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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권] 제7장 : 한국독립운동의 특징과 의의
[제1절] 한국독립운동의 특징
- 독립운동의 주체는 민족이다... 민족운동에는 시민혁명운동과 민족해방운동, 민족통일운동 등 세 가지 형태가 있다... 민족해방운동은 종속해방운동과 식민지해방운동으로 나뉘어지는데 종속해방운동은 반(半)식민지해방운동으로서 구국운동이라고하고, 반식민지가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의 식민지해방운동을 독립운동이라 한다. 그런데 반식민지해방운동은 과거의 중국처럼 반식민지해방운동으로 끝난 경우도 많으나, 한편 반식민지해방운동을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경우도 많았다. 그럴 경우에는 반식민지해방운동인 구국운동이 식민지해방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독립운동은 종속해방운동인 구국운동을 선행운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통례이다. (289-290)
- 모든 사회운동은 근대사의 산물이다... 민족운동이나 민족주의는 근대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은 근대 제국주의와 그의 식민지 지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이란 일련의 민족적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290)
- 한국독립운동은 구한말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나타났던 구국운동에서 비롯되어 1919년 3ㆍ1운동의 분수령을 넘어 1920년대의 민족 총력항쟁의 시기를 거쳐 1930년대에는 이른바 조직을 정비하면서 일제 패망을 전기한 1940년대에 독립전쟁을 통하여 해방을 맞는 것으로 대단원을 내렸다고 하겠다. (290)
- 제국주의가 세계를 압도하던 1900년 전후의 100년 동안에는 지구의 8할의 인구가 제국주의의 지배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290)
1. 독립운동의 지구성
- 한국의 독립운동은 50년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1910년대는 독립운동의 공간을 해외로 확장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전열을 정비하고 역량을 축적하여 거족적인 3ㆍ1운동의 결실을 맺었다... 1920년대에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모든 영역에 걸쳐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291)
- 1930년대에도 독립운동 전체를 통할할 조직의 발전은 없었다. 윤봉길의 상해의거 후 임시정부가 활력을 되찾기는 했으나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중국 각처를 이동하느라고 전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즉 정부적 역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292)
-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 1935년에 좌파연합의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고 우파에서는 한국국민당이 결성을 보았다...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우파정당인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이 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민족혁명당을 중심한 좌파정당은 조선청년전위동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혁명자연맹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8ㆍ15 당시 독립전쟁을 수행하던 무장단체는 중경의 한국광복군, 연안의 조선의용군, 소련 88여단의 한인부대가 있었는데 총 인원은 2천명 정도였다. (292)
2. 독립운동의 세계성
- 1909년 연해주에 유인석, 이범윤, 최재형, 안중근 등의 의병운동이 전개되었고, 또 『해조신문』과 한민학교를 중심한 계몽운동도 활발하여 해외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1895년 김구가 참가한 김이언의 강계의병은 만주 삼도구에서 결성한 것이고, 이듬해 유인석의 호서의진은 초산을 거쳐 관전현에 들어가 활동한 바가 있었다... 1906년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의숙은 만주 용정에 있었다... 본격적인 것은 1908년으로보아야 할 것 같다. (293)
- 1903년 미주에 이민 또는 망명에 의한 동포사회가 형성... 1908년에 장인환, 전명운의 스티븐스 처단에 이어 1909년 박용만을 중심한 덴버의 해외독립운동지도자총회와 네브라스카 소년병학교가 설치되면서 미주동포의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기에서 1905년 안창호 등이 공립협회와 『공립신문』을 간행한 것과 같이 선행 민족우농이 있었으나 독립운동의 본격적인 전개는 1908년 부터로 보인다. (293)
-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의 전개는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한 후부터 더욱 확대되었다... 1904년 이한응이 자결한 런던과 그곳의 한인친목회, 헤이그의 1907년 만국평화회의 활동과 이준의 순국, 국제사회당이 열렸던 암스테르담이나 제네바, 1911년 이범진이 순국한 페테르부르크, 그리고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무수하게 드나드는 이르쿠츠크와 모스크바 등 세계 곳곳이 한국독립운동의 무대였다. (293-294)
