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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AD. 9~79] 로마 제국 제9대 황제(AD. 69~79)
【개인 정보】
- [이름]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 [영문] 베스파시안(Vespasian)
- [출생] 기원후 9년 11월 17일, 이탈리아 팔라크리눔(Falacrinum)
- [사망] 기원후 79년 6월 23일, 아쿠아 큐틸리아에(Aquae Cutiliae)
- [재위] 기원후 69년 12월 22일 ~ 79년 6월 23일
- [전임] 비텔리우스(Vitellius, AD. 15~69) : 로마 제국 제8대 황제(AD. 69)
- [후임] 티투스(Titus, AD. 39~81) :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AD. 79~81)
【가족 관계】
- [아버지]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Titus Flavius Sabinus)
[어머니] 베스파시아 폴라(Vespasia Polla, BC. 15~?) - [형]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Titus Flavius Sabinus ?~69) 집정관 역임
- [누이] 플라비아 베스파시아(Flavia Vespasia) : 어릴 때 사망
- [본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9~79) : 로마 제국 제9대 황제(AD. 69~79)
- [배우자] 도미틸라(Domitilla the Elder, AD. ?~69)
- [아들] 티투스(Titus, AD. 39~81) :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AD. 79~81)
- [딸] 도미틸라(Domitilla the Younger, AD. c.45~c.66)
[사위]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Quintus Petillius Cerialis, AD. 30~83)- [손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
- [아들]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51~96) : 로마 제국 제11대 황제(AD. 81~96)
- [배우자] 카에니스(Caenis, AD. ?~75) :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Antonia Minor)의 비서이자 해방노예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정부
【베스파시아누스의 생애】
【초기 생애와 관리직 경험】
- 베스파시아누스는 기원후 9년 이탈리아 팔라크리눔에서 태어났다.
- 그의 아버지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Titus Flavius Sabinus)는 로마의 돈 빌려주는 사람, 빚 징수원, 그리고 세금 징수원으로 일했다. 그의 어머니인 베스파시아 폴라(Vespasia Polla)도 기사 계층에 속한 인물로, 그녀의 아버지는 군 캠프의 장교로서의 직위를 얻었고, 그녀의 오빠는 원로원이 되었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린 시절 코사(Cosa, 오늘날 안세도니아 근처)에서 할머니의 지도 아래 교육을 받았다. 그의 형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Titus Flavius Sabinus)는 다뉴브 강에서 중요한 군사 지휘관직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트라키아(Thrace)에서 약 3년 동안 군 복무를 하였다. 약 30년경, 그는 로마로 돌아와 비긴티비라테(vigintivirate, 고대 로마의 20인 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거리 청소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황제였던 칼리굴라 황제는 로마의 거리 청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책임자였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책망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정치적, 가족적 영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로마가 아닌 크레타와 같은 지방에서 재무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 기원후 38년, 그는 두 번째 시도에서 도시 관리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조영관(aedile)직을 얻었다. 이후 기원후 39년 또는 40년에 법무관(praetor)에 오르게 되었다.
【군사적 성공, 공직에서 물러남】
- 한편 그는 안토니아 카에니스(Antonia Caenis)라는 해방녀(freed-woman)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녀는 황제의 할머니인 소(小) 안토니아(Antonia Minor)의 신뢰받는 비서였다. 이러한 관계가 베스파시아누스의 성공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 기원후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즉위하자 그는 황제의 자유민인 나르키수스의 영향으로 레기오 II 아우구스타(Legio II Augusta)의 지휘관(legate)에 임명되었다. 곧이어 43년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브리타니아 침공에 참여하였고,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Aulus Plautius)의 총지휘 아래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 군단에서의 성공 덕분에 그는 51년에 집정관이 되었는데,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인 아그리피나와의 갈등으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아그리피나는 남편의 통치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그녀와의 적대적 관계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복귀, 그리고 유대 반란】
- 기원후 63년에 그는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으로 다시 공직에 나서게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곳에서 자신의 돈을 벌기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데 시간을 보냈고, 이것은 그 이후 큰 도움이 될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 북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 그는 네로 황제의 일행으로 그리스를 여행하였는데, 황제의 연주를 듣는 동안 졸았다고 해서 황제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 기원후 66년, 그는 유다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두 개의 군단과 여덟 개의 기병 중대, 열 개의 보조 부대가 베스파시안의 지휘 하에 파견되었고, 그의 장남 티투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또 다른 군을 이끌고 도착하였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요드팟(Yodfat) 포위전에서 포로로 잡힌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후원자가 되었다. 요세푸스는 후에 《유대인 고대사》를 저술한 인물이다. 유대 전쟁이 끝난 후, 요세푸스는 성경의 예언에 대해 논의하면서, 메시아와 같은 인물에 대한 예언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언급하였다.
