는 포사(褒姒)로 멸망하였고, 진(晉)나라는 여희(驪姬)로 혼란하였습니다. 즉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있으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궁복은 섬사람인데, 그의 딸을 어찌 왕실의 배필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 겨울 11월, 우레가 쳤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 12월, 초하루에 해 세 개가 나란히 나타났다.
【기원후 846년】 문성왕 8년
- 봄, 청해(淸海)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후환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였다. 무주 사람 염장(閻長)은 용감하고 힘이 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와서 말하였다.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요청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한 명의 졸개도 없이 그저 빈주먹만 가지고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임금이 그의 말을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하였다. 궁복은 힘센 장사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하였다. 마침내 궁복이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달래니, 무리들이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기원후 847년】 문성왕 9년
- 봄 2월, 평의전(平議殿)과 임해전(臨海殿)을 중수하였다.
- 여름 5월, 이찬 양순과 파진찬 흥종(興宗) 등이 반역을 일으켜 처형하였다.
- 가을 8월, 왕자를 왕태자로 책봉하였다.
- 시중 김여가 죽었기에, 이찬 위흔을 시중으로 삼았다.
【기원후 848년】 문성왕 10년
-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 시중 위흔이 사직하였다. 파진찬 김계명(金啓明)을 시중으로 삼았다.
- 겨울 10월,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기원후 849년】 문성왕 11년
- 봄 정월, 상대등 예징이 죽었기에 이찬 의정(義正)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 가을 9월,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이 반역을 하였기에 처형하였다. 대아찬 흔린(昕鄰)이 이에 연루되어 역시 처벌되었다.
【기원후 850년】 문성왕 12년
- 봄 정월,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서울에 흙비가 내렸으며,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다.
【기원후 851년】 문성왕 13년
- 봄 2월, 청해진(淸海鎭)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 전북 김제)으로 옮겼다.
-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 당나라에 들어갔던 사신 아찬 원홍(元弘)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 사리를 가지고 왔다. 임금이 교외로 나가 그를 맞이하였다.
【기원후 852년】 문성왕 14년
- 봄 2월, 파진찬 진량(眞亮)을 웅천도독(熊川都督)으로 삼았다.
- 조부(調府)에 불이 났다.
- 가을 7월, 명학루(鳴鶴樓)를 중수하였다.
- 겨울 11월, 왕태자가 죽었다.
【기원후 853년】 문성왕 15년
- 여름 6월, 홍수가 났다.
- 가을 8월, 서남 지방의 주와 군에 메뚜기떼가 나타났다.
【기원후 855년】 문성왕 17년
- 봄 정월, 사람을 보내 서남 지방의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 겨울 12월, 진각성(珍閣省)에 불이 났다.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기원후 857년】 문성왕 19년
- 가을 9월, 임금이 병이 들자 유언장을 내려 말하였다.
“과인이 미미한 자질로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위로는 하늘이 보는데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까 근심하였으니, 밤낮으로 전전긍긍하여 깊은 물과 얇은 얼음을 건너는 것과 같았다. 세 사람의 대부와 여러 신하들이 좌우에서 보좌하여 왕위를 유지해왔다. 지금 갑자기 병에 걸려 열흘이 되었으니, 정신이 혼몽하여 아침이슬보다 먼저 쓰러질 듯하다.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대업에는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군대와 국가에 관한 모든 사무는 잠시라도 폐기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서불한 의정(誼靖)은 선왕의 손자요 나의 숙부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있고 명민하며 관후하고 인자하여,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기를 만하다. 무거운 부담을 벗어나 어질고 덕 있는 자에게 맡기려고 하였는데 그것을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살고 죽는 것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만물의 위대한 기약이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이 부여하는 정해진 몫이다. 세상을 뜨는 자는 하늘의 이치에 이르는 것이니, 세상에 남는 자가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여러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충성할 것이며, 가는 사람을 장례 지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혹시라도 예절을 어기지 말 것이다. 나라 전체에 포고하여 나의 뜻을 밝게 알게 하라!” - 7일이 지나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 지냈다.
728x90
반응형
'[인물 자료실] > 인물 [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무왕 [⽂武王, AD. 626~681] 신라의 제30대 국왕(AD. 661~681) (0) | 2025.06.21 |
---|---|
민애왕 [閔哀王, AD. ?~839] 신라 제44대 국왕(AD. 838~839) (0) | 2025.06.21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D. 121~180] 로마 제국 제16대 황제(AD. 161~180) (0) | 2025.06.21 |
마크리누스 [Macrinus. AD. c.165~218] 로마 제국 제22대 황제(AD. 217~218) (0) | 2025.06.21 |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Maximinus Tracus, AD. c.173~238] 로마 제국 제25대 황제(AD. 235~238) (0) | 2025.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