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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Domitianus, AD. 51~96] 로마 제국 제11대 황제(AD. 81~96)

by [*수호천사*] 202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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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Domitianus, AD. 51~96] 로마 제국 제11대 황제(AD. 81~96)

 

【개인 정보】

  • [이름]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
  • [영문] 도미티안(Domitian)
  • [출생] 기원후 51년 10월 24일, 이탈리아 로마
  • [사망] 기원후 96년 9월 18일, 이탈리아 로마
  • [재위] 기원후 81년 9월 14일 ~ 96년 9월 18일
  • [전임] 티투스(Titus, AD. 39~81) :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AD. 79~81)
  • [후임] 네르바(Nerva, AD. 30~98) : 로마 제국 제12대 황제(AD. 96~98)

【가족 관계】

  •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AD. 9~79) : 로마 제국 제9대 황제
  • [어머니] 도미틸라(Domitilla
  • [형] 티투스(Titus, AD. 39~81) :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AD. 79~81)
  • [본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 AD. 51~96) : 로마 제국 제11대 황제(AD. 81~96)
    • [아들] 베스파시안(Vespasian the Younger, AD. 88~?)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의 아들로 도미티아누스의 양자가 됨
    • [아들] 도미티안(Domitian the Younger, AD. 90~?)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의 아들로 도미티아누스의 양자가 됨
  • [배우자] 도미티아 롱기나(Domitia Longina, c.50/55~c.126/130) : 집정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Gnaeus Domitius Corbulo)의 딸, 첫 남편 루키우스 아이일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이일리아누스(Lucius Aelius Lamia Plautius Aelianus)와 이혼하고 71년 도미티아누스와 결혼하였다.
    • [아들] 플라비우스 카이사르
    • [딸] 플라비아
  • [여동생] 소(小)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the Younger, AD. c.45~c.66)
    • [딸]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배우자]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 AD. ?~95)

【초기 생애와 정치적 배경】

  • 도미티아누스는 기원후 51년 10월 24일에 아버지 제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와 어머니 대(大)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Major)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형으로는 제10대 황제가 티투스, 누나로는 소(小) 플라비아 도미틸라(Domitilla the Younger)가 있다.
  • 증조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페드로(Titus Flavius Petro)는 폼페이우스 휘하의 백인대장으로 복무했으나,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전 중 도망쳐서 불명예스럽게 경력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부유한 여성 테르툴라와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의 기반을 마련했고, 그의 아들(도미티안의 조부) 사비누스는 세금 징수원과 은행업을 통해 많은 부와 지위를 확보하였다. 이후 베스파시아 폴라와 결혼하여 가문을 원로원 계층으로 끌어올렸다.
  • 도미티아누스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조용했고, 형 티투스보다 정치 경험은 부족했으며, 주로 문학, 철학, 수사학 등에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탈모에 매우 민감했다고 전해지며, 후에 가발을 써서 이를 숨겼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심지어 모발 관리에 관한 책을 썼다고도 한다. 그의 성격의 모호함은 점점 더 고립된 삶을 살면서 심화되었고, 고립된 성장 배경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다】

  • 68년 네로가 자살한 후 제국은 극도의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갈바는 오토에게 살해되었고, 오토는 비텔리우스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자살하였다. 비텔리우스가 승자가 되어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통치는 무능함 그 자체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가 69년 7월에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때 로마에 있던 도미티아누스는 비텔리우스에 의해 가택연금에 처해진다.
  •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지휘하는 군대가 로마에 입성하였을 때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자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베스파시아누스의 형)와 함께 캡톨리누스 언덕으로 피신해 있었다. 69년 12월 19일, 비텔리우스의 추종자들이 캡톨리누스 언덕으로 몰려왔고 사비누스는 붙잡혀서 살해당하였다. 위기의 순간에 도미티아누스는 이시스의 숭배자로 변장하여 탈출하였고 그날 밤 아버지의 지지자인 코르넬리우스 프리무스와 함께 지냈다. 12월 20일 오후, 비텔리우스가 사망하였고 도미티아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군단을 맞이하였다.
  • 69년에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며, 자연스럽게 도미티아누스는 황제의 직계 가족으로 정치적 입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형인 티투스는 착실하게 관직을 수행하면서 경력을 쌓아나갔지만, 도미티아누스는 형의 그늘에 가려졌고 철저히 소외된다.
  • 기원후 70년, 베스파시아누스는 막내 아들 도미티아누스를 티투스의 딸인 줄리아 플라비아(Julia Flavia)와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인 루키우스 에이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이엘리아누스(Lucius Aelius Lamia Plautius Aelianus)의 아내인 도미티아 롱기나(Domitia Longina)를 사랑하고 있었고 둘 사이를 이혼시켰다. 처음에 무모해 보였던 이 결혼은 두 가문에 모두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도미티아 롱기나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Gnaeus Domitius Corbulo)의 딸이자,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인 주니아 레피다(Junia Lepida)의 손녀였다. 결국 도미티아 롱기나는 이혼 후 도미티아누스와 결혼하게 된다.
  • 기원후 79년에 형인 티투스가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10대 황제에 즉위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그때까지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훗날 티투스의 죽음에 어느 정도 관여한 듯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로 즉위하다】

 

[황제의 절대 권력을 추구하다]

