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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제5장. 1.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by [*수호천사*] 202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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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1]

5. 선교의 자유와 초기 선교활동

1.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1) 선교사ㆍ선교부의 내한과 정착 / 135

 

매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해 고종에게 허락받은 선교사업은 ‘학교와 병원’ 사업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선교부도 선교사를 선발할 때 이 두 가지 사업을 염두에 두었다. 그 결과 1884년 말 북장로회에서는 의료선교사 알렌과 교육선교사 언더우드를, 미감리회에서는 의료선교사 스크랜턴, 교육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대부인을 각각 선발하였다. [135]

 

당시 국내사정은 1884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여파로 개화파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선교사들의 입국도 안전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이들은 일본에 머물면서 매클레이ㆍ루미스 등 선교사들과 교류하면서, 유학 또는 망명 중인 한국인들로부터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배웠다. [136]

 

북장로회의 언더우드와 미감리회의 아펜젤러 부부는 18853월말 나가사키를 출발하였다. 42일 부산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45일 부활주일 오후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창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사슬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136]

 

입경을 만류하는 미국대리공사 폴크(Foulk)의 충고를 듣고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갔고, 언더우드는 입경하여 알렌이 세운 제중원에서 교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8855월에는 스크랜턴이 혼자 입국하였고, 6월에 스크랜턴 대부인과 아펜젤러 부부가 합류하였다.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 헤론(J. W. Heron) 부부도 도착하였다. 이들은 정동 미국공사관 근처에 사택을 마련하고 선교에 착수하였다. [137]

 

영국성공회... 1885년 말에는 중국 남부 복주(福州)에서 활동하던 영국성공회 선교회에서 중국인 2명을 부산에 파송하였다. 이어 중국과 일본의 영국 성공회를 관장하고 있던 울프(J. H. Wolfe) 주교가 1887년 한국을 방문하고 부산에서 진행중인 선교활동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그 후 울프 주교는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지체 말고 본국 교회에서 선교단을 파송하는 조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벤슨(Benson) 대주교는 188911월 영국해군 군종사제 출신인 코르프(C. J. Corfe) 신부를 초대 한국주교로 서품하여 영국성공회의 첫 번째 한국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코르프 주교는 비교적 보수적이며 국익을 위주로 하는 선교단체인 복음전도협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에서 재정지원을 받으며... 랜디스와 함께 18909월 인천에 도착하였다. [137]

 

1887년 한국선교 지원을 요청한 울프의 서한은 같은 영연방국가였던 호주에도 전달되었다... 이 서한은 매카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발행하던 선교지에 실렸고, 이에 한국선교를 결심한 데이비스(J. H. Davies) 목사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Mary Davies) sms 188910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신도협회(Fellowship Union)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 데이비스는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오랫동안의 여행으로 병을 얻어 18904월 사망하였고, 동생도 8월 호주로 귀한하였다. 그러나 데이비스의희생은 오히려 호주장로교회 전체에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189110월 맥케이(J. H. MacKay)ㆍ멘지스(B. Menzies)ㆍ포오셋(M. Fawcett)ㆍ페리(J. Perry) 등이 파송되었다. [138]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189110월 북장로회의 언더우드는 휴가차 미국에 돌아갔을 때 내슈빌에서 열린 미국신학생 해외선교연맹 집회에서 강연하였는데, 이때 휴학 중이던 윤치호도 강사로 참여하였다. 이 집회에는 남장로회 소속 신학생들도 참석하였으니, 매코믹신학교의 테이트(L. B. Tate), 유니언신학교의 존슨(C. Johnson)ㆍ레널즈(W. D. Reynolds) 등이 그들이었다... 여기에 레널즈의 친구였던 전킨(W. M. Junkin)이 합류하여 함께 기도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하였다. [138-139]

 

남장로회 본부에서는 재정문제로 난색을 보였으나, 언더우드와 그의 친구들이 3천 달러, 언더우드의 형(John Underwood)2천 달러를 선교기금으로 내놓자 마침내 1892년 초 한국 선교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자원한 신학생 중에 테이트ㆍ레널즈ㆍ전킨, 그리고 여성들로 테이트의 여동생(M. Tate)과 데이비스(L. Davis)ㆍ레이번(M. Leyburn)ㆍ볼링(Bolling) 등이 첫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211월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남장로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139]

