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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景德王, AD. 723~765] 신라 제35대 국왕(AD. 742~765)

by [*수호천사*] 2025.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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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景德王, AD. 723~765] 신라 제35대 국왕(AD. 742~765)


【개인 정보】

  • 이름 : 김헌영(金憲英)
  • 출생 : 기원후 723년
    사망 : 기원후 742년 5월(음력)
    재위 : 기원후 739년 5월(음력) ~ 742년 5월(음력)
  • 전임 : 효성왕(孝成王)
    후임 : 혜공왕(惠恭王)

【가계 정보】

  • 부왕 : 성덕왕(聖德王)
    모후 : 소덕왕후 김씨(炤德王后 金氏)
  • 이복형 : 효상태자(孝殤太子)
    이복누나 : 사소부인(四炤夫人)
  • 형 : 효성왕(孝成王)
  • 왕후 : 삼모부인 김씨(三毛夫人 金氏) –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
  • 왕후 : 만월부인 김씨 滿月夫人 金氏) – 서불한(舒弗邯) 의충(義忠)의 딸
    아들 : 건운(乾運) – 760년 태자에 책봉, 765년 혜공왕에 즉위.

【경덕왕 연보】

 

【기원후 742년】 경덕왕 원년

  • 경덕왕(景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헌영(憲英)이며 효성왕(孝成王)의 친동생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헌영을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한 것이다. 왕비는 이찬 순정(順貞)의 딸이다.
  • 겨울 10월,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후 743년】 경덕왕 2년

  • 봄 3월, 주력공(主力公)의 집에서 소가 한 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보내와 제사에 참여하여 조문하게 하고, 이어 임금을 신라왕으로 삼아 책봉하여 선왕의 관작을 잇게 하였는데 그 조서는 다음과 같았다.
    “고인이 된 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영해군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持節寧海軍使新羅王) 김승경(金承慶)의 아우 헌영은 대대로 왕업을 계승하여 어진 생각을 품고 상도에 맞는 예의에 마음을 두었으니, 성인의 풍속과 교화는 조리가 더욱 밝아지고 중국 제도의 의관도 따르게 되었다.
    바다를 통하여 사신을 보내오고 구름을 벗 삼는 먼 길을 따라 당나라의 조정에 왕래하여 대대로 사심 없는 신하로서 여러 번 충절을 나타내었다. 지난번에 왕의 형이 국가를 계승하였으나 그가 아들이 없어 동생이 그 뒤를 잇게 되니 이것도 일반적인 예법일 것이므로 이에 제후의 예로 우대하여 책명하노니, 마땅히 옛 전통을 지켜 번국(藩國)의 수장으로서의 명예를 계승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예우를 더해 중국 한나라 관작의 칭호를 주노니 형의 관작인 신라왕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충지절영해군사(新羅王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充持節寧海軍使)를 이어 받으라.”
    아울러 조서와 함께 황제가 주해한 『효경(孝經)』한 부를 주었다.
  • 여름 4월, 서불한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
  • 가을 8월, 지진이 났다.
  • 겨울 12월, 임금의 동생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니 황제가 그에게 좌청도솔부원외장사(左淸道率府員外長史)를 제수하고, 녹색 웃옷과 은 허리띠를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기원후 744년】 경덕왕 3년

  • 3년(서기 744) 봄 정월, 이찬 유정(惟正)을 중시로 삼았다.
  • 윤 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 여름 4월, 임금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를 지냈다.
  •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말을 바쳤다.
  • 겨울, 별이 중천에 나타났는데 그 크기가 곡식 다섯 말이 들어가는 그릇만 하였다. 이 별은 열흘 만에 사라졌다.

