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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우스 율리아누스 [Didius Julianus, AD. 133~193] 로마 제국 제19대 황제(AD. 193)

by [*수호천사*] 202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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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우스 율리아누스 [Didius Julianus, AD. 133~193] 로마 제국 제19대 황제(AD. 193)

 

【개인 정보】

  • [이름]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Marcus Didius Julianus)
  • [출생] 기원후 133년 1월 29일, 이탈리아 메디올라눔(Mediolanum)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의하면 137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 [사망] 기원후 193년 6월 2일, 이탈리아 로마
  • [재위] 기원후 193년 3월 18일 ~ 6월 2일
  • [전임] 페르티낙스(Pertinax, AD. 133~193) : 로마 제국 제18대 황제(AD. 193)
  • [후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AD. 145~211) : 로마 제국 제20대 황제(AD. 193~211)

【가족 관계】

  • [아버지] 퀸투스 페트로니우스 디디우스 세베루스(Quintus Petronius Didius Severus) : 퀸투스 페트로니우스 세베루스(Quintus Petronius Severus)와 디디아 유쿤다(Didia Jucunda)의 아들
  • [어머니] 아에밀리아 클라라(Aemilia Clara)
  • [배우자] 만리아 스칸틸라(Manlia Scantilla)
  • [딸] 디디아 클라라(Didia Clara) : 153년경 출생

【출생과 가문】

  •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하드리아누스 치세 말기인 133년에 북이탈리아의 메디올라눔(오늘날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율리아누스의 가문은 대대로 원로원을 지낸 밀라노의 부유한 유력 가문이었다.
  • 그의 아버지는 퀸투스 페트로니우스 디디우스 세베루스(Quintus Petronius Didius Severus)였고, 어머니는 북아프리카 여성으로 집정관 계급 추신의 아이밀리아 클라라(Aemilia Clara)였다.
  • 그에게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디디우스 프로쿨루스(Didius Proculus)와 디디우스 눔미우스 알비누스(Didius Nummius Albinus)였다.
  • 그는 로마 여성 만리아 스칸틸라(Manlia Scantilla)와 결혼했고, 153년경,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디디아 클라라(Didia Clara)가 태어났다.

 

【성장과 경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집에서 하숙하다]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15세 무렵 부모 슬하를 떠나 로마로 공부하러 갔다. 이때 그를 맡아준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어머니였다. 율리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집에 하숙하면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마르쿠스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회계 감사관에서 군단장까지]

  • 그는 ‘회계감사관’으로 그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안찰관’을 거쳐서 ‘법무관’이 되었다. ‘전직 법무관’으로 그는 북아프리카 속주와 소아시아 속주, 갈리아의 속주인 벨키카에 파견되었다. 그가 벨키카에서 임기를 마치기 전, 게르만의 한 갈래인 카티족이 라인 강을 넘어 침입하였다. 그때 율리아누스는 로마 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주민들을 용감히 싸워서 버텨냈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제22 프리미게니아 군단장을 맡았는데, 임지는 모곤티아쿰(오늘날의 마인츠)였다.

[집정관을 거쳐 속주 총독의 경력]

  • 군단장을 지낸 뒤 그는 정규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달마티아 속주 총독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저지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을 역임하였다.
  • 본국으로 돌아온 율리아누스는 본국 이탈리아의 식량을 확보하는 중책을 맡았다가 콤모두스 시대에 소아시아 북부의 폰투스 총독과 비티니아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곳은 소위 ‘원로원 속주’라고 해서 군단이 주둔하지 않았지만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서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었다.

 

【경매로 황제가 되다】

  • 율리아누스가 192년에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왔을 때 페르티낙스 황제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페르티낙스를 없애는 데 성공한 레토가 다음 황제로 점찍은 사람은 바로 그 무렵 북아프리카에서 수도로 돌아온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두 사람의 황제 경쟁자]

  • 쿠데타의 성패는 사태를 신속하게 기정 사실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승낙했지만, 예상치 못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페르티낙스의 장인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Titus Flavius Claudius Sulpicianus, c.137~197)라는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는 페르티낙스의 장인이라고 하지만 페르티낙스보다 10살 어렸다. 이들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제위에 앉힐 것인지는 레토의 책동으로 근위대 병사들이 결정하게 되었다.

[황제를 두고 경매하다]

  •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두 명의 황제 후보는 제위 경매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경합은 술피키아누스가 근위병 1인당 5,000데나리우스, 율리아누스가 6,250데나리우스를 불렀을 때 승패가 판가름났다. 여기에는 원로원도 분개했지만, 결국 제위를 낙찰받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황제 취임을 승인했다.