 

윤치호의 노력으로 남감리회의 한국선교도 이루어졌다. 개화사상가였던 윤치호는 18847월 고종의 선교사업 윤허가 내려질 때 통역으로 참석한 바 있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 일어난 갑신정변 이후 중국 상해에서 유학하다가 그곳 남감리회 선교부가 운영하던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재학 중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1888년 도미하여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수학하였는데, 이 무렵 여러 곳에서 한국선교를 요청하는 강연을 하였고, 에모리대학 캔들러 총장에게 선교기금으로 2백 달러를 기탁하며 남감리회의 한국선교를 요청하였다... 18952월 귀국 이후에도 윤치호는 계속 남감리회 관계자들에게 한국선교를 요청하였다. 이에 189510월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가 내한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조사하고 돌아갔으며, 이듬해 5월 리드가 선교사로 다시 내한함으로써 남감리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139-140]

 

캐나다장로회의 한국선교는 1898년에 시작되었으나, 캐나다인이 개인자격으로 내한하여 선교한 것은 1888년부터였다. 즉 게일(J. S. Gale)이 토론토대학 기독교청년회(YMCA)의 후원을 받아 188812월 내한하였고, 펜윅(M. C. Fenwick)이 토론토 실업인들의 지원을 받아 1889년 말에 내한하였다. 18909월 토론토의과대학 기독교청년회의 후원을 받은 하디(R. A. Hardie), 18937월 에비슨(O. R. Avison)이 내한하였다. 이들 4명은 토론토에 근거를 둔 선교사들이었다. [140]

 

18931218일에는 매켄지(W. J. McKenzie)가 캐나다 연해주 지역 장로교대학 선교협의회의 파송을 받아 내한하였다. 그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인 황해도 소래에 머물면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겪었고, 헌신적으로 교인들을 돌보며 교회건축에 힘쓰다 18956월 사망하였다. 매켄지의 희생은 캐나다장로회 교인들의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후임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소래교회 교인들의 서한이 전달되자 노바 스코시아(Nova Scotia)의 교회들이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캐나다장로회의 메리타임대회에서 189710월 한국선교가 결정되었고, 이어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도 이 결정을 받아들여 한국선교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그리어슨(R. Grierson)ㆍ맥레(D. M. McRae)ㆍ푸트(W. R. Foote) 3인이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9월 내한함으로써 캐나다장로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그 전에 내한하였던 토론토 출신의 선교사들은 개인자격으로 왔다가 북장로회나 남감리회로 소속을 바꾸었다. [140-141]

 

1895년에는 미국 침례교 계통의 선교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에서 폴링(E. C. Pauling)ㆍ가들라인(A. Gadeline) 등을 한국에 파송하였다. 이들은 공주ㆍ강경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나, 재정난으로 1901년 사업ㅇ르 중단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1889년부터 개인적으로 선교활동을 벌이던 캐나다인 펜윅에게 이양되었으며, 그는 1906년 대한기독교회(大韓基督敎會)라는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갖추고 선교에 착수하였다. 대한기독교회는 다시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로 개칭하였다가 해방후 재건되어 한국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141]

 

1907년에는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선교하던 카우만(C. E. Cowman)과 킬보른(A. Kilbourne)에 의해 1902년 창설된 동양선교회는 동경에서 성서학원을 설립하여 전도인을 양성하고 있었다. 19075월 이 학원을 졸업한 김상준ㆍ정빈은 귀국하여 서울 종로에 가옥을 마련하여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전도하였다. 처음에는 교파나 교회를 조직하지 않고 복음전도에만 전념하였으나, 1921년에 복음전도관대신 성결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교회조직을 갖추었다. [141-142]

 

구세군의 한국선교는 창설자 부드(W. Booth)의 동양순방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07년 동양순방 중 일본에 들렀다가 익명의 한국인 2명으로부터 요청을 받고 한국선교를 결심하였다. 이에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은 호가드(R. Hoggard)190810월 내한함으로써 구세군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142]

 

1904년에는 안식교가 한국인들에게 의해 유입되었다. 하와이 노동자로 이민선을 타고 가던 일행 중 유은현ㆍ손홍조 등은 일본 고베에서 안식교 전도사 구니야에게 전도받고 안식교인이 되었다. 이들은 19046월 세례를 받았으며, 손홍조는 하와이로 가지 않고 국내로 돌아와 임기반 등과 함께 진남포ㆍ용강 등지에서 전도하여 안식교회를 설립하였다. 그해 구니야 전도사가 내한하여 선교활동을 도왔고, 1905년에 미국에서 선교사 스미스(W. S. Smith)가 내한함으로써 안식교의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142]