【기원후 745년】 경덕왕 4년

  • 봄 정월, 이찬 김사인(金思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떨어졌는데 그 크기가 달걀만 하였다.
  • 5월, 가뭄이 들었다.
  • 중시 유정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찬 대정(大正)을 중시로 삼았다.
  • 가을 7월, 동궁(東宮)을 수리하고 또한 사정부(司正府)와 소년감전(少年監典)과 예궁전(穢宮典)을 설치하였다.

【기원후 746년】 경덕왕 5년

  • 5년(서기 746) 봄 2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쳤다.
  • 여름 4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큰 연회를 베풀었다.
  • 승려 150여 명에게 도첩(度牒)을 주었다.

【기원후 747년】 경덕왕 6년

  • 봄 정월, 중시를 시중으로 고치고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설치하였다.
  •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쳤다.
  • 3월, 진평왕릉(眞平王陵)에 벼락이 쳤다.
  • 가을에 가뭄이 들었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전국에 특사를 보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위로하였다.

【기원후 748년】 경덕왕 7년

  • 봄 정월, 천구성(天狗星)이 땅에 떨어졌다.
  • 가을 8월, 태후가 영명신궁(永明新宮)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 처음으로 정찰(貞察) 한 명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여 바로 잡았다. 아찬 정절(貞節) 등을 파견하여 북쪽 변경을 시찰하게 하였다.
  • 처음으로 대곡성(大谷城) 등 14개의 군현을 설치하였다.

【기원후 749년】 경덕왕 8년

  • 봄 3월, 폭풍에 나무가 뽑혔다.
  • 3월, 천문박사(天文博士) 한 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여섯 명을 두었다.

【기원후 750년】 경덕왕 9년

  • 봄 정월, 시중 대정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 조량(朝良)을 시중으로 삼았다.
  • 2월, 어룡성(御龍省)에 봉어(奉御) 두 명을 두었다.

【기원후 752년】 경덕왕 11년

  • 봄 3월, 급찬 원신(原神)과 용방(龍方)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 가을 8월, 동궁아관(東宮衙官)을 설치하였다.
  • 겨울 10월, 창부(倉部)에 사(史) 3명을 더 두었다.

【기원후 753년】 경덕왕 12년

  • 가을 8월,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건방지고 무례하기에 임금이 그를 만나주지 않았더니 곧바로 돌아갔다.
  • 무진주(武珍州)에서 흰 꿩을 바쳤다.

【기원후 754년】 경덕왕 13년

  •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떨어졌는데 크기가 계란만 하였다.
  • 5월, 성덕왕비를 세웠다.
  • 우두주(牛頭州)에서 상서로운 풀을 바쳤다.
  • 가을 7월, 임금이 관원을 시켜 영흥사(永興寺)와 원연사(元延寺)의 두 사찰을 수리하도록 명하였다.
  • 8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떼가 나타났다.
  • 시중 조량이 사직하였다.

【기원후 755년】 경덕왕 14년

  • 14년(서기 755)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熊川州) 사람 향덕(向德)이 가난하여 아버지를 봉양할 수 없어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그의 아버지에게 먹였다. 임금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선물을 후하게 주고 또 깃발과 표지를 세웠다.
  • 망덕사(望德寺) 탑이 흔들렸다.[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 ‘신라가 당나라를 위하여 이 절을 세운 까닭에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두 탑은 마주 보고 있으며 높이는 13층이다.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였다. 이러한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이 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닌가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여름 4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올렸다.
  • 가을 7월, 죄수들을 석방하고 늙고 병든 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형편에 따라 곡식을 나눠 주었다.
  • 이찬 김기(金耆)를 시중으로 삼았다.