- 세계를 무대로... 당사국의 정책에 따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현지 정부와 가장 관계가 복잡했던 곳은 러시아... 1910년 대한제국 멸망에 항거하여 유인석, 이상설 등이 성명회를 결성하여 국제적으로 항쟁을 전개하자 러시아 정부는 독립운동자를 검거하고 문창범 등 7명을 이르쿠츠크 지방으로 유배시켰다.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다시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때 대한광복군정부를 결성하고 활동을 개시한 이상설, 박은식, 신채호 등이 중국으로 탈출하였으며 이동휘는 옥에 갇히는 불운을 당했다. 그후 1917년 2월 혁명과 더불어 다시 활동을 계속했으나 10월 혁명 후에는 일본군이 진주하여 4월참변과 자유시참변 등 혁명의 와중에서 수난이 적지 않았다. 1922년 10월 25일 러시아혁명이 끝난 뒤에는 소련에서 독립운동은 불가능하였고 한인 독자적 조직에 의한 공산주의운동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서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리하여 현재 대부분의 동포가 강제이주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294)
3. 독립운동 이념의 다원성
- 전통 보수사상과 신진 진보사상이 양립되었던 사실은 언제 어느 나라에나 있던 역사 변혁기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인도주의와 사회개조의 구체적 방법으로 자유주의ㆍ사회주의ㆍ무정부주의가 3ㆍ1운동 뒤인 1920년대에 확산되어 갔다. 그것은 3ㆍ1운동 전까지의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고 인도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295)
- 민족주의의 요구는 세계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전단계에 한시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한시적 기간에는 민족주의가 세계주의와 모순되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 그러한 논리자 정착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의 이야기... 그 전에는 대체로 자유주의자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로 양분되어 세계주의자는 독립운동을 포기하였고, 반면 민족주의자는 구한말에 종족주의, 1920년대까지는 국수주의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는 신간회를 결성한 시기를 제외하면 당장에 세계주의를 달성할 듯이 세계혁명론을 고집하고 있었다. 세계혁명과 민족혁명의 시기와 그에 대한 논리가 비교적 분명했던 것은 무정부주의의 노선이었다. 아시아 무정부주의운동에서는 1922년 극동인민대표회의가 끝난 1923년부터 민족주의의 노선이 분명해진 것 같다. (295-296)
- 운동자의 당대에 세계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공상... 세계사조의 오류... 당시는 세계주의와 국제주의를 혼동하고 있었다... 세계주의의 꿈을 실현하자면 민족주의의 기초 위에서 국제주의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국제주의의 단게란 유럽연합이 노리는 국가연합 같은 블록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변형일 뿐이다... 국제주의 단계란 민족국가간의 다국적 사회가 형성된 상태를 일컫는다... 복수 시민권... 민족주의에서 바로 세계주의로 비약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다... 1920년대에 국제주의는커녕 민족주의의 단계도 거치지 않고 세계주의 실현을 성급하게 제기하여 판단을 흐려놓았다. 하물며 식민지하의 민족으로서 민족주의를 외면한 논리는 너무 공허한 주장이었다. (296)
- 민족주의 문제를 살핌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개량주의... 제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제2인터네셔널이 해체될 때 사회주의 진영에서 제기된 말... 자본주의와의 공존을 인정하고 의회주의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계산한 논리를 혁명적 사회주의측에서 개량주의라고 비판한 데서 비롯... 그들의 노선은 1957년 프랑크푸르트 국제사회당에서 정의한 민주사회주의 노선이다... 1920년대에 사용하기 시작한 개량주의는 민족운동상의 개량주의를 의미... 식민통치체제와 공존하면서 민족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노선... 그것이 이른바 타협적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식민 궈력과 타협하면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느냐는 별도의 논쟁이 있어야 할 문제이다. (297)
- 임시정부에서 채택하고 있던 삼균주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수정자본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였다고 하겠다. 삼균주의는 1931년에 조소앙이 제창한 것으로 그에 앞서 안창호가 제창한 대공주의와 표리관계의 내용이었다. 즉 대공주의는 삼균주의로 이론이 구체화되었다고 이해된다. 그후 삼균주의는 1930년대 각 정당의 강령에 반영되었고 1940년에는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에 임시정부 헌장의 이념이 된 것이다. (297)
- 사상의 다원적 특질은... 전통적으로 다종교 국가였던 한국사의 특질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아량과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일 것... (297-298)
