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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제4장. 1. 중국을 통한 한국선교 시도

by [*수호천사*] 2025.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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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4. 기독교의 수용

1. 중국을 통한 한국선교 시도

 

1) 귀츨라프의 내한 / 91

 

181694~5, 충청도 서천군 마량진에 함장 맥스웰( Murr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이 이끄는 영국함선 알세스트(Alcest)호와 리라(Lyra)가 나타나 일대를 탐사하였다. 이때 선박을 조사하기 위해 승선한 마량진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은 성경 한 권씩을 증정받았다.... 순조실록3, 순조 16(1816) 7월 병인... 기록으로 확인된 한국 최초의 성경 전달... [91]

 

기록상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한 기독교(개신교) 선교사는 프로이센 지방, 현재 폴란드 출신의 귀츨라프이다. 그는 처음 네덜란드 선교회와 관계를 맺었다가 뒷날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줄을 대어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는 개신교 선교가 서구제국의 동양진출과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91-92]

 

기독교의 동양선교... 영국인 케어리(William Carey)의 인도 선교(1793)... 모리슨(Robert Morrison)의 중국선교(1807)... 스코틀랜드 출신의 밀른(William Milne)1813년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마카오에 도착... 영국 회중교회의 중국선교사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도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1817년에 말래카에 도착, 모리슨과 밀른을 도와 출판사업을 통한 선교에 종사하였다. [92]

 

귀츨라프는 런던에서 모리슨의 중국 선교담을 듣고 선교에 뜻을 두게 되었고, 18267월 네덜란드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동남아의 바타비아(자카르타)를 향하여 출발, 이듬해 1월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런던선교회 소속 메드허스트의 집에 여장을 푼 귀츨라프는 그의 권유에 따라 두 차례에 걸쳐 사이암 선교에 나섰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아내와 사별하고 중국으로 향하였다. 그는 중국의 동남해안의 영파(寧波)ㆍ상해(上海)를 거쳐 천진에 이르렀고, 다시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거쳐 마카오에 이르러 모리슨의 집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귀츨라프는 1832년 당시 중국무역권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로부터 1천 톤급의 군함 로드 암허스트호를 마련하여 중국 북쪽과 한국ㆍ오키나와ㆍ타이완 등을 순방할 계획이었는데, 통역 겸 선의(船醫) 요청을 받았다. 순방의 목적은 영국과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는 것과 통상의 가능성을 살피는 데에 있었다... 로드 암허스트호는 1832년 2월 광동을 출발하여 7월 17일 한국 해안에 나타났다(황해도의 서해안 장산곶 부근)... 7월 23일경 다시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 앞에 정박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에 머물면서 지방관을 만나 국왕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선물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귀츨라프는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만났다(린제이의 1832727일자 일기)... 서울에서 통역관을 대동하고 내려온 특사는 서한과 선물을 돌려주면서, 중국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92-95]

 

어쨌든 이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 날을 오게 하기 위해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미약한 첫 방문사업도 축복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한국 땅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95]

 

2) 윌리암슨의 한국선교 지원 / 96

 

아편전쟁의 결과 1842년 영국과 남경조약이 체결되어 상해ㆍ영파ㆍ복주ㆍ하문ㆍ광주 등이 개항되었다. 이어 1844년 미국과 망하조약, 프랑스와 황포조약이 체결되었고, 1858년에는 러시아ㆍ미국ㆍ영국ㆍ프랑스와 천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외국인이 중국에서 거주할 수 있는 조계지가 설정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은 9개국에 28개처의 조계지를 허락하였다... 구미의 선교단체들이 중국 선교에 나섰으며, 윌리암슨(Alexander Wiiliamson)의 한국선교도 추진되었다. [96]

 

윌리암슨은 1855년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중국에 와서 활동하다가 과로로 2년만에 귀국하였고, 1863년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중국주재 책임자가 되어 다시 중국을 찾아 동문서회(同文書會)를 조직하고 묵해서관(墨海書館)도 설치하였다. 지푸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그는 1865년 황해를 건너온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 토마스 목사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 후 토마스는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다량의 한문성경을 받아 제1차 한국방문에 나섰다... 윌리암슨은 북중국과 동몽고를 여행하며 성경반포 및 복음전파에 힘썼으며, 1867년 봄 만주여행에서는 개시(開市)에 참여한 한국상인들에게 전도하였고, 동지사 일행인 이풍익도 만났다. 1867년 가을 개시 때는 책문에 가서 전도하며 한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aclntyre)가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는 데도 영향을 미쳤으며, 1883년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의료선교사 다우드웨이트(Arthur W. Douthwaite)가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업무차 한국을 방문한 것도 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96-97]

 

3) 토마스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 97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97]

  • 민경배, “로버트 토마스 : 한국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교섭의 문제,” 『교회와 민족』(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 한규무,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 「한국기독교와 역사」 8(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 고무송,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쿰란출판사, 2001)
  • 유해석, 『대동강가에 떨어진 한알의 밀알 : 토마스 목사전』(생명의말씀사, 2006) 

 

영국 웨일즈의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는 런던대학교의 뉴칼리지에서 학사 및 신학과정을 밟아 1863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런던선교회 상해주재 책임자 무어헤드(Wm. Muirherd)와 불화를 겪자 1864년 사표를 제출하고 이듬해 1-8월 영국인 하트(Robert Hart)가 세관장으로 있던 청국해관에서 통역으로 근무하였다. [97-98]

 

윌리암슨의 소개로 한국에서 건너온 천주교인들을 만난 뒤 한국선교의 열망을 품고 1865년 9월 지푸를 출발하여 같은 달 9월 13일 한국 서해안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그는 2개월 반을 머물며 한 조선인 천주교 신자의 도움으로 귀한 복음 진리를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정도의 말을 배웠으며 윌리암슨에게 받은 성경을 한국인들에게 반포하였다. 그후 서울로 출발했지만 태풍을 만나 만주로 귀환하였고, 런던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18661월 새 임지인 북경에 부임하였다. [98]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알고 통역으로 승선하였다. 이 배에는 영국인 호가드(Hogarth)를 비롯하여 5명의 백인과 19명의 아시아인(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이 동승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 지푸를 출발하였다. 대동강에 도착... 토마스는 자신들은 천주교와는 다른 야소성교(耶蘇聖敎)’ 즉 기독교(개신교)를 믿으며, 이를 전파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밝혔다... 처음에 친절을 베풀던 한국측은 중군 이현익이 그들에게 억류당하고 제너럴 셔먼호에서 대포 및 소총을 쏘기 시작하자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퇴교(退校) 박춘권이 이현익을 구출하였다... 1866년 9월 2일, 대동강 수위가 낮아지면서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된 제너럴 셔면호가 화공을 받아 불길에 휩싸이자 선원들은 물로 뛰어들어 뭍으로 올라왔고, 격분한 군민들은 그들을 모두 결박ㆍ타살하였다.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며 이때 토마스의 나이 27세였다. [99-100]

 

토마스 선교사가 선교를 위해 한국에 왔다가 피살되었으나,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올라오다 소각되고 선원들이 피살될 때 그 역시 운명을 같이하였으므로 과연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있느냐라는 견대도 있다 = 한규무,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 「한국기독교와 역사」 8(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들과 한국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김명호,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박규수,” 「대동문화연구」42(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3) 참조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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