 

동방교회의 전통인 러시아정교회의 한국선교는 1898년 시작되었다. 18976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한국선교를 명령하였고 아에 암브로시우스 구드코(Ambrosius Gudko) 대신부, 니콜라이 알랙세에프(Nicolai Alexeyef) 보제, 크라신(Krasin) 등으로 조직된 선교단이 1898년 러시아를 출발하였으나, 당시 한러관계가 악화되어 니콜라이만 입국하였다. 그 후 크리산프 세햇호프스키ㆍ요나스 레프헨코 등이 19001월 내한하였으며, 러시아공사관 안에 교당을 설치하고 19002월 공식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정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여 러시아인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선교활동도 위축되었다. [143]

 

영국에서 시작된 플리머스형제단1896년 한국선교에 착수하였다. 일본인 전도자 노리마츠가 개인자격으로 내한하여 조덕성ㆍ신태일 등의 협력을 얻어 서울ㆍ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전도하였으며, 1898년 일본에서 활동하던 브랜드가 내한해 서울 서소문에 선교부를 개설하였다. 이 플리머스형제단은 성서성당기독동신회기독신우회그리스도인의 집회소등의 명칭으로 불리며 교회 조직을 부인하는 독특한 신앙공동체로 존속하였다. [143]

 

일본교회의 한국전도는 한일합방을 전후로 추진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면서 일본의 국익을 선전할 목적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선전도론이 제창되었다. 이 조선전도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회가 일본조합교회였다. 31운동 이후에는 회중교회로 개칭하였으나 한국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143-144]

 

1)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다양한 교파를 배경으로 하였다. 각기 다른 역사적ㆍ문화적 배경을 지닌 교회들이 그대로 한국에 이식되는 형태로 선교가 추진되었다. 이는 상호 경쟁을 유발시켜 교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교회들간의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등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2) 각 교파들이 한국선교에 착수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주체적인 수용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144]

 

2) 의료선교 / 145

 

개신교의 초기선교는 직접적인 복음전도보다는 학교ㆍ병원을 통한 간접선교의 방식을 취하였다. [145]

 

의료선교... 188410월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 자격으로 입국한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과 명성황후 및 정북측 인사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갑신정변 때 살해된 홍영식의 집을 하사받아 18854월 광혜원(곧 제중원으로 개칭)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 병원은 의료기관으로서뿐 아니라 다른 선교사업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국왕에 의해 인정받은 이 병원을 통해 다른 선교사들도 훨씬 쉽게 선교활동에 착수할 수 있었다(언더우드, 스크랜턴, 헤론, 엘러즈)... 북장로회 선교부는 1887년 이 병원을 남대문 안 구리개로 옮겼고, 알렌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공사관으로 직장을 옮기자 헤론이 그 업무를 맡았다. 왕립병원으로 출발한 제중원1894년 에비슨에 의해 선교병원이 되었고, 뒷날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가 후원한 건축기금으로 남대문 밖에 새 건물을 마련하여 오늘날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145-146]

 

18859월에는 정동에서 미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이 민간진료소를 시작하였으며, 그 후 새 건물을 마련하고 18866월 정식으로 시병원을 개원하였다. 스크랜턴은 정부가 운영하던 제중원과는 달리 시병원을 민간병원으로 발전시키려고 힘썼다... 스크랜턴은 적극적으로 민중계층과 접촉하기 위해 궁궐과 외국공사관이 즐비한 정동을 떠나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의 표현대로 상동은 민중이 있는 곳이었다. [146-147]

 

188710월 내한한 하워드(M. Howard)여성을 대상으로 의료사업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시병원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18884월 정동에 따로 건물을 마련하고 보구여관이라 하였다. 이로써 봉건적 사회체제에서 소외된 여성들이 의료혜택을 받게 되었고, 그들 중 간호 ㆍ의료교육까지 받는 사례도 나타났다. 예컨대 박에스더 또는 김에스더는 미국에 유학하여 1900년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가 되어 귀국하였다. [147]

 

