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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2] 제7장. 2. 사회변화와 기독교 민족운동

by [*수호천사*] 2025.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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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역사 2]

7. 31운동과 기독교(1919~1925)

2. 사회변화와 기독교 민족운동

 

1) 총독부의 정책변화 / 52

 

3ㆍ1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19198,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경질되고 사이토[齋藤實]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실질적 개혁이 아닌 형식적 방편에 불과했다. [52]

 

〈조선통치의 방침〉이란 문서는 문화정치의 허구성을 잘 보여준다. 그 내용은 한국에 대한 지방자치의 인정, 재외 한국인에 대한 보호취체 방침의 수립, 문명적 행정의 시행 등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경우에도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에 의한 자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그 한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53]

 

한국교회에 대한 일제의 정책 역시 본질적으로 같았으나, 선교사들과의 관계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자칫하면 외교문제로 비화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53]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기 전 야소교도 중에서도 특히 선교사에 대해서 의심이나 증오를 품지 말고, 총독과 총감은 특히 선교사와 접촉을 가지면서 그들의 의견을 잘 듣는 몸가짐을 해 주었으면한다는 충고를 받은 바 있는 사이토는 19199월 부임하자 곧 선교사들과 회합을 갖고 일본정부의 처사에 대한 의견과 제안을 요청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선교 정책에 대한 총독부의 정책전환을 요구하는 전선 선교사대회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일본헌법이 보증한 종교자유의 보장을 요구하고, “현행법규 아래서는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향유할 수 없다면서 제반사항을 건의했다. 그중 기독교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53-54]

  • 교회 및 선교사에 대한 단속을 완화할 것.
  • 기독교 및 기독교인에 대한 관리의 차원을 철폐할 것.
  • 기독교계 학교에서의 성서교육과 종교의식을 허용할 것.
  • 기독교문서에 대한 검열을 철폐할 것. 교회의 출판물 발행의 제한을 완화할 것.
  • 교회 및 선교기관을 재단으로 인정할 것.
  • 기독교인으로서 구금된 정치범에 대한 학대를 중지할 것.
  • 형무소의 교화사업에 교회가 참여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할 것.

 

사이토는 선교사들의 건의를 바탕으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책을 마련했다. 우선 총독부에 종교과를 설치하여 종교행정 및 선교사와의 연락을 맡도록 했으며, 포교규칙을 개정하여 교회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다. 그 대신 교회에서 안녕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그 사용의 정지나 금지를 명령할 수 있다는 규정을 삽입하여 교회가 민족운동에 연관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여 기독교계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허용했으며, 종교단체가 소유한 부동산을 내국인법으로 허가했다... 이 같은 회유정책 때문에 친일적 선교사는 물론 반일적 선교사 중에서도 그의 ‘문화정치’를 예찬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54-55]

 

일제는 여전히 한국교회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늦추지 않았으니...

당국의 선전과 약속이 있었는데도 교회에 대한 경찰의 부당한 간섭과 위압이 여전히 계속된 데 대한 반감

사립학교 학생에게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는 교육을 하도록 선교사에게 요구한 데 대한 반감

당국이 일부 신도를 매수하여 외국인 선교사 배척운동을 부추기고 있는 데 대한 반감

간도 등에서 빚어진 조선인 신도 무차별 대량학살과 교회파괴에 대한 반감 [55]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했으나 식민통치의 본질을 바뀌지 않았고, 기독교에 대한 정책에서는 외교관계와 국제여론을 의식하여 선교사들을 회유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의 대화창구는 선교사들이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 교인들은 소외되었으며, 여전히 감시와 탄압의 대상으로만 머물렀다. [55-56]

 

2) 사회주의운동과 기독교 / 56

 

192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시련... 일부 지식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배척하고 나선 것이다... 이미 1917년 이광수는 한국 기독교가 정통의 폭군이며 교역자들이 무식하다고 비판했다. 신앙유형이 보수적ㆍ배타적이며, 교역자들이 신학 이외의 학문에는 무지하여 교인들을 미신으로 이끌고 문명의 발전을 막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그는명예의 사()를 가진 조선교회의 전도(前途)는 비판밖에 없는 줄 아오라 힐책했다. [56]