【기원후 756년】 경덕왕 15년

  • 봄 2월, 상대등 김사인이 해마다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난 사실을 들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는 시국 정치의 옳고 그름을 극렬하게 비평한 것이었다.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 들였다.
  • 임금이 당나라 현종이 촉(蜀) 땅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成都)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현종은 5언 10운 시를 직접 짓고 써서 임금에게 보내며 말했다.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잘하고 예, 악 및 대의명분을 훌륭하게 실행에 옮기므로 시 한 수를 지어 주노라.
    천지사방은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있으나
    세상만물은 모두 중심을 가지고 있네.
    구슬과 비단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으나
    산 넘고 물 건너 상도(上都, 중국의 서울)로 찾아든다.
    아득히 생각하면 먼 동방 신라는 막혔어도
    해마다 신라는 황제를 위해 움직였네.
    아득히 먼 땅의 끝
    깊고 푸른 바다 한쪽 구석에 있지만
    대의명분 지키는 나라로 불리우니
    어찌 산 다르고 물 다른 나라라고 부르겠는가?
    사신은 돌아가서 풍속교화를 전하고
    사람들은 찾아와서 법과 제도를 익힌다.
    의관은 예의범절에 맞출 줄 알고
    충성과 신의는 유교를 존중할 줄 안다.
    성실도 하여라, 하늘이 굽어 볼 것이오
    현명하기도 하여라, 덕은 외롭지 않으리!
    깃발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같으니
    보내 준 후한 선물 정성이 넘친다.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과 서리에도 영원히 변하지 말라.”
    현종이 촉 지방에 갔을 때 신라가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황제가 있는 곳까지 찾아가 조공하였으므로 그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지어 준 것이다. 시구 중의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 서리 맞아도 영원히 변하지 말라.’고 한 것은 옛날의 시구인 ‘강한 바람이 불어야만 강한 풀을 알게 되고 정치가 문란한 뒤에야 지조 있는 신하를 알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선화(宣和) 연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의(金富儀, 김부식의 동생)가 이 시의 각본(刻本)을 가지고 변경(汴京, 북송의 수도 개봉)에 가서 관반학사(舘伴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여주었다. 이병은 이것을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는 양부(兩府)와 여러 학사들에게 널리 돌려서 보이고 의견을 말하기를 “진봉시랑(進奉侍郞)이 올린 시는 틀림없는 명황(明皇, 당 현종)의 글씨이다.”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 여름 4월, 큰 우박이 내렸다.
  • 대영랑(大永郞)이 흰 여우를 바쳤으므로 남변 제일(南邊第一)의 직위를 주었다.

【기원후 757년】 경덕왕 16년

  • 16년(서기 757) 봄 정월, 상대등 사인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신충(信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 3월,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월급제를 폐지하고 다시 녹읍을 주었다.
  • 가을 7월, 영창궁(永昌宮)을 중수하였다.
  • 8월, 조부(調府)에 사(史) 두 명을 더 두었다.
  • 겨울 12월,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 경북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30현을 소속시켰다. 삽량주(歃良州)를 양주(良州, 경남 양산)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소속시켰다. 청주(菁州)를 강주(康州, 경남 진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한산주(漢山州)를 한주(漢州, 경기 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소속시켰다. 수약주(水若州)를 삭주(朔州, 강원 춘천)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웅천주(熊川州)를 웅주(熊州, 충남 공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소속시켰다.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 강원 강릉)로 고치고 1주 9군 25현을 소속시켰다.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 전북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소속시켰다. 무진주(武珍州)를 무주(武州, 광주)로 고치고 1주 14군 44현을 소속시켰다.[‘양주(良州)’는 ‘梁州’라고도 한다.]

【기원후 758년】 경덕왕 17년

  • 17년(서기 758) 봄 정월, 시중 김기가 죽었으므로 이찬 염상(廉相)을 시중으로 삼았다.
  • 2월, 임금이 교서를 내려서 내외의 관원을 막론하고 휴가를 청해 만 60일 이상 얻은 자는 해직으로 인정하였다.
  • 여름 4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자를 선발하여 내공봉(內供奉)에 충원하였다.
  • 율령 박사(律令博士) 두 명을 두었다.
  • 가을 7월 23일 왕자가 탄생하였다. 우레와 번개가 심하였고 사찰 16곳에 벼락이 쳤다.
  • 8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기원후 759년】 경덕왕 18년

