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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티낙스 [Pertinax, AD. 126~193] 로마 제국 제18대 황제(AD. 193)

by [*수호천사*] 202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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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티낙스 [Pertinax, AD. 126~193] 로마 제국 제18대 황제(AD. 193)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개인 정보】

  • [이름]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Publius Helvius Pertinax)
  • [출생] 기원후 126년 8월 1일, 이탈리아 알바폼페이아
  • [사망] 기원후 193년 3월 28일, 이탈리아 로마
  • [로마 황제] 193년 1월 1일 ~ 193년 3월 28일
  • [전임] 콤모두스(Commodus, AD. 161~192) 로마 제국 제17대 황제(AD. 180~192)
  • [후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AD. 133~193) 로마 제국 제19대 황제(AD. 193)

 

【가족 관계】

  • [아버지] Helvius Successus
  • [배우자] 플라비아 티티아나(Flavia Titiana) : 원로원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술피키아누스(Titus Flavius Claudius Sulpicianus)의 딸이자, 티투스 플라비우스 티티아누스(Titus Flavius Titianus, 165년 출생)의 여동생
  • [아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Publius Helvius Pertinax the Younger, AD. 180~212)
  • [딸] 헬비아(Helvia)

【출생과 그리고 성장】

[해방노예의 아들]

  •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는 126년에 북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모직물을 거래하는 해방노예 헬비우스 섹세수스(Helvius Successus)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사를 통한 로마 시민권 획득]

  • 페르티낙스는 어릴 적부터 머리가 좋았는지, 로마 제국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우선 로마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 시민권을 가장 빨리 얻을 수 있는 길은 의사나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의사는 경험이 필요한 직업이니까, 해방 노예의 아들은 교사를 선택했다. 그는 중등교육만 마치고 ‘그라마티쿠스’라고 부르는 교사 일을 시작하였다.

[출세를 위해 군대에 들어가다]

  • 로마 제국에서 출세하려면 군대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군단병이 되려면 로마 시민권이 있어야 하지만, 페르티낙스는 교사를 하면서 얻은 시민권을 가지고 군단에 지원했다.
  • 페르티낙스 정도면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을 군단에 지원했다 해도 쉽게 소대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방 노예의 아들인 그의 선택은 훨씬 교묘했다. 당시 비교적 열등하다고 인식되는 시리아 군단에 지원한 것이다.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이가 시리아 군단에 지원한 것은 장교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페르티낙스는 입대하자마자 백인대장으로 군대 생활을 시작하였다. 페르티낙스는 한동안 백인대장을 지내면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올렸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참가하다]

  • 서른다섯 살 때 페르티낙스에게도 운명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누구보다도 전쟁을 바라지 않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에 취임한 뒤 평화가 끝나고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페르티낙스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로마에 있는 마르쿠스 황제한테까지 보고되었다. 이때의 공로로 페르티낙스는 당당히 대대장으로 진급했다.
  • 대대장이 된 페르티낙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지키는 시리아 속주에서 도나우 강 방위선의 모이시아 속주로 전출되었다. 얼마 후 페르티낙스는 속주에 근무하는 ‘재무관’에 임명되었고, 아이밀리아 가도 담당관에 임명된다. 리미니에서 피아렌차를 거쳐 밀라노까지 이어지는 이 가도는 북이탈리아를 동남부에서 북서쪽으로 가로지르는 주요 가도였다. 이 간선도로를 유지 보수하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폼페이아누스 장군 휘하에서 활약하고, 원로원에 입성하다]

  • 자신이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페르티낙스는 마침내 제국의 정예 군단에 들어간다. 라인 강 방위선의 보조부대 책임자를 맡았던 그는 다키아 속주의 재무관을 거쳐 도나우강 방위선에서 군단의 일부를 지휘하게 되었다. 아마 이 무렵 폼페이아누스 장군 휘하에서 본국 아틸라이의 아퀼레이아까지 침입한 게르만족 소탕 작전에 참여했을 것이다. 이때 세운 공으로 마침내 그 앞에 원로원 문이 열렸다.
  • 원로원에 들어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법무관 자리였다. 그는 법무관으로서 ‘가가운 판노니아’ 속주에 있는 3개 군단기지 가운데 브리게티오(오늘날 헝가리의 수니)에 주둔하는 제1 아듀트릭스 군단에 군단장으로 부임했다. 도나우 강 북쪽에서 남쪽의 로마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야만족과 직접 맞부딪쳐야 하는 최전방 군단기지의 사령관이 된 것이다. 도나우 강 방위선의 실질적인 최고책임자는 폼페이아누스였기 때문에, 페릐낙스도 이 옛 상관 밑에서 게르만인을 상대로 몇 년 동안 전쟁을 계속했다.