초기의 의료선교는 정부와 민중이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직 언더우드가 직접적인 복음전도를 할 수 없던 때 그의 부인이 숙련된 의사로 환자들을 치료할 기회를 수없이 가졌고 그것을 통해 의혹을 씻어내고 민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는 기록도 그 점을 잘 보여준다. [149]

 

3) 교육선교 / 149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는 목사였지만 정부에 알린 공식직함은 교사였다. 이들은 제중원과 정동진료소의 교사로 있으면서 1885년 말 2~3명의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149]

 

본격적인 학교설립은 아펜젤러가 추진하였다. 그는 188511월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학교설립 허가를 받아 188662명의 학생으로 정식학교를 개교하였다. 이것이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라 불리는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이 학교가 문을 열자 학생들이 몰려들어 5개월만에 학생이 32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이 학교가 인기를 끈 것은 종교적 관심 때문이 아니라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는 현실적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성경을 읽거나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된 이들도 나타났으니, 18877월과 10월에 각각 세례받은 박중상과 한용경이 그같은 사례이다. [149-150]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제중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그는 18861월부터 고아나 극빈자 아동들을 모아 기술을 가르치는 기술학교 형태의 고아원 설립을 구상하였다. 그는 같은 해 5월 정동에 한옥을 구입해 수리하고 학생 1명으로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언더우드학당이라고 불리는 고아원 학교였다. 이 학교는 예수교학당민로아학당구세학당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 경신학당으로 개칭하였다. [150]

 

18865스크랜턴 대부인(M. F. Scranton)에 의해 시작된 미감리회의 이화여학당18876엘러즈에 의해 시작된 북장로회의 정동여학당이 그것이다. 배재학당처럼 출세지향적인남성들이 모여든 남학교와는 달리 여학교는 여성들의 교육을 꺼리는 봉건적 관습 때문에 학생모집부터 쉽지 않았고, 초기의 학생들은 고아나 과부ㆍ첩과 같은 소외계층이 대부분이었다. [150-151]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는 한문ㆍ역사ㆍ지리ㆍ수학ㆍ과학 등 일반과목과 함께 성경과목을 포함시켜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선교사들에게 학교는 한국을 복음화시키는도구였지만, 이들의 의도와는 달리 근대학문을 배워 출세하려는 학생들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배재학당 출신의 어느 관리는, “나는 배재학당에서 영어공부를 여러해 하엿시되 예수교에는 투입함이 업고 재조만 배왓스니라 자랑하며 오히려 기독교 선교를 방해하였다. 그럼에도 기독교계 학교는 교회는 물론 각종 계몽운동ㆍ민족운동의 지도자를 다수 배출하는 요람의 역할을 하였다. [152-153]

 

4)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 153

 

개신교의 수용과정에서 특기할 점은 선교사들의 입국 이전에 이미 한국어로 성경이 번역ㆍ발행ㆍ반포되어 한국인들에게 읽혀졌으며, 그 결과 상당수의 구도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실 개신교 선교는 성경의 번역ㆍ발간ㆍ반포와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성경을 읽은 한국인들은 스스로 기독교의 본질을 깨닫고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는 데 앞장섰다. 이 같은 성경중심의 선교 전통은 1885년 선교사의 입국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53]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어학공부를 하는 틈틈이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우선은 일본ㆍ만주에서 번역된 것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1885년 초에 일본에서 출간된 이수정 번역 신약마가젼복음셔언ᄒᆡ를 개정한 마가의젼한한복음셔언ᄒᆡ1887년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간되었다. 그해 서울의 선교사들이 성경번역위원회(Committtee for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번역사업에 착수하였다. 1889년 영국성서공회가 이 위원회에 로스역 성경의 개정작업을 요청하여 1890누가복음젼보라달로마인셔를 서울의 미이미교회 인쇄소에서 발간하였다. [154]

 

