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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 [景明王, AD. ?~924] 신라 제54대 국왕(AD. 917~924)
【개인 정보】
- 이름 : 박승영(朴昇英)
- 출생 : 미상 – 경명왕의 출생연도는 미상이지만, 학계에서는 경명왕이 894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사망 : 기원후 924년 8월(음력)
재위 : 기원후 917년 7월(음력) ~ 기원후 924년 8월(음력) - 전임 : 신덕왕
후임 : 경애왕
【가계 정보】
- 부왕 : 신덕왕(神德王, ?~917, 재위 : 912~917)
모후 : 의성왕후 김씨(義成王后 金氏)- 동생 : 경애왕(景哀王, ?~927) – 신라 제55대 국왕(AD. 924~927)
- 왕비 : 장사택(長沙宅) – 각간(角干) 김대존(大尊)의 딸
- 장남 :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 밀양 박씨 시조
- 차남 : 고양대군 박언성(朴彦成) 고령 박씨 시조
- 3남 : 속함대군 박언신(朴彦信) 함양 박씨 시조
- 4남 : 죽성대군 박언립(朴彦立) 죽산 박씨 시조
- 5남 : 사벌대군 박언창(朴彦昌) 상주 박씨 시조
- 6남 : 완산대군 박언화(朴彦華) 전주 박씨 시조
- 7남 : 강남대군 박언지(朴彦志) 순천 박씨 시조
- 8남 : 월성대군 박언의(朴彦義) 경주 박씨 시조
- 딸 : 상화공주(尙和公主)
사위 : 백창직(白昌稷)
【경명왕 연보】
【기원후 917년】 경명왕 원년
- 경명왕(景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영(昇英)이며, 신덕왕(神德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 8월, 임금의 동생 이찬 위응(魏膺)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유렴(裕廉)을 시중으로 삼았다.
【기원후 918년】 경명왕 2년
- 봄 2월, 일길찬 현승(玄昇)이 반역하여 처형당하였다.
- 여름 6월, 궁예 부하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太祖, 왕건)를 추대하자, 궁예가 도망가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 고려 태조가 왕위에 올라 원년이라 일컬었다.
- 가을 7월, 상주(尙州)의 도적 두목 아자개(阿玆盖)가 사자를 보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기원후 919년】 경명왕 3년
-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소상(塑像)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에서 소리가 났는데, 개가 짖는 것과 같았다.
- 상대등 김성(金成)을 각찬으로 삼고, 시중 언옹(彦邕)을 사찬으로 삼았다.
- 우리 태조가 송악군(松岳郡)으로 도읍을 옮겼다.
【기원후 920년】 경명왕 4년
- 봄 정월, 임금이 고려 태조와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를 맺었다.
- 2월,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 겨울 10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진례(進禮)로 진군하였다. 임금이 아찬 김율(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바로 물러갔다.
【기원후 921년】 경명왕 5년
- 봄 정월, 김율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이 저에게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들었다. 이른바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과 성대(聖帶)인데, 불상과 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한가?’라고 물었는데, 제가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
아는 자가 없었다. 이때 황룡사(皇龍寺)에 나이 90세가 넘은 스님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그것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보대(寶帶)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이 차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오면서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임금이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따로 날을 택하여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은 맬 수가 없었다. - 사관이 논평한다.
옛날 명당에 앉아서 나라를 이어받을 옥새를 잡고 아홉 개의 솥을 진열하는 것이 마치 제왕들의 성대한 일인 것과 같지만, 한유(韓愈)가 논하기를 “하늘과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태평성대의 기초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세 가지 기물을 중요하다고 여긴 것은 과장된 자의 말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신라의 소위 세 가지 보물은 역시 사람이 만든 사치한 물건일 뿐이니, 나라를 위하여 어찌 꼭 필요한 것이겠는가? 『맹자(孟子)』에는 “제후의 보배가 세 가지이니, 곧 토지ㆍ백성ㆍ정치”라고 하였고, 『초서(楚書)』에는 “초나라에는 보물로 삼을 것이 없고, 오직 선을 보배로 삼는다.”고 하였다. 만약 이것을 국내에서 실천하면 족히 한 나라를 선하게 할 것이며, 나라 밖에서 추진한다면 족히 천하가 은혜를 입을 것이다. 이밖에 또 무엇을 보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전설을 듣고 물었을 따름이며, 숭상할 것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 2월, 말갈(靺鞨)의 일부인 달고(達姑)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때 태조의 장수 견권(堅權)이 삭주(朔州)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임금이 기뻐서 사신에게 편지를 보내 태조에게 사례하였다.
- 여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 가을 8월, 메뚜기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기원후 922년】 경명왕 6년
- 봄 정월, 하지성(下枝城) 장군 원봉(元逢)과 명주(溟州) 장군 순식(順式)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하여 원봉의 본성을 순주(順州)로 삼고,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었다.
- 이달에 진보성(眞寶城) 장군 홍술(洪述)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기원후 923년】 경명왕 7년
- 가을 7월,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 장군 양문(良文) 등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 임금이 창부시랑(倉部侍郞) 김낙(金樂)과 녹사참군(錄事叅軍) 김유경(金幼卿)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장종(莊宗)이 물건에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기원후 924년】 경명왕 8년
- 봄 정월,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가 역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 여름 6월, 임금이 조산대부(朝散大夫) 창부시랑 김악(金岳)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그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朝議大夫試衛尉卿)의 관직을 주었다.
- 가을 8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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