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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올 [Ferréol, 1808~1853] 천주교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장-조제프 장-바티스트 페레올(Jean-Joseph Jean-Baptiste Ferréol, 1808~1853)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제3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세례명은 요셉이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을 집전하였다.
【출생 이후 제3대 조선대목구장 임명 이전까지】
【1808년】 출생하다
- 1808년 12월 27일 프랑스 아비농(Avignon) 교구의 퀴퀴롱(Cucuron)에서 태어났다.
【1838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다
- 1838년 9월 23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으나 정확히 언제 사제 서품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1839년】 프랑스를 출발하다
- 조선 선교의 임무를 띠고 1839년 4월 28일 프랑스를 출발하였다.
【1940년】 중국에 도착하여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 1월 23일 마카오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다시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 그곳에서 페레올 신부는 조선 신자들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당시 조선 교회는 기해박해(己亥迫害)의 여파로 새 선교사 영입을 준비할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 조선 신자들과의 접촉이 불가능해지자 서만자에서 약 50일 정도 체류하던 페레올 주교는 자신이 직접 조선의 국경 지역으로 가기 위해 몽골과 만주를 향해 떠나 22일후 봉천(奉天)에 도착하였다. 본래 이 지역은 포르투갈 선교사의 관할 구역이었으나, 당시에는 북경교구에서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들이 이를 시기하여 요동 지역 신자들에게 프랑스 출신 신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자, 페레올 신부는 다시 서만자로 돌아가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가 보낸 편지를 보고 양부(Yang Vou) 지역을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이 역시 요동 신자들의 방해로 실행할 수가 없었다.
【조선 대목구장 임명 이후 조선 입국까지】
【1843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다
- 어쩔 수 없이 몽골로 피신을 한 그는 1838년 8월 14일자로 벨리나(Bellina) 명의 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 대목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839년 9월 21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뒤를 이어 제3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서한을 1843년 3월 15일에 받았다.
- 그리고 12월 31일 개주(蓋州)의 양관 성당에서 만주교구장 베롤(E.J.F. Verrolles, 方若望) 주교의 주례로 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844년】 최양업ㆍ김대건에게 차부제품ㆍ부제품을 수여하다
- 성성식 후 페레올 주교는 조선 입국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때마침 자신의 성성식에 참석한 신학생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에게 조선 입국로 개척을 명하였다. 김대건은 1844년 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小八家子)로 돌아왔다.
- 페레올 주교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1844년 6월 2일 최양업ㆍ김대건에게 차부제품을, 그해 12월 10일께 부제품을 줬다.
- 페레올 주교는 그해 말 김대건과 함께 다시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조선 국경으로 떠났으나, 국경에서 아직은 선교사를 맞이할 수 없다는 조선 신자들의 이야기만을 들었다. 이에 그는 김대건만을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돌아갔다.
【1845년】 김대건의 사제서품식 집전하다, 조선에 입국하다
- 결국 김대건이 1845년 1월 1일 의주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서울에 도착한 후 해로(海路)개척에 필요한 배 한 척(이후 라파엘[Raphael] 호로 명명됨)을 구입하여 6월에 다시 상해로 돌아오자 페레올 주교는 8월 17일 상해의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그의 사제서품식을 집전하였다.
- 그리고 조선 선교를 위해 중국에 도착한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신부, 김대건 신부와 함께 8월 31일 라파엘 호를 타고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이들은 서울을 목표로 하여 출발하였으나 해류의 영향으로 9월 28일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 강경(江景) 포구로 목적지를 변경하고 제주도를 출발한 이들은 1845년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黃山浦)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 나바위에서 곧장 서울로 올라온 페레올 주교는 상복을 입고 본격적으로 신자 방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교우촌 방문 외에도 메스트르(J. A. Maistre, 李)ㆍ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영입에도 관심을 기울여 김대건 신부로 하여금 서해 해로 개척의 임무를 담당케 하였다.
