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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法興王, AD. ?~540] 신라의 제23대 국왕(AD. 514~540)
【개인 정보】
- 이름 : 김원종(金原宗), 본명은 모즉지(牟卽智), 모즉지(另卽智)
별호 : 진(秦), 탁부 모즉지 매금왕, 모즉지 마립간, 건원왕(建元王) - 출생 : 미상
사망 : 기원후 540년 7월
재위 : 514년 7월 ~ 540년 7월 - 전임 : 지증왕(智證王)
후임 : 진흥왕(眞興王)
【가계 정보】
- 부왕 : 지증왕(智證王, 437~514, 재위 : 500~514)
모후 : 연제태후 박씨(延帝夫人 朴氏) - 동생 :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
- 숙부 : 김아진종(阿珍宗)
- 왕후 : 보도부인 박씨(保刀夫人 朴氏)
- 장녀 : 지소태후(只召太后)
외손자 : 신라 24대 왕 진흥왕(眞興王)
외손자 : 제2대 풍월주 미진부 - 후궁 : 옥진궁주 김씨 (위화랑과 오도낭주의 딸)
장남 : 각간 비대전군(比臺) - 후궁 : 보과공주 부여씨 (백제 동성왕의 딸)
차녀 : 남모공주(南毛)
차남 : 제3대 풍월주 모랑(毛郞)
【법흥왕 연보】
【서기 514년】
- 법흥왕(法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원종(原宗)이다.[『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 하였다.]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고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임금은 키가 일곱 자였고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여 다른 사람들을 아끼었다.
【서기 516년】
- 3년(서기 516) 봄 정월,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냈다.
- 양산(楊山) 우물에 용이 나타났다.
【서기 517년】
- 4년(서기 517) 여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서기 518년】
- 5년(서기 518) 봄 2월, 주산성(株山城)을 쌓았다.
【서기 520년】
- 7년(서기 520) 봄 정월,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등급을 정하였다.
【서기 521년】
- 8년(서기 521),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서기 522년】
- 9년(서기 522) 봄 3월,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기에, 임금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을 보냈다.
【서기 524년】
- 11년(서기 524) 가을 9월, 임금이 남쪽 변방을 두루 돌아보며 영토를 개척하였다.
- 가야국 왕이 찾아와 만나보았다.
【서기 525년】
- 12년(서기 525) 봄 2월, 대아찬 이등(伊登)을 사벌주(沙伐州, 경북 상주) 군주로 삼았다.
【서기 528년】
- 15년(서기 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일찍이 눌지왕(訥祗王)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자기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모셨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으나,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물어보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알려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태우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한 곳에 정성이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태우며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임금의 딸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임금은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다. 딸의 병이 곧 나았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가 왕성에서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받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며 말하였다.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阿道)[혹은 아도(我道)라고도 한다.]가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 시중을 들던 세 사람은 계속 머물러 살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불법을 믿는 이가 종종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하였으므로 임금이 난감해 하였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異次頓)[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한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저의 목을 베어 뭇 사람들의 분분한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본래 불도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저는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모두들 말하였다.
“지금 중들을 보니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며, 말하는 논리가 괴상하여 정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저희들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홀로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불교의 심오함을 들어보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말이 단단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구나.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 쪽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
마침내 형리에게 이차돈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의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내가 죽고서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았는데 그 빛깔이 우유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기록에 의거한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서기 529년】
- 16년(서기 529),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서기 531년】
- 18년(서기 531) 봄 3월, 담당관에게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 여름 4월,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나라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상대등이라는 관직은 이때 처음 생겼으니, 지금의 재상(宰相)과 같다.
【서기 532년】
- 19년(서기 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서기 534년】
- 21년(서기 534), 상대등 철부가 죽었다.
【서기 536년】
- 23년(서기 536),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기를 ‘건원(建元)’원년이라 하였다.
【서기 538년】
- 25년(서기 538) 봄 정월,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는 교서를 내렸다.
【서기 540년】
- 27년(서기 540) 가을 7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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