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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코르네유 [Pierre Corneille, 1606~1684] 프랑스의 비극 작가
- 이름 : 피에르 코르네유(Pierre Corneille)
- 출생 : 1606년 6월 6일, 프랑스 루앙(Rouen)
- 사망 : 1684년 10월 1일, 프랑스 파리(Paris)
- 배우자 : 마리 드 랑페리에르(Marie de Lampérière)
- 자녀 : 피에르 코르네유(Pierre Corneille)
- 형제 : 토마스 코르네유(Thomas Corneille), 안토니 코르네유(Antoine Corneille)
피에르 코르네유(Pierre Corneille)는 프랑스의 비극 작가로, 몰리에르, 장 라신과 함께 17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3대 극작가 중 하나이다. 그는 “프랑스 비극”의 창립자로 불리며, 거의 40년 동안 희곡을 작성하였다.

【1606년】 출생하다
- 6월 6일, 프랑스 루앙(Rouen)의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 어머니는 마르트 르 푸장(Marthe Le Pesant), 아버지는 저명한 법률가였던 피에르 코르네유(Pierre Corneille)였다.
- 그는 신앙심이 깊은 분위기 속에서 자라고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라틴문학, 특히 비극시인 세네카에 심취했다.
- 후에 에스파냐 연극을 연구하여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수학(修學) 후에는 고향 루앙에서 성직자가 되는 한편 사교계에도 출입하였다.
【1624년】 변호사가 되다
- 루앵 예수회 학교 부르봉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624년 6월에 변호사가 된다.
【1625년】 동생 토마 코르네유 출생하다
- 그의 동생인 토마 코르네유(Thomas Corneille, 1625-1709)가 태어났다.
- 그도 극시인이 되어 에스파냐극의 번안에 솜씨를 발휘, 광기 어린 로마네스크극 <티모크라트>(1653)는 당대에 가장 성공한 작품(상연 50회)이 되었으나 문학적으로는 무가치하고 형의 명성만이 남아 있다.
【1629년】 희극<멜리트(Mélite)>를 파리에서 상연하다
- 연애사건이 계기가 되어 쓴 희극 <멜리트(Mélite)>를 1629년에 파리에서 상연, 예상외의 성공을 올렸기에 파리로 진출했다.
【1633년】 코메디 데 튀를 참여와 탈퇴
- 1633년, 그는 루이 13세의 재상이자 추기경인 리슐리외 등 4명의 극시인과 함께 코메디 데 튀를을 형성했으나, 소심한 반면 자유를 갈구하는 성격 때문에 탈퇴하여 루앙에 돌아왔다. 이때 4명의 극시인들은 다음과 같다.
기욤 콜레테(Guillaume Colletet)
보아르로베르(Boisrobert)
장 로트루(Jean Rotrou)
클로드 드 레투아르(Claude de L'Estoile)
【1636년】 《르 시드(le Cid)》를 발표하다
- 새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1636년에는 《르 시드(le Cid)》를 발표, 대성공을 거두는 한편, 대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르 시드》는 이 작가의 성공작인 동시에 프랑스 고전극의 기초를 확립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 리슐리외가 창설한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는 작품의 인기를 인정했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결함을 지적하며 혹평했습니다.
고전 3일치 규칙(classical unities), 즉
시간의 일치(Unity of Time): 24시간 내에 모든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장소의 일치(Unity of Place): 배경이 한 장소로 한정되어야 한다.
행동의 일치(Unity of Action): 하나의 갈등이나 문제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르 시드》는 이 규칙들을 충분히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제작’으로 평가받았다. - 코르네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비판에 응답하기 위해 《르 시드》를 여러 차례 개정하기도 했습니다.
【1640년】 《오라스(Horace)》를 발표하다
- <르 시드> 이후 잠시 침묵을 지켜왔던 코르네유는 1640년, 로마 기사의 명예를 묘사한 《오라스(Horace)》를 발표하였으며, 이 작품은 리슐리외에게 헌정하였다.
【1641년】 《시나(Cinna)》를 발표하다 / 결혼하다
- 로마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시나(Cinna)》를 발표하였다.
- 1641년에는 마리 드 랑페리에르(Marie de Lampérière)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1643년】 《폴리외크트(Polyeucte)》를 발표하다
- 1643년에는 기독교 순교자의 숭고함을 주제로 하는 《폴리외크트(Polyeucte)》를 발표하였다.
