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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 [Galba, BC. 3 ~ AD. 69] 로마 제국 제6대 황제(AD. 68~69)
【개인 정보】
- [이름]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
- [출생] 기원전 3년 12월 24일, 이탈리아 테라치나(Terracina)
- [사망] 기원후 69년 1월 15일, 이탈리아 로마
- [재위] 기원후 68년 6월 8일 ~ 69년 1월 15일
- [전임] 네로(Nero, AD. 37~68) : 제5대 황제(AD. 54~68)
- [후임] 오토(Otho, AD. 32~69) : 제7대 황제(AD. 69)
【가족 관계】
- [아버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Gaius Sulpicius Galba) : 기원전 5년에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 [어머니] 뭄미아 아카이카(Mummia Achaica)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Quintus Lutatius Catulus Capitolinus, BC. c.121~61)의 딸
- [어머니] 리비아 오켈리나(Livia Ocellina) – 갈바의 계모
- [형제]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Gaius Sulpicius Galba, ?~36) : 기원후 22년에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Decimus Haterius Agrippa)와 함께 집정관으로 재직
- [본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 BC. 3 ~ AD. 69) : 제6대 황제(AD. 68~69)
- [배우자] 아이밀리아 레피다(Aemilia Lepida) : 레피다가 생존해 있을 때, 소 아그리피나가 남편이 사망한 뒤 갈바에게 구애를 하였으나 갈바는 아내에게 충실했기 때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레피다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소 아그리피나를 꾸짖고 뺨을 때린 적이 있다.
- [자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Lucius Calpurnius Piso Frugi Licinianus, AD. 38~69) – 기원후 69년 1월 10일, 로마 황제 갈바에게 입양되었는데, 이 입양에 불만을 품은 오토가 갈바와 함께 살해하였다.
【기원전 3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나다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는 기원전 3년 12월 24일, 이탈리아(Italia)의 테라치나(Terracina)에서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 그의 가문은 고대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명성을 떨친 명문이었고, 갈바는 티베리우스(Tiberius), 칼리굴라(Caligula),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 시기에 행정과 군사 경험을 쌓았다.
【기원후 30년】 법무관에 임명되다 / 아키텐니아 총독
- 갈바는 기원후 30년경 법무관(Praetor)으로 임명되었고, 1년 정도 프랑스 남부 지역의 아키텐니아(Aquitania) 총독을 맡았다.
【기원후 33년】 집정관에 선출되다
- 기원후 33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기원후 39년】 게르마니아 군단장에 임명되다
- 기원후 39년, 황제 칼리굴라는 자신에 대한 음모에 게르마니아 군단의 장군인 그나에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에툴리쿠스(Gnaeus Cornelius Lentulus Gaetulicus)가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갈바를 게르마니아 군단의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갈바는 게르마니아 군단의 지휘관으로 엄격한 규율로 지휘하였다고 한다.
【기원후 41년】 칼리굴라 암살 후 황제 자리를 권유받다?
-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갈바가 기원후 41년, 칼리굴라의 암살 후 황제 자리를 권유받았지만, 갈바는 충성스럽게 클라우디우스를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허구일 수 있다)
【기원후 44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다
- 기원후 44년 혹은 45년부터 아프리카 속주(Africa Province) 총독으로 임명되어서 봉사했다.
【기원후 49년】 은퇴하다
- 기원후 49년경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소(小) 아그리피나와 결혼하였는데,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은퇴하였다고 한다.
【기원후 60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임명되다
- 기원후 59년 또는 60년에 네로 황제에 의해 히스파니아(Hispania)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기원후 68년】 황제에 오르다
네로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다 : 기원후 68년 초
- 황제 네로(Nero)의 통치 말기에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각지에서 반란 조짐이 일어났다. 당시 갈바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Hispania Tarraconensis) 총독으로 부임 중이었으며, 이 지역 병사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 기원후 68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Gaius Julius Vindex)가 네로의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의 기일(3월 23일)에 맞춰서 반란을 일으켰다. 갈리아에서 먼저 봉기하자, 갈바도 이에 동조하며 네로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로마 원로원과 시민의 장군(Legatus Senatus Populique Romani)”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원로원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황제에 오르다 : 기원후 68년 6월
- 그는 황제의 근위대장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Ofonius Tigellinus)가 갈바를 지지하였고, 공동 근위대장 님피디우스 사비누스(Nymphidius Sabinus)가 기원후 6월 8일, 네로가 이집트로 도망쳤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네로가 도망 중 자결하자, 원로원은 갈바를 새로운 황제로 선언하였다.
- 로마로 입성한 갈바는 초기에는 개혁의 기대를 받았지만,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반란 당시 자신을 지지했던 병사들에게 포상을 약속했지만 이를 철회했고, 이를 계기로 군 내부에서 불만이 폭발하였다. 동시에 원로원 중심의 귀족 정치를 복원하려 했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냉정한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통치의 실패와 민심 이반
- 갈바는 네로의 측근을 대거 숙청하였다. 그러나 재정 절약을 내세워 군대의 보너스를 삭감하여, 신뢰할 수 있는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였다.
【기원후 69년】 근위병들에게 살해당하다
- 기원후 69년 1월 2일에는 라인강 방위군이 갈바가 황제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 기원후 1월 10일에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Lucius Calpurnius Piso Licinianus)를 입양하여 자신의 후계자임을 세상에 알렸는데 이는 자신이 갈바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오토를 분노케하여 오토(Otho)의 쿠데타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 기원후 69년 1월 15일, 오토와 결탁한 근위병들이 로마 시내에서 갈바를 습격하고 살해하였다. 갈바의 시신은 거리에서 모욕을 당했고, 오토가 곧바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갈바의 사망은 “4황제의 해(Year of the Four Emperors)”라는 대혼란기의 신호탄이 되었다.
- [역사적 평가]갈바는 도덕적이고 절약 정신이 강한 황제로 알려졌지만, 정치적 유연성과 군 통제력이 부족하였다. 강경하고 고지식한 성향은 그를 개혁자보다는 “구시대적 원로”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결국 민심과 군심을 모두 잃는 결과가 되었다.그의 짧은 통치는 황제 권력이 더 이상 혈통이나 원로원 추천만으로 유지되지 않음을 보여준 역사적 전환점으로 쿠데타로 권력을 잡는 것이 쉽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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