-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두만강을 건너지 못하고 조선입국에 실패하자, 페레올 주교는 뿌리치기 힘든 달콤한 유혹에 빠진다. 힘으로 조선을 무력화시키려는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만일 신부님께서 세실 함장이나 혹은 다른 함장이 우리 동료들을 살해한 데 대한 해명을 요구하러 조선에 올 결심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인류와 종교에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영국 해군은 떠나면서 내년 음력 3월에 다시 오겠다고 예고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좋은 위치를 점령하면 더욱 좋겠지요. 조선의 백성은 여전히 정말로 야만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통해 문명화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45년 12월 27일 한양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입국 이후 사망까지】
【1846년】 병오박해로 김대건 순교하다, 성모성심회를 설립하다
- 김대건 신부는 해로 개척을 위해 1846년 5월 백령도(白翎島)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託送)한 후 순위도(巡威島)로 돌아왔으나 6월 5일 체포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병오박해(丙午迫害)가 발발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안전한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박해는 비교적 일찍 마무리되었지만, 페레올 주교는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9명의 신자들을 잃게되었다.
- 페레올 주교는 또 1846년 9월 6일자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그들(프랑스 군함)이 온다면, 우리 동료 신부님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요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왕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라고 강요하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좋은 수단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북경의 재중국 영사의 중재를 통해서 중국 황제에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조선의 왕에게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조용히 내버려두라고 경고하도록 말이지요”라고 청했다.
- 페레올 주교의 이러한 의식은 비단 그만이 갖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선교와 신앙’은 인간의 기본권이며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가치로, 이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해도 된다는 집단적 지성과 제국주의적 인식이 선교사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간 구원을 위해서라면 선교에 방해되는 원주민들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학살해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하고 있었다.
- 교우촌 방문을 재개하기에 앞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특별히 전능하신 이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성모 성심회’(聖母聖心會)가 설립되었다. 즉 선교사들은 1841년 교황청에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주보로 정한 것과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 호를 타고 위험한 여행을 할 때 성모마리아께 의지함으로써 보호를 받았던 일을 상기하며, 마리아의 도움으로 모든 위험을 면하였다고 믿었다. 이에 이들은 1846년 11월 2일 수리치골(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에 성모 성심회를 설립하였다.
【1847년】 순교자 전기 자료를 교황청에 보내다
- 그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또 다른 자료 수집을 위해 당시 박해를 목격하였던 신자들을 불러 증언을 듣고 자료들을 정리하였는데, 이러는 가운데 병오박해가 발발하였다. 이에 이 박해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들까지도 모아 1847년 새로운 순교자 전기 자료를 작성하고 이 자료를 교황청에 보내어 시복 시성(諡福諡聖) 청원을 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프랑스어로 작성된 이 자료를 당시 홍콩에 있던 최양업 부제에게 보내어 라틴어로 번역하게 하였고, 이 자료는 “1839년과 1846년 조선왕국에서 발생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가 수집하고 벨리나(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을 최 토마스 부제가 라틴어로 옮긴 것”이라는 제목으로 교황청에 제출되었다.
- 1847년 10월 15일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접수된 이 자료를 계기로 1857년 9월 24일부터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82명에 대한 시복 조사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총 70명이 1984년에 서울의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에 의해 시성되었다.
【1850년】 신자 수가 11,000명으로 증가하다
- 이처럼 페레올 주교의 활발한 전교 활동에 힘입어 그가 입국할 당시 6,000여 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는 1850년 11,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852년】 누적된 피로로 중병에 걸리다
- 페레올 주교는 1852년 3월 말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직후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병에 걸려 고생을 했다. 누적된 피로가 원인이었다.
- 페레올 주교는 자신에게 곧 닥칠 죽음을 이렇게 암시했다. “백약이 무효합니다. 병은 나아졌다가 다시 악화하기를 반복하지만, 근본적으로 여전합니다. 저는 더는 완쾌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결말이 곧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 주시고 저에게 베풀어 주신 도움을 이 상황에서도 베풀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다블뤼 신부가 페레올 주교를 대필해 1852년 9월 20일 서울에서 홍콩 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1853년】 과중한 업무로 사망하다
- 신자 수가 1853년 12,175명으로 급증하였다.
- 하지만 그는 사목 활동을 펴 나가는 데 있어 주로 양반 계층들을 신임함으로써 일반 신자들의 반발을 사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 쉴새없는 교우촌 방문과 선교사 영입등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1951년부터 점차 건강이 쇠약해진 페레올 주교는 결국 1853년 2월 3일, 4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4월 12일 김대건 신부가 묻힌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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