- 《르 시드》, 《오라스(Horace)》, 《시나(Cinna)》, 《폴리외크트(Polyeucte)》는 코르네유의 고전 4부작(Classical Tetralogy)이라고 부른다.
【1644년】 희극 《르 멍퇴르(Le Menteur, 거짓말쟁이 사내)》를 쓰다
- 《폼페이의 죽음(La Mort de Pompée)》을 공연하였다.
- 그는 단 한 편의 희극도 썼는데, 그것이 바로 《르 멍퇴르(Le Menteur, 거짓말쟁이 사내)》(1644)이다. 이 작품은 코르네유의 대표 희극이자, 프랑스 희곡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645년】 《로도균(Rodogune)》 공연
- 《로도균(Rodogune)》을 공연하였다.
【1646년】 《테오도르(Théodore)》 공연
- 《테오도르(Théodore)》를 공연하였다.
【1647년】 《헤라클리우스(Héraclius)》 공연 /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 《헤라클리우스(Héraclius)》를 공연하였다.
- 1647년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652년】 《페르타리트(Pertharite)》 발표와 좌절
- 1652년, 코르네유는 작품 《페르타리트(Pertharite)》를 발표했지만 혹평을 받았다. 실망한 그는 극작 활동을 중단하고,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의 기독교 고전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운문으로 번역하는 데 집중한다. 이 작업은 1656년에 완성되었다.
【1659년】 《오이디푸스(Oedipe)》로 복귀하다
- 그 후 당시의 재무상 푸케의 간청이나 아우인 토마 코르네유의 성공 등에 자극을 받아 극단에 복귀, 《오이디푸스(Oedipe)》를 발표하여 루이 14세의 호평을 받았다.
【1660년】 자신의 극작술을 변호하다
- 1660년, 그는 자신의 극작술을 변호하고자 《드라마시 이론에 대한 세 편의 담론(Trois discours sur le poème dramatique)》을 발표하였다. 이 담론들은 《르 시드》 논쟁에 대한 코르네유의 지적 대응이자, 이론적 해명으로 볼 수 있다.
- 《황금양털(La Toison d'or, 1660)》을 발표하였다.
【1662년】 《세르토리우스(Sertorius)》 발표
- 《세르토리우스(Sertorius, 1662)》를 발표하였다.
【1664년】 《오통(Othon)》을 발표
- 《오통(Othon, 1664)》을 발표하였다.
【1666년】 《아게실라오스(Agésilas)》를 발표
- 《아게실라오스(Agésilas, 1666)》를 발표하였다.
【1667년】 《아틸라(Attila)》를 발표
- 《아틸라(Attila, 1667)》를 발표하였다.
【1670년】 장 라신과의 라이벌 대결 패배
- 1670년, 코르네유는 극적 라이벌인 장 라신(Jean Racine)과 함께 동일한 사건을 주제로 한 희곡을 쓰라는 도전을 받는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 모두 상대방도 같은 주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작품을 집필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코르네유의 《티테와 베레니스(Tite et Bérénice, 1671)》는 라신의 《베레니스(Bérénice)》보다 열등하다는 평을 받았다.
【1671년】 몰리에르 등과 공동 집필
- 이 시기에는 몰리에르(Molière)도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코르네유는 몰리에르, 필리프 키노(Philippe Quinault)와 함께 희극 《프쉬케(Psyché, 1671)》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1674년】 《쉬레나(Suréna)》의 실패
- 1674년에 마지막 작품 《쉬레나(Suréna)》를 발표했는데,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1684년】 사망과 장례식
- 1984년 10월 1일 사망했고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그를 추모하는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 그의 유해는 생 로크 교회(Église Saint-Roch)에 안치되었으나, 무덤에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1821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764년】 볼테르의 《코르네유 주석집(Commentaires sur Corneille)》
- 극작가이자 작가, 철학자였던 볼테르(Voltaire)는 프랑스 아카데미(Académie française)의 지원을 받아 코르네유의 희곡 작품을 주석과 함께 담은 12권짜리 《코르네유 주석집(Commentaires sur Corneille)》을 집필하였다.
- 1764년 출간된 초판 《주석집》에서는 코르네유의 뛰어난 작품들에 집중하며 비교적 온건한 비평을 담았다. 하지만 10년 후의 개정판에서는 코르네유에 대한 평가가 더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객관적인 비평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500개의 새로운 비평 주석이 추가되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볼테르의 비판이 지나치게 학술적이고, 심지어 질투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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