  • 기원후 81년에 형인 티투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도미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의 15년 간의 통치는 티베리우스 이후로 가장 긴 기간이 된다.
  • 도미티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도미티아 롱기나에게 ‘아우구스타’라는 명예 칭호를 부여했고, 황제가 되기 직전에 태어난 아들을 신격화하여 동전 뒷면에 새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은 83년에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것에 대한 충격인지 몰라도 도미티아누스는 잠시 도미티아 롱기나를 유배시켰다가 불러들인다. (도미티아누스가 조카인 줄리아 플라이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루머도 있지만 도미티아 롱기나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와 형이 유지했던 공화정의 외형을 빠르게 제거했다. 그는 제국의 정치 중심을 황궁으로 옮기며 원로원의 권한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도미티아누스는 절대적인 정치 권력뿐만 아니라, 황제가 문화적ㆍ도덕적 지도자로서 일상생활 전반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경제, 군사, 문화 전반에서 야심찬 개혁 정책을 펼치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번영을 부활시키려 했다.
  •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거대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양심적이고 철저하게 제국을 통치하고자 하였다. 그는 행정의 모든 분야에 직접 관여하며, 일상과 법률의 사소한 부분까지 칙령을 통해 규제했고, 조세와 공공 도덕도 엄격히 관리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의심 많은 성격과 높은 기준 덕분에 지방 총독들과 고위 관료들 사이의 부패는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억제되었다고 한다.
  • 그의 전제 정치의 현실은 그가 수도인 로마를 자주 비운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티베리우스 이후 가장 자주 로마를 떠난 황제로, 권력의 중심은 더 이상 로마가 아니라 황제가 있는 곳이었다.

[건축 사업을 추진하다]

  • 도미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했을 당시, 로마 도시는 69년 내전과 80년 대화재로 인한 피해에서 여전히 회복 중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단순한 복구를 넘어, 제국 전역의 문화적 르네상스를 완성하려는 야심찬 건축 사업을 추진했다. 약 50여개의 건축물이 새로 지어지거나 복원ㆍ완공되었으며, 이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최대 규모였다. 주요 건축물로는 도미티아누스 스타디움(현 피아자 나보나 자리)과 오데온이 있으며, 이곳에서 그는 카피톨리노 경기대회를 통해 그리스식 경기와 예술 경연을 재도입하였다.
  • 도미티아누스가 복원한 건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이었다. 또한 그는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화려한 궁전인 플라비우스 궁전을 건축했으며, 이는 건축가 라비리우스가 설계했다.

[도미티아누스의 경제 개혁 정책]

  • 대부분의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기간 동안 경제는 균형 잡힌 상태였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도미티아누스는 즉위하자마자 로마 화폐의 가치를 대폭 재조정했다.

[도미티아누스의 군사 정책]

  •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기간 동안 진행된 군사 캠페인은 대체로 방어적 성격을 지녔으며, 황제는 확장주의 전쟁을 거부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기여는 라인 강을 따라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한 리메스 게르마니쿠스(Limes Germanicus)의 개발로, 이는 광범위한 도로, 요새, 감시탑 네트워크를 포함했다.
  • 브리타니아 정복은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Gnaeus Julius Agricola)의 지휘하에 계속되었으며, 그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칼레도니아(오늘날의 스코틀랜드)까지 확장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또한 82년에 레기오 1 미네르비아(Legio I Minervia)라는 새로운 군단을 창설하여 차티족에 맞서 싸웠다.
  • 기원후 83년, 그는 게르마니아에서 채티족(Chatti)을 정벌하였으며, 이후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라는 칭호를 획득하였다. 이후 라인강 방어를 위해 군단을 배치하고 요새를 확장하는 등 국경 방어 체계를 정비하였다.
  • 85년부터 88년까지 다키아 왕국과 전쟁 벌였다. 이 전쟁에서 로마군의 피해가 있었지만 이후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고, 다키아가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일시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정치 탄압과 공포 정치]

  • 89년에 사투르니누스 총독의 반란이 발생하였으나 빠르게 진압되었다. 이후 도미티아누스는 반역 가능성이 있는 귀족과 원로원 인사들을 탄압하고 숙청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철저한 감시 체계와 정보망을 구축하여 공포 분위기를 확산하였다. 원로원에게 93년부터 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 이 시기에 도미티아누스는 황제 숭배 강화를 시도하였는데,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시도도 보였다.

 

【암살과 사후 평가】

  • 도미티아누스는 96년 9월 18일, 궁정 관리들에 의해 조직된 음모로 암살되었다. 암살은 파르테니우스의 자유민인 막시무스와 도미티아누스의 조카딸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청지기인 스테파누스에 의해 수행되었다. 스테파누스는 팔에 부상을 가장하여 붕대를 감고 은밀히 단검을 숨기고 나타났다.
  • 디오 카시우스는 이 암살에 도미티아누스의 아내 도미니아 롱기아도 가담했다고 언급하지만, 그녀가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충실함을 보였던 점을 고려할 때 그녀가 가담했다는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진다. 근위대 지휘관 중 하나인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는 음모를 알았을 것이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원로원 출신인 네르바(Nerva)를 후임 황제로 선택하였다.
  • 그의 사후 원로원은 ‘기억 말살형(Damnatio memoriae)’을 선고하여 그의 이름과 흔적을 공식 문서에서 지우려고 하였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무관심했지만, 군대는 크게 슬퍼하며 즉시 그의 신격화를 요구했고, 여러 지방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 고대 사가들은 그를 독재자로 묘사했지만, 현대 학계는 행정 능력과 국경 방어의 성과를 인정하는 추세다. 로마 제국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재정과 법률을 안정시킨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도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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