4. 조직의 분산과 협동전선
- 조직이 분산되어 있었다는 것은 사상의 다원성에만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방략의 차이에 기인한 바도 컸다... 분산된 것보다 대립 분열하여 서로 부정적 존재가 도지 않았던가의 여부가 문제였다... 연합과 협동전선이 꾸준히 추진... 협동전선이란 이념을 달리하는 조직이 공동의 목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 같은 방략을 세우고 협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통합이나 통일과는 달랐다... 단지 통일의 전제일 수는 있었다. (298)
- 오늘날 남북한에서 연합이니 연방이니 하면서 공히 통일의 전단계로서 협동전선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역사의 산물로 이해된다. (299)
- 협동전선의 형성을 위한 선구적 노력은 1919년 임시정부의 통합정부가 수립될 때 연립내각을 형성했던 사실과 1923년 5개월간에 걸친 국민대표회의였다. 그런데 그 두 사실은 통합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협동전선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26년부터 국내외에서 일어난 민족유일당 또는 민족대당 결성의 추진이었다.... 신간회 결성... 1931년 신간회를 해산하면서 또 안재홍의 그를 만회하려는 노력이 무산되면서 협동전선이 붕괴되는 듯 했다... 1932년 상해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출범하여 새로운 시도가 진행되어 주목을 끌었다... 1935년 남경에서는 민족혁명당, 1936년 만주에서는 조국광복회, 1937년 남경에서는 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 1938년 한구에서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이 결성되었고, 1939년 이것을 총망라한 협동전선의 방안으로서 7당회의와 5당회의가 중국의 오지인 기강에서 열렸던 것이다. 그때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299)
- 1942년에 중경에 있던 양대 정당인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이 연합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무정부주의연맹 등의 군소정당까지 제휴받아 임시정부의 통합의회를 구성함으로써 연적한 과제의 일단을 해결한 셈이 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김구는 장건상을 파견하여 연안의 조선독립동맹을 이끈 김두봉과 교섭하여 협동 연합에 합의... 그때에 8ㆍ15을 맞아 실현을 보지 못했을 뿐... (299-300)
- 꾸준히 통일을 지향한 협동전선이 추진되어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 (300)
5. 방법과 전략의 다양성
-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의 실력양성 노선이 양립... 1910년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통합하면서 합류... 두 노선의 통합이란 사회진화론적 계몽운동이 의병의 독립전쟁 노선으로 수정한 것을 말하지만 의병은 계몽주의의 근대적 정치이론을 수용하므로써 두 노선이 합류하면서 발전하였다. (300)
- 의병노선을 고수... 독립의군부와 민단조합, 1923년 만주에서 결성한 대한독립단... 복벽주의의 봉건성이 대중적 호소력을 갖지 못하여 생명이 길지 못하였다... 계몽주의 노선을 고수.. 1910년대 조선산직장려계... 1920년대에 사회진화론을 지킨 민족 개량주의의 길을 열었다. (301)
- 개량주의 외에는 3ㆍ1운동을 계기로 사회진화론의 사고에서 탈피하여 절대독립을 목표한 독립전쟁론자가 되었다... 1923년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잘 나타나 있는 의열투쟁론이나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혁명론이나 이른바 민족주의 좌파의 비타협론도 모두 독립전쟁론과 같은 범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01)
- 외교론ㆍ실력양성론... 외교론은 이승만을 중심한 미주동포의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던 방략... 외세 인식에 결함... 외교론은 종속론에 함몰할 위험성이 있었다... 실력양성론은 민족개량주의의 방략이었다... 민족주의의 가냘픈 유형으로 의미가 있을런지는 몰라도 독립운동의 방략은 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민족주의의 범주에도 포함될 수 없다는 주장도 강력하다... 친일파로 전락하는 등 민족주의에서 떠나버렸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301-302)
- 자치론... 인도의 독립운동에서 자치론이 중심 방략... 한국독립운동에서도 그것을 의미있게 평가하려는 논의... 식민통치의 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논의... 간접통치에서 자치론은 민족공간의 확대를 겨냥한 것이지만 직접통치에서 자치론은 식민통치의 통로를 확장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식민지시대 자치론은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다. (302)
- 망명정부와 임시정부 수립의 전략... 망명정부의 계획... 1) 1910년 유인석이 연해주에서 광무황제에게 망명을 종용한 밀서... 2) 1915년 이상설 등의 신한혁명당의 계획... 3) 이회영의 추진... 그런데 1917년부터는 망명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의 수립이 추진되었다. 광무황제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 보황주의를 버리고 공화주의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 1917년 민족의 고유주권선을 선언하며 국내외에 전달된 대동단결선언... (302-303)