[군단의 반발]

  • 하지만 변경의 방어선을 지키는 장병들은 승인하지 않았다. 페르티낙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는 동요하지 않았던 군단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을 알고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율리아누스 역시 군단장이나 총독의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페르티낙스와 비교해서 감점 요인이었다.
  • 페르티낙스의 경력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정상으로 올라간 ‘성공 신화’의 본보기가 되었지만, 율리아누스의 경력은 원로원 계급으로 태어나 처음부터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한 자의 진로를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속출하는 황제 추대]

  • 율리우스 디디우스가 황제에 취임(3월 28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9일,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가 군단병들의 추대로 황제를 자칭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Pescennius Niger, c.135~194)와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Decimus Clodius Albinus, c.150~197)가 각각 휘하 군단병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하고 나섰다.
  • 아마도 당시에 군단병들은 근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열악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페르티낙스는 당시에 속주 총독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상관이었고, 그들의 뒤에는 폼페이아누스가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율리아누스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속된 말로 만만한 상대였다고 할 수 있다.
  • 매년 1월 1일에 군단에서는 황제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황제와 병사가 맺는 계약이었고 황제에 대한 신임투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율리아누스가 황제에 취임했으니 율리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받은 군단병들이 황제에 대한 신임 투표이기도 한 충성 선서를 거부한 것이다.

 

【제위 쟁탈전】

 

[이탈리아 출신 vs 북아프리카 출신]

  • 193년 봄부터 소위 제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그 출신이 북이탈리아의 밀라노였다. 시리아에서 황제를 자칭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도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브리타니아 총독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하드루메툼이라는 항구도시 출신이었다.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도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 출신이다. 제위 쟁탈전에는 이탈리아 출신 두 명과 북아프리카 출신 두 명이 대결하는 양상이 되었다.

[군사력 비교]

  • 이들의 쟁탈전에서 중요한 것은 군사력이다.
  •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Marcus Didius Julianu, 133~193) : 확실한 지지를 표명한 것은 근위대 1만명이지만 이들은 지지자일뿐, 그의 직속 부하는 아니었다.
  • 페스켄니우스 니게르(Pescennius Niger, c.135~194) : 카파도키아의 2개 군단, 시리아의 3개 군단, 팔레스타인의 2개 군단, 아라비아 속주의 1개 군단을 합하여 8개 군단 4만 8천명을 확보하고 있었다.
  •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Decimus Clodius Albinus, c.150~197) : 그의 직속 군사력은 브리타니아의 3개 군단이지만 황제를 자칭한 후 라인 강 방위선의 4개 군단의 지지를 얻어 7개 군단 4만 2천명을 확보하였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 : 그는 ‘게르마니아 방벽’을 지키는 2개 군단, 판노니아의 4개 군단, 모이시아의 4개 군단, 다키아의 2개 군단을 합해서 12개 군단의 7만 2천명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제국의 최정예로 알려진 도나우 강 방위선의 군단을 확보하고 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로 향하다]

  • 율리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움직인 사람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그는 우선 수도로 가기 전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자는 제안을 하였고 알비누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세베루스는 일단 2개 군단 1만명을 거드리고 로마로 향했다. 근위대도 1만 명이지만 전투 경험은 자신의 부하들이 월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 5월에 세베루스가 이끄는 2개 군단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 병사들에게 보름치 식량만 휴대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원로원에 세베루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해 달라고 요청하고 근위대장 레토를 통해 방어 준비를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원로원은 동요하고 있었고, 근위병들도 허둥대고 있었다.

 

【율리아누스, 고립되어 살해되다】

  • 세베루스가 이탈리아도 들어왔을 때 라벤나의 해군이 가장 먼저 율리아누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세베루스 쪽으로 돌아섰다. 조급해진 율리아누스는 민중의 지지라도 확보하려고 민중이 싫어하는 근위대장 레토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레토의 부하였던 근위병들의 마음만 떠나게 했을 뿐이다.
  • 율리아누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세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원로원 의원을 사절로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답장도 하지 않고 계속 행군을 계속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 받은 율리아누스 편을 들은 것을 후회하는 근위병 몇 명이 193년 6월 1일, 황궁에 있는 율리아누스를 죽였다. (원로원이 6월 1일 사형선고를 했고, 근위병에게 6월 2일에 살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원로원은 ‘다마나티오 메모리아에(damnatio memoriae)’, 즉 ‘기록말살형’을 의결해 율리아누스와 그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부정하였다. 새로 황제가 된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는 프라이토리안 가드(친위대)를 해체했고, 페르티낙스를 암살했던 병사들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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