【황제 경쟁에 뛰어들다】
- 기원후 68년 네로의 사망 이후, 로마는 짧은 재위 기간을 가진 여러 황제들과 내전의 한 해를 겪었다. 갈바는 오토의 지지자들에게 살해되었고, 오토는 비텔리우스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오토의 지지자들은 새로운 후보를 찾고 있었고, 그들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누스는 69년 2월에 황제 자리를 도전할 결심을 했지만, 실제로 행동에 나선 것은 그 후 몇 달이 지난 뒤였다. 69년 초 동안,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주 동방의 장군들과 회의를 가졌는데, 그 중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뮤키아누스(Gaius Licinius Mucianus)는 중요한 동맹이었다. 뮤키아누스는 시리아의 총독이자 세 개의 군단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네로의 유명한 장군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Gnaeus Domitius Corbulo)에게 봉사한 경험 덕분에 일리리쿰에서 브리타니아에 이르는 여러 강력한 로마 군 지휘관들과 정치적 연결을 갖고 있었다. 69년 5월, 뮤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비텔리우스에 도전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그의 요청에 따라, 베스파시아누스는 7월 초에 황제 선언을 하게 되었고, 티베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의 지시로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군단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 맹세를 하였다. 7월 3일, 베스파시아누스의 유대 군단에 이어, 7월 15일에는 뮤키아누스의 시리아 군단도 그의 편에 서게 되었다.
- 그때까지 황제인 비텔리우스는 갈리아와 라인강 지역의 베테랑 군단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베스파시아누스의 지지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모에시아, 판노니아, 일리리쿰의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면서 사실상 로마 세계의 절반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넘어간 셈이 되었다.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지휘하는 부대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비텔리우스의 군대를 베드리아쿰에서 격파하였고, 크레모나를 약탈한 후 로마로 진격하였다. 비텔리우스는 급히 프리무스와 평화 협정을 맺었으나, 황제의 근위대는 비텔리우스에게 계속 황제 자리를 유지하도록 강요하였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군대가 로마에 입성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 와중에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인 사비누스가 폭도들에게 살해당한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이집트에서 황제로 선포되다]
- 이집트는 로마의 곡물 공급의 핵심 지역으로, 이를 장악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제국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를 방문한 황제(파라오)였으며, 알렉산드리아의 경마장(hippodrome)에서 고대 파라오 전통에 따라 신격화되었다. 그는 창조신 아문(Zeus-Ammon)의 아들이자, 세라피스(Serapis)의 화신으로 선언되었고, 이집트 제사장들에 의해 맹인과 장애인을 침 뱉고 짓밟아 기적적으로 치료함으로써 신적 선출을 입증했다고 전해진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69년 12월 21일, 이집트에 머무르던 중 로마 원로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황제로 선포되었다. 초기 제국 행정은 무키아누스(Mucianus)가 담당했으며,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그를 도왔다.
- 무키아누스는 황제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 개혁을 시작했고, 베스파시아누스가 70년 중반 로마에 도착한 이후에도 세금 징수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기존 세금을 부활시키고 새로운 세금을 도입했는데, ‘공중화장실의 소변세(vectigal urinae)’ 등이 있다. 여기에서 유래한 라틴어 속담이 바로 “Pecunia non olet”(페쿠니아 논 올레트, 돈은 냄새나지 않는다)이다.
- 70년, 이집트에서의 봉기 외에도 제국 전역에서 혼란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유대 지역에서는 66년부터 반란이 이어졌는데,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Titus)가 70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제2성전을 파괴하며 반란을 진압하였다.