6. 운동양상의 격렬성과 민중의 주도성
- 독립운동의 전개양상은 자연히 격렬한 투쟁 양상... 일제 식민통치의 극단적 잔학성에 대한 상대적 현상이기도 했다. (303)
- 학생이 중산층 가정의 자녀라고 해도 민중의 이익을 대변한 민중운동 지향성을 지니고 있었다. (303)
- 민중은 불특정한 대중 가운데 운동 주체로 성장한 특정한 대중을 가리킨다. 그러한 민중이 역사에 부상한 것은 조선후기 홍경래란이나 삼남민란에서 비롯... 독립운동에서 민중운동이 부각된 것은 동학농민전쟁 제2차 봉기부터의 일이다... 1910년대에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민중의 존재조건이 더욱 악화되어 3ㆍ1운동의 대중화 과정에서 민중은 3ㆍ1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후 격렬한 민중운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어떠한 제한독립론도 거부한 절대독립론을 확립해 갔던 것이다. (304)
[제2절] 독립운동의 성과
1. 독립운동의 자율성과 타율성 문제
- 독립운동은 민족의 자주의식이 성장해 있었으므로 전개될 수 있었다... 자율성? ... 독립운동자나 그에 애정을 가진 사람은 ‘광복’이라고 말하기 좋아한다... 독립운동을 냉정하게 보려는 사람은 ‘해방’이라고 말한다... 친일파라면 ‘종전’이라고 하기 좋아한다... 독립운동 역사보다 8ㆍ15이후의 문제에 더 관심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분단 60년’이라고 말한다. (305-306)
- 광복과 해방과 분단이 동시에 나타난 것... 미소가 해방이 되자마자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광복의 길을 막고, 남북을 분단 점령한 데에 이유가 있다... 미소가 강대국의 패권주의 정책을 구사한 탓이지만 우리로써는 미주나 소련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이 그들의 패권주의의 예각을 꺾을만한 수준이 되었던가를 생각해야 한다... 미주의 외교론... 독립을 미국에 의지하고 담보할 꼴이 된다... 미국으로서는 한국독립운동의 주체성을 의심하거나 주목하지 않을 수 있다. (306)
- 소련은 레닌의 경우를 제외하면 러시아제국 이래 한국인과 한국독립운동을 무척 괴롭힌 나라... 스탈린의 안중에 한국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해방정국에 관여함으로써 강제이주의 죄과를 은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는 일... (306)
- 타율적인 분단 60년... 개화파의 타율성은 3ㆍ1운동을 통해 극복... 1차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중심한 국제정국에 의지하여 3ㆍ1운동이 일어났다는 일제 경찰보고에서 제기된 타율성... 오히려 국제사회가 변하면 민첩하게 이용하고 대처해야 할 것은 오히려 주체적인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함... (307)
- 장개석의 후원은 김구나 김원봉의 성공적인 성과로 보아야 한다. 중국군 작전 안에 있던 무장부대의 경우도 같은 것... 국제법상 타국에서 무장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인데 당사국의 작전을 이용하여 실익을 도모한 활동이 타율성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만주에서 참혹하게 나타났던 민생단 사건 같은 경우는 별도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308)
- 독립운동에서 분단을 잉태하고 있었던가의 문제... 다양하고 다원적인 것을 분단의 전주로 이해한다면 일당독재가 아닌 정당국가들은 모두 분단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분단은 국재제패에 의한 산물일 뿐이다... 국토분단을 민족분단으로 확대 심화시켰다면 그것은 민족의 책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08)
- 독립운동의 주류는 추체적으로 전개... 8ㆍ15해방과 더불어 광복으로 가는 것인데 미소가 점령하여 독립운동의 성과를 가로막고 분단 점령한 것... 그러나 국토의 분단을 민족분단으로 가져간 책임은 우리민족 자신에게 있다. 그 책임은 통일을 달성하는 것으로 극복될 문제인데 민족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308)
2.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의 발전
- 민족, 민족의식,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논리적으로 정립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구한말의 문서를 보면 민족과 종족은 같은 의미로 사용... 민족주의의 이해도 대체로 3ㆍ1운동 전까지는 종족적 민족주의, 그 후에는 국수적 민족주의로 이해하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보편적 민족주의로 이해하는 등 단계적으로 변천하였다. (309)
- 일본은 8ㆍ15까지 민족을 종족과 같은 의미로 사용... 황도사상에 근거한 국수주의를 민족주의로 이해한 군국주의자의 논리가 일반 이론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309)
- 서양에서는 근대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 국민 또는 민족의 개념이 섰고 나폴레옹전쟁을 전후하여 내셔널리즘이 대두하였다... 서양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 형성된 바도 없었고 우리와 같은 민족주의가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자신들과 다른 민족주의는 모두 종족주의로 보았다. (309-310)
