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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22권] 제1부. 제3장. 국내진공작전과 봉오동전투
제1절.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1. 독립군단의 전력 정비
- 3ㆍ1운동 이후 항일 독립군단... 연해주에 출병했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암암리애 매각했던 무기를 구입... (81)
-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임... 무기의 구입과 운반... 군사훈련 (82)
2.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 임시정부에서는 군사상 경험이 있는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군사회의를 개최하여 군사계획을 수립할 것과 중국 및 러시아 지역에서 10만 명 이상의 의용지원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독립운동진영의 항일의지를 고양... (83)
- 1920년 1월 8일자 『독립신문』... ‘우리의 당면 대 문제는 우리의 독립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라는 방계를 고쳐 전쟁하려 함이오’ㆍ‘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독립에 반대하는 자’라는 취지의 안창호의 연설을 게재하여 독립전쟁의 의지를 나타냄... (83)
- 1920년대 초부터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국경지역의 경찰병력을 대폭 강화... 1925년 현재 5,882명... (83)
- 독립군의 국경지역 국내진공작전 현황... (85)
제2절. 국내언론의 보도경향
- 『동아일보』에 나타난 1921년 독립군의 국내진격 현황... (86-88)
- 『독립신문』과 권고문을 소지... 독립군의 중요활동이 선전활동도 겸하고 있었음... 1920년 7월 25일 평안북도 후창군... 27일 고전(高田) 순사부장 사살... (88)
- 『매일신보』에 나타난 1920년대 초반 독립군의 국내진격 현황... (89-90)
- 독립군의 활동은 일제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만주지역 독립군세력과 일제와 긴장관계는 이후 대규모 전면전으로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90)
제3절. 봉오동전투의 전개
1. 승전의 전초, 삼둔자 전투
- 1920년 6월 7일에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의 첫 번째 대규모 충돌인 봉오동전투가 발발하였다....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에서 전개되었던 ‘삼둔자전투’에서 시작... 6월 4일 새벽 신민단의 박승길이 지휘하는 30명 가량의 독립군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군조 복강(福江)이 인솔하는 헌병 순찰 소대를 격파하고 두만강을 건너 귀환...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신미(新美) 중위의 인솔하에 1개 중대 병력과 헌병경찰 중대를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부대의 추격에 나섰다... 삼둔자 양민 학살... 독립군의 기습공격... 마을 서북쪽에 있는 400여 미터 정도의 일광산에서 이루어짐... 일제는 6월 19일에 ‘군사령부 발표’를 통해 삼둔자전투의 실상을 왜곡... (91-93)
- 삼둔자전투가 있기 이전 5월 27일에 20여명의 무장독립군이 국내로 진격... 운무령 서편 산록... (93)
- 조선군사령부는 기사를 통해서...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이 ‘조선 내지를 침입한 일이 32회에 이르렀으며, 총기를 사용해 물리친 일이 10번이나 된다’고 강조... (94)
- 조선군사령부에서는 삼둔자전투에서 일본군이 독립군 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2명을 사로잡았다고 발표... 『독립신문』의 보도에는 적을 대파하였다고 보도... (94)
- 삼둔자전투에서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 19사단사령부는 안천(安川) 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가 독립군을 섬멸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일본군과 독립군은 봉오동에서 재차 대규모의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일본군은 신곡(神谷) 대위 이하 70명의 혼성중대로 편성된 보병 37연대 제10중대, 자산(紫山) 준위 이하 27명의 연대 기관총 소대, 삼(森) 대위 이하 123명의 보병 75연대 제2중대, 헌병대 소원(小原) 대위 이하 11명, 경찰대 갈성(葛城) 경시 이하 11명을 중심으로 편성... 삼둔자 전투에서 패배한 신미 중대의 병력도 포함... (94-95)
- 일본군은 1920년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과 해란강의 합수목에서 약 10리 떨어진 하탄동에서 도강한 후 골방령을 넘어 후안산으로 들어왔다... 신민단 모연대원 14명도 마을의 최명극의 집에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최명극의 집에서 이들 일본군과 독립군이 교전하는 후안산전투가 발발하여 모연대원들은 일본군 1명을 사살하고 뒷문으로 빠져나가 고려령 방향으로 퇴각... (95)
2. 봉오동 전투에서 승전
- 홍범도와 최진동... 제1중대장 이천오에게 중대원을 이끌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매복하게 했으며, 제2중대장 강성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북 북단에 매복하였으며, 군무국장 이원에게는 본부 병력 및 잔여중대를 인솔하고 탄약을 공급하면서 만일의 경우 퇴로를 확보하도록 명령하였다... 제2중대 제3소대 제1분대 이화일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어 고려령 북쪽 고지와 마을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척 하면서 후퇴하여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96)
- 6월 7일 오전 6시 30분... 봉오동에 도착한 일본군은 이화일 부대의 공격을 받고 피해를 입었다. 이후 10시 30분 경 부대를 진격하여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 봉오동 하촌을 수색하던 일본군은 독립군이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 집결한 다음 중촌과 상촌을 거쳐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지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96)
- 오후 1시경 일본군은 척후병을 선두로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왔으며, 홍범도의 공격명령을 알리는 총성을 신호로 집중 사격... 4시 40분경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와 우박과 폭풍이 거세져 서로 상대를 구별할 수 없도록 기상이 악화되지 홍범도는 퇴각명령... 일본군대 패주... 봉오동에 남아있던 어린이와 부녀자 16명을 살해하고 6월 7일 함경북도 온성군 유원진 건너편의 두만강변으로 퇴각... 이 전투는 청산리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초전... (96-97)
- 봉오동 전투상황을 왜곡... (97-98)
- 중국신문인 『상해시보』는 일본군이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하여 150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독립군은 160정의 소총과 3정의 기관총을 노획하였다고 보도... 전투 이후 일본군에서는 화룡현 흡강의 도구 통행을 금지하는 등 독립군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98)
- 임시정부 군무부는 『독립신문』에서... ‘적의 사자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이요, 아군의 사망자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이며, 적의 유기물이 다유(多有)’하다고 보도... (99)
- 6월 10일에 대한국민회의 제일남지방회 회장 남용하가 ‘독립전쟁 개시의 건’이라는 공문을 발송하여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의 승리를 알렸다. (99)
- 안천 추격대는 독립군에 대해 ‘전부 러시아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훈련도 상당히 받았으며, 방어전투를 치를 때 용감히 싸운다’고 하여 독립군의 막강한 전투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99)
- 홍범도는 정일(征日) 제1군사령관장의 명의로 간도국민회 회장 구춘선에게 의사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여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했다. 6월 말경 대한북로독군부 산하의 직속부대원들을 이끌고 연길현 의란구에 주둔하여 다시 일본영사관 경찰들을 긴장시켰다. (100)
- 봉오동전투 이후 홍범도 부대... 8월 7일 국가자와 두도구의 일본영사관 분관 소속 경찰과 함경북도 각 경찰서 소속의 경관 등 64명이 광곡종조의 경부의 인솔하여 독립군에 대한 수색작업 전개... 이에 130여명의 홍범도 부대는 연길현 노두구 탄산리를 지나다가 일본경찰이 오는 것을 발견하고 교전에 돌입하여 승리를 거둠... 서전(西田) 순사부장 중상... (100)
- 당시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던 이정은 그의 『진중일지』 7월 23일자에서 “홍범도 장군은 부하 1개 중대를 거느리고 노두구 방면에서 일본 영사관원 28명과 조우하여 22명을 사살하였는데, 독립군측에는 사상자가 전혀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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