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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한국사]

[고구려 28대 국왕] 보장왕(寶臧王, 642~668)

by [수호천사] 2022.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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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8대 국왕] 보장왕(寶臧王, 642~668)

 

  • 재위 : 642년 10월 ~ 668년 9월(음력)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682년 12월(음력)

 

보장왕(寶臧王)의 휘는 장() 또는 보장(寶臧)이다. 고구려는 묘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보장왕의 묘호는 없고, 고구려가 멸망했기 때문에 시호도 받지 못했다. 평원왕의 손자이자 영양왕의 조카이며 영류왕의 친동생인 대양왕(大陽王)의 맏아들이다(영류왕이 영양왕의 동생이니 영류왕의 조카도 된다).

 

[642년]

 

막리지의 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보장왕이 즉위하자 나라의 모든 권력은 오직 연개소문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었다.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오르고 이전 귀족회의가 가지고 있던 병권(兵權)과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하였으며,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 자리에 오르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연개소문은 외교정책을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으로 이끌었다.

 

신라에서는 백제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요지인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백제와의 공방전에서 전세가 점차 불리해져갔다. 이에 따라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해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이러한 신라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643년]

 

1월 아버지를 대양왕으로 추존하였다. 3월 당나라에 도교를 구하자, 당에서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經)을 보내왔다. 6월에는 당 태종이 보장왕을 상주국 요동군왕 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王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9월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으로부터 도와 달라며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해 권력을 장악한 일을 빌미로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던 당 태종은 기뻐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려고 신라와 손을 잡는다.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변방의 성곽을 수리하며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백제와 손을 잡게 된다.

 

[644년]

 

1월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라를 협공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과거에 신라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전에는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개소문은 그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들을 죽이고 그 백성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지금은 또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출전 준비를 하였다

 

[645년] 고구려-당 전쟁

 

644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5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과 거란으로 구성된 이민족의 군대도 다수 동원되었다.

 

당 태종은 정예군 6만 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요동을 향해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 사령관인 이세적(李世勣)이 정예 선발대 6만 명을 이끌었고 현도성으로 향했다. 이도종에게 6만의 군사로 신성을 치게 하고, 장검에게 6만의 군사로 건안성을 치게 했다.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이 뒤를 따랐다. 거기에 당 태종이 친히 거느린 6도행군 36만이 뒤따랐다. 또한 장량(張亮)이 상륙군 43000을 포함한 수군 10만명, 1000척의 함대로 등주에서 출발하였다. 본대가 80만에 이르렀지만 새로운 수레의 발명으로 수송부대가 본대의 2배에서 1/4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수송부대를 합쳐서 100~104만에 이르는 부대였다.

 

이세적(李世勣)의 당의 선봉 요동도행군은 유성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을 향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 하지만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크게 돌아서 우회하여, 고구려가 예상치 못하던 북쪽 통정진으로 진군하였다. 당의 대군은 고구려 주력이 방어하고 있던 강한 곳을 피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기습 도하하였다. 과거 고구려-수 전쟁때 수나라가 정공법으로 요하를 건너려고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치뤘던 것에 비하면 한층 전략적으로 연구한 허허실실의 기습이었다. 당나라 군도 고구려의 방어를 만만치 않게 본 결과이다.

 

마침내 여름 51(음력 41), 이세적이 이끄는 당의 선봉 요동도행군은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각 성들은 모두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로 들어갔다. 작은 현도성이 쉽게 함락되자 55(음력 45), 선봉부대의 부대총관 강하왕 이도종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요동지역 제1의 요지인 신성에 이르렀고, 절충도위 조 삼량은 기병 10여 명을 데리고 직접 성문을 위압하였다. 하지만 10여 일간의 신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515(음력 415), 당군은 군량이 보관되어 있던 개모성으로 기민하게 이동하였다. 연개소문은 주변의 작은 성 가시성의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치열한 공방전에 당나라 행군총관 강확이 활에 맞아 전사하였지만 마침내 (526(음력 426) 이 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을 쳐서 빼앗고, 개모성의 인구 2만 호와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개칭하였다.

 

한편 두 번째 남쪽 방면으로는 영주 도독 장검이 이민족으로 편성된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의 남쪽 하구를 건너 건안성을 급습한다. 당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고구려 군사는 격파되어 수천 명이 전사하였고 건안성으로 후퇴하였다.

 

세 번째 해로를 통한 방면으로는 장량(張亮)이 당의 수군을 거느리고 산동의 동래로 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다.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하지만 유격전에 명성을 떨친 당나라 장수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데리고 선봉으로 야습을 시행하였고 부총관 왕 대도가 먼저 성에 올랐다. 531(음력 51),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천혜의 요새였던 비사성은 예상과 달리 당의 야간 기습에 너무나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1, 2차 요동성 전투를 통해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백암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군대가 신성과 건안성은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을 때 고구려 기마부대가 주필산에서 싸우게 되었다.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당나라 군대는 곧바로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다.

 

안시성의 처절한 항전으로 결국 당태종 이세민은 645918일에 철수를 명령한다.