- 신채호의 경우를 보아도 그가 국가주의 논리에서 봉건적 한계를 떠나 민족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7월의 『독사신론』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런데 그때의 민족주의는 국민주의와 종족주의의 복합체로 이해한 것 같았다. 따라서 그의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로 성장하게 되었다... 박은식, 장도빈, 황의돈, 권덕규... (310)
- 1930년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국수주의가 극복되고 있었던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안재홍의 민세주의, 해외에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 민족주의의 보편적 논리가 수립되었다... 민세주의의 민족과 세계의 모순 없는 발전을 꾀하는 논리나, 삼균주의의 인균, 국균, 족균의 논리가 국수주의를 극복한 구체적 내용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민족이나 민족주의 논리가 크게 발전하였다. (310)
- 민족의식이나 민족주의가 대중화되었던 사실... 3ㆍ1운동과 더불어 민중운동이 크게 성장하면서 항일의식에 이은 민족의식이 크게 확산되어 갔다... 1930년대에 이르면 시민적 테두리에 국한하지 않은 즉, 모든 계급을 총괄한 이론의 방향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것을 해방 후에 신민족주의라고 하였다. (310-311)
3. 근대 정치이론의 발전 모색
- 의병전쟁에서는 허위 등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정치이론을 제시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치이론이 있었다면 중세적 복벽론... 계몽주의는 근대국가 이론은 개발하고 있었으나 독립운동으로는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311)
- 독립운동자들은 ‘신한’(新韓)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근대국가의 정치 이론은 3ㆍ1운동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갔다. 3ㆍ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는 극복되었다... 7개의 임시정부가 모두 민주공화국을 표방... (311)
- 3ㆍ1운동 후 자유주의ㆍ사회주의ㆍ무정부주의의 이론이 확산... 임시정부와 정당들이 개발한 정치이론은 만주와 러시아지역, 그리고 미주지역 인사들의 정치 식견과 함께 해방 후 신국가 운영이론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312)
- 제도적으로 근대사회의 장치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경장부터... 그 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일제 침략에 대항하는데 국력을 소모하느라 봉건적 제도와 사상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다. (312)
- 식민통치에서는 청산하지 못한 봉건적 잔재를 식민수탈의 유용한 기능으로 법제화하고 구조화하였다. 그것을 식민성 봉건체제라고 한다... 양반체제가 존속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 양반 후예들은 식민지 속에서 안주한 사람이 많았다... 봉건적 여맥을 유지시켜 준 장치가 1910년대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 봉건적 양반이 식민지 지주로 새롭게 변신 군림하게 되었다. (312-313)
- 해방 후 친일파가 준동하면서 신국가 운영과 신사회 건설에 차질을 빚기는 했으나 역사의 큰 흐름은 독립운동 의지에 의해 발전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의지가 맥맥히 흐르고 있으므로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 정권도, 일본군 출신이 주도한 5ㆍ16정권도 겉으로는 과거의 자기 실체를 감추기에 급급하였고, 감추었다고 해도 민족적 신뢰를 얻을 수 없어 한시적 존재로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313)
- 결국은 독립운동 의지가 정권이나 역사를 지배해 가고 있는 것이다. (313)
4. 민족문화의 성장을 촉진
- 1933년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식민지시대에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살아있다는 증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국학연구가 추진... 주시경을 비롯하여 최현배, 이윤재, 김윤경, 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인사들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계봉우, 김두봉, 홍언 등의 활약이 괄목되어 오늘날 해외동포의 민족어 보존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314-315)
- 박은식, 신채호, 황의돈, 장도빈, 안확, 권덕규,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최익한, 손진태, 백남운, 이청원, 이북만, 김광진 등의 민족사학자... (315)
5. 한민족의 국제적 지위 향상
-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독립운동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널리 떠 강인한 민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07년 이상설, 이준, 이위종의 헤이그만국평화회의... 1908년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 전명운의 의거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315)
