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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고구려 19대 국왕]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412)

by [수호천사] 202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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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9대 국왕]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91~412)

 

  • 고구려 제19대 국왕(재위 : 391년 5월 ~ 412년 10월)
  • 출생일 : 374년
  • 사망일 : 412년 10월(음력)
  • 부친 : 고국양왕
  • 모친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장수왕, 미상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이름은 담덕(談德) 또는 안()으로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의 시호가 전해진다.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374년] 소수림왕 4년

 

당시 국왕이었던 소수림왕의 동생인 왕자 이련(伊連,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아! 옛날 시조 추모왕(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중략)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18세에 왕위에 올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칭하였다.
— 광개토대왕릉비

 

시조 동명성왕의 17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동명성왕부터 광개토대왕까지는 13세손이므로 최대 4명의 존재가 누락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초기의 국왕들(태조대왕ㆍ차대왕ㆍ신대왕)의 비정상적인 수명과 형제 상속에 대한 의문이 남게 되었다.

 

[384년]

 

큰아버지인 소수림왕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아버지 고국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3861, 태자로 책봉되었다.

 

391,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년도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는 392년에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과는 약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호는 영락(永樂)이다.

 

고담덕이 성장하던 소년 시절의 고구려는 내적으로 고국원왕 시대에 손실되었던 군사력이 다시 강화되고, 소수림왕 시대에 이루어진 통치 체제의 정비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는 영 좋지 않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서쪽인 요동에는 할아버지 고국원왕 시절 환도성을 털어간 전적이 있던 선비족의 연나라(전연)가 저족의 전진한테 잠깐 멸망했다가 다시 일어나(후연) 요동과 화북을 휩쓸었고, 남쪽으로는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가 여전히 한반도의 패권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서북으로는 거란이라 불리기 시작한 일군의 유목 부족이, 동북으로는 동부여가 자리 잡아 지속적으로 배후의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고달가의 정벌 이래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던 숙신도 이 즈음에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91년] 영락 원년

 

아버지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새 나라의 연호는 영락(永樂)이다.

 

[392년] 영락 2년

 

광개토왕은 3927월에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해서 석현성 등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秋七月、南伐百濟、拔十城。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가을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무너뜨렸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전쟁포로 500구를 사로잡고, 또 본국의 잡혀간 백성 10,000명을 불러서 타일러 돌아왔다.

 

9월에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8(378)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

 

冬十月, 攻䧟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撃二十日, 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393년] 영락 3년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에서 격퇴하였다.

광개토왕은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는 9개 절을 평양에 창건하였다.

 

[394년] 영락 4년

 

394년에는 수곡성(水谷城)에서 백제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394년에 고구려는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쌓았다.

 

[395년] 영락 5년

 

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군 8000여 명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395년에는 광개토왕이 염수(鹽水)로 진출하여 거란족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수없이 많은 소, , 양떼들을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396년] 영락 6년

 

396년 광개토왕이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백제 아신왕에게서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항복을 받아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고 개선하였다.

 

[399년] 영락 9년

 

광개토왕이 평양(平壤)으로 순행하였다.

백제와 왜()는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는 평양(平壤)으로 사신을 보내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400년] 영락 10년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에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이때 왜군은 금관가야 종발성까지 퇴각하였고, 고구려군은 금관가야 지역까지 쫓아가 왜군을 격퇴시킨다.

 

광개토왕은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면서 신라 왕을 내물 마립간에서 실성 마립간으로 교체한다.

 

4002월에 광개토왕의 고구려 주력군이 신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을 때 후연 왕 모용성은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공격한다.

 

[402년] 영락 12년

 

402년에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404년] 영락 14년

 

광개토왕이 대방(帶方) 지역으로 쳐들어 온 백제와 왜군을 궤멸시켰다.

 

광개토왕이 404년에도 후연을 정벌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연군(燕郡)까지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연군은 지금의 베이징 근방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 기록에 따라 베이징 일대까지 정복했다는 주장이 있다.

 

[405년] 영락 15년

 

후연의 모용희가 군대를 몰아 요동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모용희는 요동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모용희가 동행한 황후 부씨와 함께 성을 깎아버리고 가장 먼저 입성하겠다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를 틈타 고구려군이 방어 태세를 정비하여 결국 요동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한다.

 

[406년] 영락 16년

 

후연이 공격해오자 406년 목저성(木抵城)에서 격파하여 요동 점령을 확고히 하였다.

 

[407년] 영락 17년

 

광개토왕은 5만 군대를 동원하여 후연 군대를 격파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돌아오는 길에 후연의 6개 성을 점령하였다.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南燕)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408년] 영락 18년

 

후연이 망하자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였다. 408년에 후연과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영락 184, 광개토대왕은 왕자 고거련(장수왕)을 태자로 삼았다. 7월 나라 동쪽에 독산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그곳으로 옮겼다. 비교적으로 인구가 빈약한 동쪽에 평양의 반동적인 인구를 이주시켜 평양 지배를 강화하고, 동쪽을 개척하면서 동부여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8월 남쪽을 순행했다. 아마 백제ㆍ왜ㆍ가야를 염두에 둔 순행이였을 것이다.

 

[409년] 영락 19년

 

409년에는 광개토왕이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으며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410년] 영락 20년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412년] 영락 22년

 

412년 광개토왕이 서거하였다. 삼국사기에는 413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장수왕은 414년에 능비를 세우고 유언에 따라 수묘인을 두어 왕릉을 관리하게 하였다.1880년도에 발견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 사업이 기록되어 있으며, 평생에 걸쳐 64개 성과 1,400촌을 공취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능과 생전의 훈적(勳績)을 기록한 능비(陵碑)414년에 건립되었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성 지안 현에 남아 있다.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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