 

1920년대에 들어와 선교사들을 둘러싼 비행추문이 언론에 보도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는데, 여기에는 일부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적 편견이 내재되어 있어 민족감정을 자극했다.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있었는데, 특히 신유이적을 동반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56]

 

이에 대해 일부 기독교인들은 진지하게 반성하기도 했다. “신학문의 선도라 불리던 교회가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현실을 인정하기도 하고, “교회 앞에 수괴자(羞愧者)”가 되지 않기 위해 사상적 양성을 결심하기도 했다... 사회적 변화에 둔감하던 한국교회에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다. [56-57]

 

3ㆍ1운동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이었으며, 이는 반기독교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917년 소련의 볼셰비키혁명 이후 세계 도처에서 유행된 사회주의사상이 국내에 유입되어 학생ㆍ청년층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223월 북경의 반기독교운동이 동아일보개벅등에 보도되기도 했다. [57]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한 이유는 기독교가 (1) “제국주의의 수족(手足)이요 자본주의의 주구(走狗)”로서 일제에 협력했으며, (2) 현실에 대한 긍정과 복종을 강요하여 독립정신을 말살시켰고, (3) 과학사상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허위를 선전한다는 것 등이었다...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그들에게는 모든 종교가 타도대상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모든 종교를 아우른 반종교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토확장의 제국주의의 수족이 되고 자본주의적 국가 옹호의 무기라 생각하여 기독교에 공격을 집중했다. [57]

 

국외에서는 1918년 6월 한인사회당이 조직된 이후 많은 사회주의단체들이 창설되었고, 국내에서도 1920년 2월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를 효시로 여러 사회주의단체들이 설립되었다.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공식적인 반기독교운동19233월 전조선청년당대회에서 시작되었다. 종래의 청년운동을 계급투쟁으로 전환시키려는 의도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참석자들은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인하기로 가결했다. 19241월 경성신흥청년동맹회 총회에서도 반종교ㆍ반기독교의 입장이 표명되었다. 19254월 일경이 금지시킨 전조선민중노동자대회에서도 기독교를 비판하는 토론이 있을 예정이었다. [57-58]

 

확실한 반기독교 행사는 19251026~27일 한양청년연맹이 열려고 한 반기독교 대강연회였다. 이는 같은 달 22~28일 서울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에 대항하려는 의도에서 계획되었다. 이들은 기독교는 미신이다”, “양면랑심(羊面狼心)의 기독교”, “현하(現下)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 “악마의 기독교등의 강연을 준비했으나 일경의 탄압과 교회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일제당국과 한국교회가 유착되어 있는 증거라고 선전했다. 이어 이들은 1225일을 반기독데이로 명명하거나 김익두 목사와 같은 부흥사들은 고등무당이라고 비난하는 등 반기독교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58]

 

비판과 공세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응... “그들은 그들이오 우리는 우리외다. 따라서 대책이니 무엇이니 하는 말도 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한 한석원 목사같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기독교인도 있었고, “오늘날의 교회는 그저 민중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산게급의 앞 운명을 개척키 위하여 있어야 하며, 따라서 현대의 기독교회는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라고 말한 신흥우같이 어느 정도 그 타당성을 인정하는 기독교인도 있었다. 나아가 오인(吾人)이 이 불만 불평한 세계를 부인하고 오인이 동경하는 무삼 신세계를 조성코자 함에는 기독교 사상과 사회주의가 상동(相同)하다고 사유된다라고 말한 이대위같이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서로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도 있었다. [58-59]

 

사회주의자들 중에는 기독교인 출신도 적지 않았다... 초기 사회주의운동의 두 거두 이동휘와 여운형이 평양신학교까지 다니고 전도사 직분까지 맡았던 독실한 신앙인이었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단체로 알려진 한인사회당에도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참여했다고 한다. 또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평양의 기독교인들 중에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이 나타나 출교처분을 받기도 했다. [59]

 

3ㆍ1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사회주의 계열의 공격과 청년ㆍ학생층의 이탈이라는 새로운 시련을 겪어야 했다. [59]