[집정관을 거쳐 속주 총독이 되다]

  • 그는 이후 공적으로 ‘보결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보결 집정관 제도는 집정관 대리 요원을 확보한다기보다 집정관 경험자를 더 많이 배출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다. 속주 총독이 되려면 먼저 집정관을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 로마 제국은 페르티낙스가 얻은 집정관 경험자라는 경력을 활용한다. 마르쿠스 황제는 쉰 살이 된 그를 ‘가까운 모이시아’ 속주 총독과, ‘먼 모이시아’ 속주 총독, ‘다키아’ 속주 총독에 임명되었다. 다키아 속주 총독은 다른 어느 방위선 보다 많은 위험과 어려움과 불편을 견뎌야 하는 자리였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기 전 아마도 179년이나 178년쯤에 마르쿠스 황제는 그를 동방 방위선에서 가장 중요한 속주인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했다. 그는 183년에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수도로 돌아왔다.

[브리타니아 속주의 동요를 잠재우다]

  • 185년에 브리타니아 속주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이 콤모두스 황제에 대한 충성 선서를 거부하여 소란이 일어났고 페르티낙스는 그 병사들을 장악하는 임무를 띠고 브리타니아 속주에 파견되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페렌니스는 그를 위험인물로 찍고 경계하였고, 이후 콤모두스의 총애를 받은 클레안드로스도 그를 시기하여, 페르티낙스는 후에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콤모두스 황제의 총애를 잃었다.

[아프리카 총독과 로마 수도 장관]

  • 하지만 콤모두스는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중용하여 188년부터 189년까지 아프리카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그 이후 로마로 돌아온 돌아온 그는 로마의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 장관’을 맡았다. 로마 시대의 ‘수도 장관’은 수도 경찰청장도 겸하고 있었다. 페르티낙스는 187년부터 192년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게다가 192년에는 황제 콤모두스와 함께 집정관도 겸임했다. 이번에는 보결이 아니라 정규 집정관이었다. 콤모두스의 후임으로 뽑힐 수 있는 범위 안에 이미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근위대,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만들다】

[콤모두스의 암살, 근위대장 레토의 제안]

  •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되었다.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가 암살되었을 때, 수도 로마의 행정장관을 맡고 있었다. 이때 근위대장 레토는 페르티낙스에게 황제 자리를 제안하였다. 원로원의 유력자들도 페르티낙스라면 괜찮겠다고 동의했기 때문에, 레토는 원로원이 적극적으로 협력해줄 거라는 카드를 내세워 페르티낙스를 설득했다.
  • 페르티낙스가 레토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그 나름의 애국심 때문이었다. 페르티낙스는 그때 이미 66세였다. 은퇴의 뜻을 밝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지만, 그는 콤모두스가 살해된 지금 나라를 빨리 정상적인 상태로 돌려놓지 않으면 네로 황제가 죽었을 때처럼 제국이 내란에 휘말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로 취임하다]

  • 페르티낙스는 도미티아누스 이후 원로원의 추대를 받은 네르바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193년 1월 1일, 페르티낙스는 원로원 의원들의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 정식으로 황제에 취임했다.
  • 회의장에는 일흔 살이 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폼페이아누스도 모습을 나타냈다고 했다. 페르티낙스는 옛 상관에게 ‘공동 황제’가 되어달라고 제의했지만, 마르쿠스 황제의 사위이기도 했던 이 노장은 더 젊은 사람을 고르라면서 사양했다고 한다.

[군단의 충성 맹세를 받다]

  • 파발꾼들은 페르티낙스가 황제에 취임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제국 각지로 흩어졌다. 모든 군단이 하나도 빠짐없이 새 황제 페르티낙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페르티낙스의 경력이 장병들한테도 호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 페르티낙스의 경력은 밑바닥부터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정상까지 올라간 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성공 신화’로서, 로마 사회가 참으로 계급 유동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해방노예의 아들이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다. 그것도 계단을 하나씩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면서, 자신만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도 이바지하면서 거둔 성과였다.