마태복음젼이 출간된 1893년에는 종래의 성경번역위원회를 상임성경실행위원회(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로 개편하고 그 산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조직하여 체계적인 원칙에 따라 공동번역에 착수하였다. 선교사들은 헬라어성경과 개정판 영어성경(Revised Version), 한국인 조사들은 대표자번역본(Delegates Version) 한문성경을 저본으로 채택하였다... 이 번역자회의 의견을 거친 성경을 시험역본’(Tentative Version)이라 하였고, 이것을 3년간 사용하면서 개정해낸 것을 공인역본’(Authorized Version)이라 불렀다. 1895마태복음마가복음요한복음사도행전이 시험역본으로 발행된 후 신약의 단편성경들이 꾸준히 간행되어 1900년에는 신약 전체가 한권으로 묶여 간행되었다... 신약의 개정작업에 착수하여 19041차 개정본이 간행되었고 1906년에 비로소 공인역본 신약젼서가 발간되었다. [154-155]

 

구약의 번역ㆍ발간은 신약보다 늦었다. 1898년에 유태계 미국성서공회 권서였던 피터스(A. A. Pieters)에 의해 시편의 절반 정도가 번역되어 시편촬요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으나 개인번역의 차원이었다. 본격적인 구약번역은 신약번역이 끝난 1900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교사의 잦은 이동과 다른 업무 때문에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1907년부터 레널즈와 김정삼ㆍ이승두 등 3인이 번역작업에만 집중하여 마침내 1910년 구약 전체를 번역하였다. 이로써 성경 전체가 번역되어 이듬해 출간되었다... 1900년에 간행된 신약과 1910년에 발간된 구약을 흔히 ‘구역(舊譯)성경’, 1938년에 출간된 성경을 ‘개역(改譯)성경’이라 부른다. [155-156]

 

‘일반민중’을 대상으로 한 언어, 무식한 계층도 이해할 수 있는 문체로 성경을 번역하려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 또한 그것은 한자 중심의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소외되었던 한글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한글문화의 창출에 공헌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57]

 

성경뿐 아니라 찬송가와 교리서 및 전도문서들, 교회 계통의 각종 간행물도 한글로 인쇄ㆍ발간되었다. 찬송가1892년 미감리회 선교사 존스와 로드와일러가 편집한 찬미가가 그 효시이다. 장로교에서는 1893년에 언더우드 편집으로 찬양가가 발행되었고, 1895년에 리(G. Lee)와 기포드 부인의 공편으로 찬셩시가 간행되었다. 찬양가는 서울 및 남부지방에서, 찬셩시는 서북지방에서 주로 사용되다가 1902년 장로교공의회 결의에 따라 찬셩시가 장로교회의 공인찬송가로 채택되었다. 미감리회에서는 1892년의 찬미가1895년에 증보ㆍ중판하여 사용하였다. 한편 남감리회의 윤치호가 독자적으로 편집한 찬미가1905년에 출판되었으며, 여기에는 애국가등 충군애국적인 찬송가 세 편이 수록되었다. [157-158]

 

이처럼 선교회별로 따로 사용하던 찬송가들의 합동작업이 1905년 재한복음주의선교회 통합공의회 조직과 함께 추진되어 1908년 장ㆍ감 연합으로 찬숑가가 발행되었다. 이 찬송가는 1930년대 감리교가 신정찬송가, 장로교가 신편찬송가를 별도로 사용하기까지 초교파적으로 사용되었다. [158]

 

펜윅의 대한기독교회가 복음찬미(1899), 영국성공회가 셩회숑가(1903)천도찬사(1904), 구세군이 구셰군가(1908), 성결교회의 전신인 동양선교회가 복음가(1911)부흥셩가(1913) 등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158]

 

기독교 정기간행물... 1897년에 두 종류의 한글신문이 나왔으니, 아펜젤러 발행의 죠션크리스도인회보(The Christian Advocate)와 언더우드 발행의 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주간신문이었고, 단순한 기독교 교리의 보급뿐 아니라 혼암한 마음을 광명케 하고 개명이 진보케 하며, “제 나라이 왕성하여 가는 것을 보고 제 자녀에게 제가 받은 학문보다 나은 것을 주려는 사회계몽에도 목적을 두고 있었다. 두 신문은 교회소식이나 기독교 교리와 함께 서구의 문화와 문명을 소개하는 데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이 두 신문은 1905년 교회연합운동의 일환으로 합동하여 19057월부터 장ㆍ감 연합신문인 그리스도신문으로 발간되었다. 이 신문은 1907예수교신보(The Church Herald)로 제호가 바뀌어 1910년까지 발행되었다. 다른 교파의 신문으로는 1906년 창간된 천주교회의 경향신문1909년 창간된 구세군의 구셰신문등이 있다. [158-159]