 

3) 국내의 기독교 민족운동 / 60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자금의 모금과 국내외간 연락을 위해 국내에 연통제를 운용했다. 연통제는 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 등지에서 비교적 활발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여성기독교인들의 활약이 주목되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대한애국부인회이다. [60]

 

19196월 장로교 측의 김보원ㆍ김용복ㆍ한영신 등 중심의 애국부인회와 감리교 측의 박승일ㆍ손진실ㆍ이성실 등 중심의 애국부인회가 별도로 조직되었다. 이 두 단체는 같은 목적과 성격의 활동을 벌이면서 서로 연합할 필요성을 느끼던 중 임시정부로부터 통합을 권유받아 같은 해 11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로 합동했다. 임원으로는 총재 오신도, 회장 안정석, 부회장 한영신 등이 선출되었으며, 평안도 각지에 7개의 지회를 두었다. 이 회의 주요사업은 동지규합ㆍ군자금 모금ㆍ배일사상 고취ㆍ결사대 조직ㆍ독립운동요원 원조 등이었다... 이 밖에 평안남도 강서의 반석대한애국여자청년단, 순천의 대한민국부인향촌회, 대동의 대한독립부인청년단 등도 연통제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군자금도 모금했다. [60]

 

연통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일제에 적발되어 고초를 받기도 했다. 그 대표적 예가 ‘나남사건’으로 알려진 함북감독부원의 수난이다. 함북감독부는 19196월 임시정부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 조직되었는데, 김인서ㆍ박원혁 등 기독교계 학교 교사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191912월 일제에 발각되어 부감독 김인서 등 47명이 옥고를 치렀다. [60-61]

 

강원도ㆍ경상도ㆍ전라도에서는 연통제가 시행되지 못했다. 이들 지방에서는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어 임시정부를 후원... 충청도ㆍ전라도의 대한독립애국단, 경기도ㆍ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의 대한민국청년외교단대한민국애국부인회, 그리고 대한적십자회 등이 그같은 사례이다. 이들 단체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이들은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61]

 

대한독립애국단19195월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단장 신현구를 비롯하여 김상덕ㆍ박연서ㆍ조종대 등 핵심인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같은 해 7월 상해에서 김태원이 파견된 후 이 단체는 임시정부의 연통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단체는 두 차례 임시정부 축하시위를 벌였으며, ‘조선인관리 퇴직동맹계획을 세웠다. 이는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을 모두 퇴직시켜 일제의 행정기능을 마비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201월 일제에 발각되어 무산되고 해산되었다. [61-62]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상해에 연병호ㆍ조용주 등이 국내에 들어와 안재홍ㆍ이병철 등과 19195월 서울에서 조직했는데, 단원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이 단체는 국외지부를 설치, 조소앙을 비롯한 외교원의 파견, 외교시보발간 등의 활동을 벌였다... 총무 이병철이 임시정부로부터 경기도애국금수합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결성과 활동을 지도했으며, 19197월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의 대한총지부를 설치하여 국내의 적십자활동을 주도했다. [62]

 

불교계와도 관련... 대한독립애국단의 철원군단이 사찰인 도피안사에 조직되었으며, 승려 신상완이 그 활동에 참여... 강원도 월정사 승려 송세호ㆍ용창은ㆍ이종욱 등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단원이었다. [62]

 

대한민국애국부인회19193월 조직된 혈성부인회나 4월에 조직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통합ㆍ발족한 것으로, 회원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혈성부인회는 오현관ㆍ오현주ㆍ이정숙 등이 투옥인사와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조직했으며, 정신여학교 재학생ㆍ졸업생이 다수 참여했다.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총무 이병철과 임창준 등의 지도를 받은 김원경ㆍ김희열ㆍ최숙자 등이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결성했다.

