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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고구려 18대 국왕] 고국양왕(故國壤王, 384~391)

by [수호천사] 202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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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8대 국왕] 고국양왕(故國壤王, 384~391)

 

  • 고구려 제18대 국왕(재위 : 384년 11월 ~ 391년 5월)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391년 5월(음력)
  • 부친 : 고국원왕
  • 모친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광개토왕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이름은 이련(伊連) 또는 어지지(於只支)로 고국원왕의 둘째 아들이다.

 

[384년]

 

후사가 없이 소수림왕이 붕어하자 고국원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故國壤王 諱伊連 【或云於只支】 小獸林王之弟也 小獸林王在位十四年薨 無嗣 弟伊連卽位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이름은 이련(伊連)혹은 어지지(於只支)라고도 하였다.이고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소수림왕이 재위 14년 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 이련이 즉위하였다.
삼국사기<고국양왕 본기>

 

[385년]

 

소수림왕 시절에는 부견의 전진이라는 거대 국가가 중국의 화북 지역을 확 휘어 잡고 있어서 요동 방향으로 진출을 할 수 없었지만, 마침 고국양왕이 즉위한 383~384년은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해 순식간에 무너지고, 다시 화북 지역의 혼란이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나뉘어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가까운 요동에는 전연의 후신인 후연이 세워지게 되는데, 바로 고국원왕 시절 고구려 수도까지 침입해서 왕릉을 도굴해 갔던 철천지 원수 모용선비족의 모용수가 다시 재건한 국가였다. 고구려로서는 후연이 자리잡기 이전에 고국양왕의 할아버지 미천왕과 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들을 처단할 필요가 있었다. 3856월 고국양왕은 군사 4만으로 후연을 습격해 요동군과 현도군 2군을 빼앗고 남녀 1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후연을 건국한 세조 성무제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이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38511, 요서의 여암을 토벌한 후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 땅도 도로 빼앗아갔다. 모용수는 386년 황제로 즉위하면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고, 고구려는 요동 진출을 뒤로 미뤄야 했다.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다.

 

[389년]

 

백제의 공격을 받았다.

 

[390년]

 

390년 백제 진사왕이 보낸 진가모의 군대에게 도곤성을 빼앗겼다.

 

[392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실성(實聖)을 인질로 받기도 했으며, 또한 교서를 내려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백성을 위해 토지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였다. 이 해에 왕이 서거하니 고국양(故國壤)에 장사를 지냈다.

 

광개토태왕의 (릉비의) 원년과 고국양왕의 (《삼국사기》 기사의) 말년이 겹치는 것은 승하한 후 즉위한 것이 아니라 생전에 양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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