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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고구려 24대 국왕] 양원왕(陽原王, 545~559)

by [수호천사] 2022.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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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4대 국왕] 양원왕(陽原王, 545~559)

 

  • 고구려 제24대 국왕(재위 : 545년 3월 ~ 559년 3월)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559년 3월(음력)
  • 부친 : 안원왕
  • 모친 : 미상(일본서기에 의하면 중부인)
  • 배우자 : 미상
  • 자녀 : 평원왕

 

양원왕(陽原王)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양강왕(陽崗王)이라고 하며, 휘는 평성(平成)이다. 위서(魏書)에는 이름이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533년]

 

안원왕(安原王)의 장남이며, 533년에 태자가 되었다.

 

[545년]

 

3월에 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6(545), 7(546) 조에는, 백제본기(百済本記)에 인용한 기사에는 양원왕의 즉위에는 고구려 내부에 내분이 있었다고 한다. 향구상왕(香丘上王, 안원왕)에게는 정부인(正夫人)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고, 중부인(中夫人, 2왕비)8살 아들인 평성을 왕(양원왕)으로 옹립 하였다. 그러나 소부인(小夫人, 3왕비)에도 아들이 있었고, 안원왕이 병에 걸리면서, 중부인의 친가인 추군(麁群)과 소부인의 친가인 세군(細群)이 왕위를 다투었고, 이 과정에서 추군이 이기고, 세군 2천명을 몰살하였다고 한다. 다만, 삼국사기의 태자 옹립 기사(533)와 백제본기 8세 즉위(545)와는 상충(相衝)된다.

 

학계에서는 양원왕이 즉위하면서 귀족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으며 특히 귀족들이 대대로가 되기 위해 수도 한복판에서 사병을 이끌고 서로 싸우는데도 불구하고 왕은 문을 걸어 잠그고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전까지는 국상 등 왕의 지휘를 받는 고위 관료가 중요한 정보였는데 양원왕 이후로는 최고 관료 직위가 아니라 일종의 관등인 대대로 자리를 놓고 귀족들끼리 분쟁을 벌이는 기사가 늘어나기도 한다.

 

[547년]

 

백암성을 고쳐 쌓고, 신성을 수리하여 전쟁을 대비하였다.

 

[548년]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장군 주진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실패하였다.

 

[550년]

 

백제가 쳐들어와서 도살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틈을 노린 신라군에게 고구려 두 성을 함락되었다.

 

북조의 동위(東魏), 북제(北齊)와 조공을 계속하고 남조와의 교류는 중단하였다. 북제에서는 550년에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 侍中 驃騎大将軍 領護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으로 책봉 되었다.

 

[551년]

 

돌궐군이 쳐들어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싸우게 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 해에 다시 신라가 쳐들어와서 1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552년]

 

장안성을 쌓았다.

동국통감에는 왕산악이 거문고를 만든 시기가 바로 552(양원왕 8)이라 기록하고 있다.

 

[553년]

 

553년 백제를 공격해 백합야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였다(일본서기에만 등장함). 이 때 백제의 태자 창과 고구려 장수의 일기토가 전해내려 오는데 엄청난 무력을 앞세워 백제 태자 창이 승리를 거두었다.

 

[554년]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557년]

 

왕자 양성(陽成)을 태자로 삼았다. 그 해 10월에 환도성의 장수 간주리(干朱理)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사형당했다.

 

[559년]

 

사망하고 아들 평원왕이 즉위하였다.


[가족관계]

 

  • 아버지 : 안원왕(安原王, ?~545) - 제23대 국왕
  • 어머니 : 미상(일본서기에는 중부인으로 되어 있다)
  • 왕비 : 미상
  • 아들 : 평원왕(平原王, ?~590) - 제25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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