  • 18년(서기 759) 봄 정월,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侍郞)으로, 대사를 낭중(郞中)으로 고치고 집사사지를 집사원외랑(執事員外郞)으로, 집사사를 집사랑(執事郞)으로 개칭하였다. 조부ㆍ예부ㆍ승부ㆍ선부ㆍ영객부ㆍ좌우의방부ㆍ사정부ㆍ위화부ㆍ예작전ㆍ태학감ㆍ대도서ㆍ영창궁 등의 대사를 주부(主簿)로 개칭하였으며 상사서ㆍ전사서ㆍ음성서ㆍ공장부ㆍ채전 등의 대사를 주서(主書)로 개칭하였다.
  • 2월, 예부의 사지를 사례(司禮)로, 조부의 사지를 사고(司庫)로, 영객부의 사지를 사의(司儀)로, 승부의 사지를 사목(司牧)으로, 선부의 사지를 사주(司舟)로,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司例)로, 병부의 노사지를 사병(司兵)으로,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司倉)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 3월, 혜성이 나타났다. 이 혜성은 가을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기원후 760년】 경덕왕 19년

  • 19년(서기 760) 봄 정월, 도성 동쪽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이를 귀신이 치는 북소리라고 말하였다.
  • 2월, 궁궐 안에 큰 연못을 파고 또한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月淨)과 춘양(春陽) 두 다리를 놓았다.
  • 여름 4월, 시중 염상이 관직에서 물러났기에 이찬 김옹(金邕)을 시중으로 삼았다.
  • 가을 7월, 왕자 건운(乾運)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기원후 761년】 경덕왕 20년

  • 20년(서기 761) 봄 정월, 초하룻날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였고 햇무리가 보였다.
  • 여름 4월, 혜성이 나타났다.

【기원후 762년】 경덕왕 21년

  • 여름 5월, 오곡(五谷)ㆍ휴암(鵂巖)ㆍ한성(漢城)ㆍ장새(獐塞)ㆍ지성(池城)ㆍ덕곡(德谷)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 가을 9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기원후 763년】 경덕왕 22년

  • 여름 4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 가을 7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뽑혔다.
  • 8월, 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두 번 피었다.
  •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사직하였다.
  • 대나마 이순(李純)은 임금이 총애하는 신하였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갔는데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임금을 위하여 단속사(斷俗寺)를 세우고 그곳에서 살았다. 그 후에 임금이 풍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즉시 궁문으로 찾아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제가 듣건대 옛날에 걸(桀)ㆍ주(紂)가 주색에 빠지고 음탕한 쾌락에 빠져 그칠 줄을 모르다가, 이로 인하여 정치가 문란해지고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앞에 가는 수레바퀴가 엎어지면 뒤 수레는 마땅히 이를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시고 스스로 새롭게 바꾸어 국가를 영원히 보존하소서.”
    임금은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그치게 하고 그를 내실로 들게 하여 도리의 오묘함과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며칠 동안이나 들었다.

【기원후 764년】 경덕왕 23년

  • 봄 정월, 이찬 만종(萬宗)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양상(良相)을 시중으로 삼았다.
  • 3월, 혜성이 동남쪽에 나타나고 용이 양산(楊山)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날아가 버렸다.
  • 겨울 12월 11일, 크고 작은 유성이 나타났는데 이를 본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기원후 765년】 경덕왕 24년

  • 24년(서기 765) 여름 4월, 지진이 났다.
  •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황제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 벼슬을 주었다.
  • 6월, 유성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 이달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모지사(毛祇寺)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옛 기록에는 ‘영태(永泰) 원년(서기 765) 을사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舊唐書)』와 『자치통감(資理通鑑)』에는 모두 ‘대력(大曆) 2년(서기 767)에 신라왕 헌영(憲英)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아마도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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