[개혁에 대한 의지]

  • 66세의 페르티낙스는 제국의 시정을 밝힌 취임사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본받겠다고 공언했다. 원로원과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뜻이다. 또한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고는 원로원 의원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오현제 시대가 되돌아온 것 같았다. 의원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 페르티낙스는 국가 재정 건전화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다. 콤모두스의 치세 12년 동안은 전쟁을 하지 않아서 재정은 뜻밖에 건전했다. 페르티낙스가 주장한 재정 건전화는 모든 조직을 재평가하여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페르티낙스는 원로원에서 밝히기를 제국 전체의 모든 기관을 점검하여 개편안을 마련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로마 건국 기념제가 열리는 4월 21일 개편안을 공표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 페르티낙스는 그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차레로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콤모두스 시대에 처형되었거나 누명을 쓴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몰수된 재산을 반환했다. 국경을 지키는 장병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수도 주민들에게 황제 취임에 즈음한 축하 선물을 돈으로 나누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마에 사는 시민권 소유자는 1인당 100데나리우스의 보너스를 받았다.
  • 제위는 세습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1남 1녀가 있었지만 아내에게 황후의 칭호도 주지 않았고 자녀가 황궁에 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옆얼굴을 새긴 화폐를 발행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새겨진 문구는 ‘시민의 자유’였다.

[근위대장 레토의 욕심]

  •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뭐니뭐니해도 근위대장 레토의 공이 컸다. 최고 공신인 레토는 페르티낙스가 거기에 보답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새 황제가 자기를 이집트 장관에 임명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수도에서 뇌물을 받았다가는 당장 고발당하여 목이 날아간다. 속주에서도 비리를 저지르는 공직자는 속주민이 고발할 수 잇엇다. 하지만 이집트는 다른 속주와 달리 황제의 개인 영지다. 따라서 그곳에서 뇌물을 받는 것은 황제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일뿐, 로마 제국의 주권자인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황제만 눈감아주면 죄가 되지 않는다. 권력을 충분히 갖고 있었던 레토는 이집트 장관으로 한재산을 모으고 싶어했다.

[근위대장 레토의 실망]

  • 페르티낙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레토의 희망대로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통성을 갖지 않은 자신이 황제가 된 이상 우선 실력을 쌓아서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페르티낙스한테서 유연성을 빼앗아 버렸다. 그는 레토의 희망을 들어주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 석 달 가까이나 기다려도 소식이 오지 않자, 헛물을 켠 기분이 든 레토는 마침내 부하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새 황제 페르티낙스는 원로원의 꼭두각시라면서, 황제의 원로원 편향 정책을 비난 한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즉위하자마자 근위병들에게 특별 보너스를 나눠줬지만, 페르티낙스는 그 일도 뒤로 미루었다. 레토는 그것을 들먹이며 황제가 근위대를 무시한다고 비난했다.

 

【근위대, 페르티낙스를 살해하다】

  • 193년 3월 28일, 레토의 선동을 받은 근위병들이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을 습격했다. 황제의 신병 경호를 맡은 호위병들도, 황궁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그들의 서슬에 놀라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남은 페르티낙스는 단 칼에 쓰러지고 말았다. 제위에 오른 지 87일 만이었다. 아내와 두 자녀를 저승의 길동무로 삼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 뒤이어 같은 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칙령을 내려 피살당한 통치자를 기리는 성스러운 장소를 마련하고 거기에 페르티낙스의 이름을 붙였다.

 

【페르티낙스의 가족】

  • 페르티낙스는 180년경, 170년에 집정관을 지낸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술피키아누스의 딸인 플라비아 티티아나와 결혼해 아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와 딸 헬비아를 낳았다.
  • 페르티낙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딸이며 근위대 장교 루키우스 디디우스 마리누스의 아내였던 코르니피키아와 오랫동안 불륜 관계를 이어갔다. 그녀는 이에 대해 따지기는 커녕 어느 가수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가 애인을 두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 페르티낙스의 아들 소 페르티낙스는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신격된 아버지의 신전 사제로 선임되었고, 212년경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카라칼라가 형제 게타를 살해한 사건과 관련해 황제에게 “사르마티쿠스(사르마티아 정복자)”, “파르티쿠스(파르티아 정복자)”에 이어 “게타쿠스(게타 정복자)”라는 칭호를 수여하자는 조롱이 섞인 농담을 했다가 카라칼라에게 밉보여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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