같은 해 6이병철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의 김희열ㆍ최숙자와 함께 혈성부인회의 오현주를 방문하여 두 단체의 통합을 논의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창립되었다. 임원진은 총재 오현관, 부총재 김희열, 회장 오현주, 부회장 최숙자 등이었다. 이 회는 전국에 걸쳐 지부를 설치했고, 모금한 회비의 3분의 1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했다. 이 회는 31운동 때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정신여학교 교사 김마리아와 황에스더가 19199월 각각 회장과 총무로 선출된 이후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 대한민국의 국권을 확장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적십자장ㆍ결사장 등 직책을 두어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이 회의 자매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일제에 탐지되면서 이 회도 적발되어 1919년 11월 서울과 대구에서 두 단체의 간부진이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회는 1년 남짓 존속했지만, 여성들의 참여와 후원으로 조직ㆍ운영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이후 여성운동은 물론 국내외 항일투쟁에 큰 귀감이 되었다. [62-63]

 

191910월에는 평양의 기독교인 박면하ㆍ최원하 등이 한민회(韓民會)를 조직했다. 이들은 독립신문등 선전문 배포와 함께 독립군의 국내 진공시 일제 관리ㆍ친일파의 암살, 공공시설의 파괴 등을 계획했으며, 1920918일 평남 영원군 온화면사무소를 습격하여 현금을 탈취하고 서류를 소각했다. 그러나 1016일 덕천군 천도교구에 군자금 헌납을 요구하다 일경에 적발되어 회원 9명이 체포되었다. 191911월 평남 성천에서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인 숭의단(崇義團)에도 기독교인들이 참여했다. [63-64]

 

기독교인들의 의열활동... 강우규ㆍ박치의ㆍ김상옥...

강우규는 장로교 전도사까지 지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말 함남 홍원에서 학교를 설립했고, ‘한일합병후 국외로 이주하여 북만주ㆍ시베리아 등지를 전전하며 국권회복운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결성된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조직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신임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러시아인으로부터 폭발탄을 구입하여 19196월 미리 국내에 잠입해서 거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920일 남대문역에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총독은 죽지 않고 수행원과 일경 3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법정에서도 당당히 일본과 총독의 죄과를 역설했고, 이듬해 1129일 교수형을 받았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65세 노인답지 않게 당당한 자세를 보였으며, “천국은 이미 의사들[義士林]에게 열려 있소란 유시(遺詩)를 남겼다. [64-65]

 

192091일 신성중학교 학생 박치의는 대한광복군총영에서 파견된 김응식ㆍ이학필ㆍ임용일 등의 부탁을 받고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일깨웠다... 박치의 이하 16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언도받았고, 박치의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는 그 순간 일어서서 두 손을 하날에 놉히 부르지저 하나님 은혜 감사하외다’”라 외쳤으며, 교수대에 올라서서도 성경을 외이며 찬미를 부른 후 가장 소래를 놉히하야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뒤에최후를 맞았다. [65-66]

 

전도사 출신의 기독교인 김상옥... 191912월 총독을 비롯한 일본 관리들과 친일파들을 제거하려고 암살단을 조직했다. 192010월 상해로 탈출... 그곳에서 의열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그는 192211월 일제의 관청파괴와 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폭탄과 권총을 갖고 국내에 잠입했다. 다음 해인 1923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된 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그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추적했다. 매제 고봉근의 집에 숨어 있던 그는 출동한 일경들을 사살하고 남산을 거쳐 친구 이혜수의 집으로 피신했다. 얼마 후 일경들은 일대를 포위하고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김상옥은 권총으로 맞서 싸우다가 자결했다. [66]

 

4) 국외의 기독교 민족운동 / 66

 

1919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민주주의에 입각한 최초의 공화제 정부... [66]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기독교인의 역할...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ㆍ운영한 것이 신한청년단... 1918년에 결성되었는데, 그 핵심인물인 김구ㆍ김규식ㆍ서병호ㆍ송병조ㆍ여운형ㆍ장덕수 등이 기독교인이었다. 단원의 상당수는 상해한인교회에 출석했으며, 단원은 아니지만 신익희ㆍ안창호ㆍ이동휘ㆍ이승만ㆍ조소앙 등도 이 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신한청년단의 목적은 국제회의에 독립을 호소할 대표를 파견하려면 정부가 필요한데, 당장은 정부를 구성할 수 없으므로 우선 정당이라도 만들어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편,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에 힘썼다... “상해는 31운동의 진원지요 그 주체는 신한청년당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31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같은 해 3월 이 단체의 서병호ㆍ여운형 등은 국내에서 건너온 최창식ㆍ현순 등과 함께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의 조직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같은 해 4월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 출범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그 요직에 임명되었다. [67]