- 3ㆍ1운동에 감탄하여 미국의 많은 유명 인사가 한국의 지원자가 되었고, 레닌은 소련혁명의 어려운 가운데서도 1920년에 2백만 루블을 임시정부에 지원하겠다고 나섰으며 40만 루블은 당장에 내놓을 정도로 한국독립운동에의 동조자가 되었다... 제네바와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 결의하였고 중국,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는 한인친목회가 결성... (316)
- 1932년 유봉길의 의거 때는 전세계 제국주의를 반성하는 각국의 언론 보도를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중경의 임시정부... 조선의용군과 동북한일련군 한인부대의 활약...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을 결의... (316)
-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일본이나 다른 남들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바로 독립운동이 국제적으로 각인된 결과라 할 것이다. (317)
[제3절] 독립운동의 반성과 과제
- 국토분단이 미소 패권주의의 결과라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민족 역량의 한계는 독립운동의 반성을 통해서 극복의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318)
1. 독립운동의 지역성
- 해외에서 자연 동향인들의 모임... 동향인간에 교류가 잦았던 사정... 초기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여든 주변 인사를 보면 그 지도자의 동향 인사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 (319)
2. 독립운동의 공명성
- 만주에서 독립군간의 알력... 1935년 임시정부의 존속 여부를 놓고 참여와 이탈이 연속되었던 사실도 이념의 논쟁이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이철부(한위건)와 장지락(김산)의 상쟁이 두 사람의 비극적 최후를 만들었고, 만주의 민생단 사건도 나중에는 한인 공산주의자 사이의 분쟁이 개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중공에서 안공근이 행방불명된 경우... 서안에서 현이평과 나월환의 암살사건도 독립운동의 치부였다. 미주에서 박용만ㆍ안창호ㆍ이승만의 상쟁은 지도자의 수준을 의심할 정도... (319-320)
3. 독립운동의 갈등 연장
- 동족간에도 격정의 관계가 비극을 몰고 온 경우... 정순만, 박용만, 김좌진, 김규식, 현익철 등의 비운의 최후...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등의 비극... 독립운동에서 절대독립을 추구하다가, 절대 논리를 좋아하는 버릇이 생겨 처변의 안목이 경색되었는지도 모른다. (320)
4. 외세에 대한 인식의 한계
- 대한제국의 멸망은 당시의 지도자들이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독립협회 당시에도 열강이 우리의 통신 시설이나 철도를 부설하는 것을 문명적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으로 착각... (321)
- 외세 인식의 한계는 독립운동 선상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죽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보니 중국에 의지하고, 소련에서는 소련 정부에, 미국에서는 미국정부에 의지하려고 했던 경향... 외세는 이용해야지 의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외세의 향방을 정확히 살펴서 불가항력일 때는 그것을 유익하게 이용하는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321)
5. 봉건적 잔재 청산 미흡
- 봉건 잔영이 해방 후에도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아직까지도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간혹 봉건적 전통을 전통문화를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미화하는 오류까지 범하고 있는 것... (321-322)
6. 친일파 형성과 독립운동 역량의 부족
- 친일파를 규탄하기에 앞서 민족역량의 총량을 고려한 안목을 가지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 문제를 중심한 식민지시기의 청산 작업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식민지 잔재, 해방정국의 오류, 군사정권의 찌꺼기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쓰러진 고목에서 돗버섯은 다시 돋아날 것이다. (322)
- 독립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주체의식과 민족주의를 성장시키며 근대민족국가의 운영이론을 발전시킨 점은 큰 성과였다. 그리고 근대사회 형성의 추진 역량을 신장시킨 것과 민족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323)
- 독립운동 최대의 목표였던 민족국가 건설을 달성하지 못한 채 분단 60년이 되고 보니 무엇보다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관점에서 반성할 것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방파벌을 극복하는 묘안을 찾아야 한다.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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