 

1892년 미감리회 선교사 올린저(F. Ohlinger)가 발간한 The Korean Repository한국에서 간행된 영문잡지의 효시이다. 이 잡지의 필자는 주로 선교사들이었고 1898년에 간행이 중단되었다. 1901년에는 감리교의 헐버트가 The Korea Review, 같은 해 장로교의 빈튼이 The Korea Field를 창간하였는데, 전자는 The Korean Repository를 계승한 것이고 후자는 장로회 선교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1904년에는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연합으로 The Korea Methodist를 간행하였다. 190511월에는 장로교의 The Korea Field와 감리교의 The Koea MethodistThe Korea Mission Field로 통합ㆍ창간되어 1941년까지 발간되었다. [159]

 

한국어로 된 기독교잡지의 효시는 190012월에 창간된 신학월보이다. 미감리회 선교사 존스가 인천에서 발행한 이 잡지는 교회소식뿐 아니라 기독교 교리까지 실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04년 플리머드형제단 선교사로 내한한 노리마츠는 은혜진리를 발간하였고, 빈튼은 예수교서회보를 간행하였으며, 정동감리교회에서 엡윗청년회보가 발행되었다. 1906년 역시 정동감리교회에서 성경강론월보가 간행되었고, 같은 해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는 가뎡잡지를 발간하였다. 1908년 영국성공회에서 종고성교회월보를 발간하였고, 같은 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양주삼은 유학생과 해외교포들을 대상으로 한 대도(大道)를 발간하였다. [159-160]

 

단행본으로는 1883년 만주 봉천에서 로스가 예수셩고문답예수셩교요령을 한글로 간행하였다.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량자회ᄀᆡ도 초기의 것이다. 국내에서 발행된 것으로는 1889년에 나온 셩교촬요(아펜젤러)속죄지도(언더우드), 1890년에 나온 라병론(올린저)미이미교회강례(아펜젤러)셩교촬리(언더우드) 등이 비교적 초기에 나온 것들로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160]

 

1889년 올린저의 노력으로 배재학당 안에 인쇄소가 설치되면서 기독교 출판사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 인쇄도는 한글ㆍ영문ㆍ한문 등 활자를 갖추어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Trilingual Press)라 불렸으며, 감리교에서 운영하였지만 초교파적으로 출판사업을 펼쳤다. 이 인쇄소는 1899년 시설을 확충하고 미이미교회 인쇄소’(The Korea Methodist Publishing House)로 개칭하였다... 1890년대 이후 번역되기 시작한 단편성경들이 이곳에서 인쇄되었고... 일반신문도 여기서 인쇄되었다. 이 출판소는 1906년경부터 장로교와의 연합출판사로 개편할 계획을 세웠으나 성사되지 못하였고 1909년경에 폐쇄되었다. [159-160]

 

1890년에 장ㆍ감 연합 문서사업기관으로 ‘조선성교서회’(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가 설립되어 더욱 체계적인 문서선교의 기틀을 다졌다. 언더우드ㆍ헤론ㆍ올린저 등 3인의 노력으로 설립된 이 서회는 조선어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와 정기간행의 잡지류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890년 출판된 셩교촬리를 비롯하여 텬로지귀훈ᄋᆞ진언(1891)쟝원량우샹론(1892)구셰진젼(1893)덕혜입문(1893) 등의 교리서들이 서회에서 간행되었다. 조선성교서회는 1897대한성교서회’, 1915년 ‘조선예수교서회(The Korean Religious Book and Tract Society)’로 개칭하였으며, 오늘날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이다. [161-162]

 

초기 기독교 출판사업에서 한국인의 저작은 드물었고,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성경번역이나 정기간행물 발간 등에 한국인이 참여하였으나 그 폭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교리서ㆍ전도문서는 선교사들이 저술ㆍ번역한 것이고 한국인의 신앙고백이 담긴 것은 많지 않았다. 한국인의 저작은 홍정후의 칠득(七得)(1895), 노병선의 파혹진션론(破惑進善論)(1897), 길선주의 해타론(懈惰論)(1904), 최병헌의 예수텬쥬량교변론(耶蘇天主兩敎辯論)(1909) 등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기독교 문서사업을 주도하고 서양의 신학사조가 큰 영향을 끼치면서 한국의 기독교문화는 서구지향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었다. [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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