 

독립운동을 위한 항일무장단체들이 조직... 북간도의 대한국민회와 대한신민단... [68]

 

대한국민회의 전신은 조선독립기성회인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지지하면서 대한국민회로 개칭했다. 회장 구춘선과 부회장 서상용을 비롯한 회원들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이 회는 19208월 당시 연길현ㆍ왕청현ㆍ화룡현 등 3개 현에 10개의 지방회와 133개의 지회를 둔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단체로 발전했으며, 무력투쟁을 위해 북간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했고, 노령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또 독립군 양성을 위해 징병제를 실시했으며, 19207월 연길현 명월구에 사관학교도 설립했다. 아울러 구역회, 지구회, 촌회 등 연락기관을 설치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이 회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등과 합류했다. 이들은 192077일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사살 157, 중상 200여 명이란 개가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1013일 연길현에서 이 회는 대한신민단ㆍ대한의민단ㆍ훈춘한민회 등의 기독교계 무장단체와 연합하여 10월 완루구전투ㆍ고동곡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또 이들은 대종교 단체인 북로군정서와도 연합하여 10월 어랑촌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68-69]

 

19193월 북간도 왕청현에서 조직된 대한신민단은 단장 김규면을 비롯한 단원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이 회는 한말의 대표적 국권회복단체인 신민회의 계승을 선언했고, 독립전쟁을 위한 교전단체임을 표방했으며, 민주제에 의한 독립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중국 관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新韓村]로 본부를 이전하고 북간도에는 지회와 의사부를 설치했다.

이 회가 독립군을 편성한 것은 같은 해 5월로 추정된다. 단원들은 무기구입과 훈련강화에 힘쓰면서도 국내에도 의연대(義捐隊)를 파견하여 단원을 확보하고 군자금도 모금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삼둔자전투의 승리로 나타났다. 이 회는 1919년 겨울부터 1920년 봄까지 수시로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특히 19206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하고 귀환했는데, 추격해 온 일본군 1개 중대를 박승길 휘하 30여 명의 단원들이 섬멸했다... 다른 독립운동단체와의 연합... 이흥수 휘하 60여 명의 단원들은 대한국민회ㆍ대한의민단ㆍ훈춘한민회 등과 함께 완루구전투ㆍ고동곡전투ㆍ어랑촌전투 등에 참여했다. [69-70]

 

서간도 지역... 통화현ㆍ유하현ㆍ즙안현 등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 무력투쟁을 위한 준비도 진행... 19194월 대황구교회에서 3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삼원보 부민단의 총기 구입문제를 협의하고 성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마친 후 교회에서 청년 70여 명이 곤봉으로 군사훈련을 받으며 항일투쟁에 대비했다. [70]

 

통화현의 최봉석 목사와 흥경현의 오대규 목사 등은 ‘급진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즙안현의 기독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연합하여 의용단ㆍ청년회 등을 설립하고 허선노 장로를 총장으로 추대했다. 그후 이들은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다른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대한의민단은 천주교인들이 중심이 된 무장단체로, 그 결성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단은 왕청현 춘화향 알하하에 본부 및 동ㆍ서ㆍ남ㆍ북ㆍ중의 지부를 설치했으며, 단장 방우룡 이하 단원은 300~400명을 헤아렸다. [70]

 

1920년 10월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이 일으킨 ‘훈춘사건’을 계기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이 지역 독립운동기지를 초토화했고, 많은 독립운동가를 색출ㆍ처형했으며, 교회와 가옥을 소각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으로 기독교인들의 항일투쟁은 표면적으로는 다소 약화되었으며, 일부에서는 경건주의적 비정치화의 경향도 나타났다. 또한 한국의 독립을 원조할 것으로 기대했던 기독교국가미국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자,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러시아에 의존하여 독립을 달성하려 시도했고, 그 결과 사회주의자로 전향하는 사례도 많이 나타났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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