- 또한 70년 1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는 두 번째 바타비 반란(Batavian Rebellion)이 일어났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빌리스(Gaius Julius Civilis)와 율리우스 사비누스(Julius Sabinus)가 주도했는데, 사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갈리아 황제를 자칭하였다. 이 반란은 로마 군단 두 개를 격파하고 흡수했지만, 결국 베스파시아누스의 사위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아리스(Quintus Petillius Cerialis)에 의해 진압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 로마에 도착하다]
- 70년 중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는 로마에 도착했고, 자신의 호민관 권한 시작일을 69년 7월 1일로 소급하여 기산하였다. 그는 즉시 권력 유지와 반란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군대와 민중에게 선물과 보상을 제공했고, 비텔리우스(Vitellius)에게 충성했던 병사들은 해고하거나 처벌했다. 또한, 원로원과 기사 계급을 재편하여 적을 제거하고 측근을 기용했으며, 그리스 지방의 자치권도 철폐하였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보이도록 대중 인식을 통제하려 노력하였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역사서를 직접 검열하고 승인했으며, 그에게 우호적인 작가들에게 재정적 지원도 하였다. 타키투스(Tacitus), 수에토니우스, 요세푸스(Josephus) 같은 동시대 역사가는 베스파시아누스를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전임자들을 비판했다. 예를 들어, 타키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올라갔다고 밝혔고, 요세푸스는 그를 후원자이자 구세주로 표현했다.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는 그의 『박물지』를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헌정하였다.
- 반면, 그를 비판한 이들은 처벌받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공화정 지지 철학자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Helvidius Priscus)는 처형당했습니다. 또 다른 많은 철학자와 작가들도 그들의 비판적 저술 때문에 책이 압수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일부는 사후에도 비난을 받았다.
[건축 사업과 암살 음모]
- 71년부터 79년까지의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치는 많은 부분이 역사적으로 불분명하다. 다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 여러 건축물들을 세웠고, 여러 차례의 음모를 겪으며 살아남았다. 내전 이후 로마 재건에 힘썼으며, 평화의 신전(Temple of Peace)과 신격화된 클라우디우스를 위한 신전을 추가하였다. 또한 75년에는 네로 황제 시절부터 계획되었던 아폴로 거상을 세웠고, 마르켈루스 극장의 무대를 봉헌하였다. 예루살렘 함락 후 유대 신전에서 얻은 전리품 자금으로 콜로세움 건축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끊임없는 음모”에 시달렸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하나뿐인데, 78년 또는 79년에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Eprius Marcellus)와 아울루스 케이키나 알리에누스(Aulus Caecina Alienus)가 베스파시아누스를 암살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그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나 신이 되어가고 있는 건가?”]
- 베스파시아누스는 제9차 집정관 재임 중 캄파니아(Campania)에서 가벼운 병을 앓기 시작했다. 곧바로 로마(Rome)로 돌아갔지만 상태가 악화되자, 매년 여름을 보내던 레아테(Reate) 근처 아쿠아에 쿠틸리아에(Aquae Cutiliae)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병세는 악화되었고, 심한 설사에 시달리게 되었다.
- 죽음을 예감한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런, 나 신이 되어가고 있는 건가?(Vae, puto deus fio)”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황제는 서서 죽어야 한다”고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다, 부축하던 사람들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그는 79년 6월 23일, 향년 69세에 사망하였고, 아들 티투스(Titus)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사망과 유산】
- 베스파시아누스는 기원후 79년 6월 23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아들인 티투스가 황위를 이어받았으며, 베스파시아누스는 제국의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특히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경제적 회복과 군사적 안정을 이루었고, 건축과 문화적 유산에서도 많은 성과를 남겼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통치 아래서 로마 제국의 재정적 회복, 군사적 안정 그리고 문화적 발전을 이루어냈고, 그의 이름은 콜로세움을 비롯한 위대한 건축물들과 함께 기억되고 있다. 그의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같은 중요한 사건을 이루었고,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는 그를 계승하여 황제직을 이어갔다.
- 베스파시아누스는 흔히 실용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로 평가된다. 그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회복을 중시했으며, 강력한 군사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로마 제국의 국경을 강화하고, 제국 내의 불안을 해소하려 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은 로마 제국의 중흥을 이끈 중요한 시기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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