 

[647년]

 

647년 보장왕 6, 당나라 태종이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지속적으로 국지적인 소모전을 통해 고구려의 변경을 끊임없이 침범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피폐하게 만든 후에 고구려를 크게 침공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이해 신성과 적리성을 공격하였다.

 

[648년]

 

당나라가 박작성을 공격하였다.

 

[649년]

 

당나라 태종이 사망하였다. 당 태종은 유언으로 조칙을 내려 더 이상의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게 하였고 이로써 당나라와의 국지전은 중단되었으며 그 해 대거 고구려를 침공하려던 당의 계획 또한 백지화되었다.

 

[654년]

 

654년 보장왕 13년 겨울 10, 고구려는 당에 빼앗긴 거란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장수 안고로 하여금 고구려 군과 말갈군을 보내어 거란을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거란의 송막 도독 이굴가가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신성에서 고구려 군을 기습하여 고구려 군 5백명을 참살하고 7백여필의 말을 빼앗는 전과를 얻고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 내어 고구려 원정군을 물리친다.

 

[655년]

 

655년 보장왕 14년 봄 정월, 고구려가 백제·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 성을 점령하였는데, 이렇게 고구려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백제, 고구려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루며 수세에 몰린 신라의 김춘추는 위기타개책으로 또 다시 당에게 구원요청을 하였고 당나라가 이를 받아들여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시 소규모의 고구려 침공을 계획하게 된다.

 

이에 655년 보장왕 142, 당나라는 신라를 구원 요청 때문에 영주 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위 중랑장 소정방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정명진은 과거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때 고구려의 비사성을 야간 기습하여 함락 시켰던 유격전에 능하여 명성을 떨치는 유격전의 적임자였다. 여름 5, 또 다시 정명진이 이끄는 당군이 요하를 건너 오자, 고구려 군사는 상대방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가 전투를 벌였다. 정명진 등은 고구려를 맹공하여 크게 격전이 벌어졌고, 이 때 고구려쪽은 군사 1천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정명진의 당나라 군은 고구려의 외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바로 철수했다.

 

[658년]

 

보장왕 17년 여름 6, 당나라 영주 도독 겸 동이 도호 정명진(程名振)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요서지역의 고구려 영토를 기습 침범하였다. 당나라 설인귀는 이 때 부장이 아닌 처음으로 군을 직접 지휘하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적봉진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군사 100여명을 포로로 잡는 공을 세운다. 당나라의 침범이 예사롭지 않자 이에 고구려에서는 대장 두방루(豆方婁)에게 3만의 병사를 붙여 파견하여 요격하였고 정명진과 설인귀의 당나라 군에 대적하여 크게 격전이 벌어졌다.

 

[659년]

 

보장왕 18년 겨울 11, 이번에는 당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가 처음으로 단독으로 군대를 지휘하여 고구려 요서지역 영토를 침범한다. 이에 고구려는 대장 온사문(溫沙門)이 이에 요격하러 출병, 횡산(요양부근의 화표산)에서 설인귀의 부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하였다.

 

또한 이어서 설인귀의 당나라 군은 석성으로 침입하여, 고구려 군과 전투를 한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 당나라 측 사서에 당시 지휘하던 설인귀의 활약이 묘사되어 있는데 설인귀는 단기로 진격하여 고구려 군의 궁사를 생포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석성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고구려 군에는 한 신궁(神弓)이 있어서 원거리에서 연속하여 당나라 군의 병사 10여명을 사살하는 신기를 보이자, 설인귀가 이에 활을 맞 쏘지 않고 직접 말을 몰고 달려 들어서 그 고구려 신궁을 생포하였다.

 

[660년]

 

660년 음력 6월에 소정방이 군사 13만 명을 이끌고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침략하였다. 나ㆍ당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661년]

 

보장왕 20, 이에 고구려는 장군 뇌음신(惱音信)과 말갈 장군 생해(生偕)를 보내서 신라의 술천성(述川城, 현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일원)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이어서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의 용맹한 반격으로 회군하였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ㆍ당 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당나라 군은 평양을 직접 공격하였고, 당 고종은 44천 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은 왜국으로부터의 구원군의 지원을 받으며 나ㆍ당 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 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 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 군은 그 해 음력 4월에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수륙양공 작전을 구사하며 평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나라 군이 패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밀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662년]

 

662년 방효태가 이끈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사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살되었다. 평양성을 공략하던 소정방의 군대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포위를 풀고 황급히 퇴각하였다.

 

[664~666년]

 

연개소문 사망하다.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동생인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연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연남생의 측근을 없애고 연남생을 소환하려 하였다. 이에 연남생은 당나라로 탈출하여 투항하였다.

 

[666년]

 

8월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2월 연남생을 앞장세워 이적, 글필하력, 학처준, 백안륙 등에게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667년]

 

667년부터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여러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다.

 

[668년]

 

음력 6월에는 보장왕이 머무르던 평양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고 당나라로 끌려갔다. 보장왕이 항복했음에도 남아있던 고구려 병사들은 여전히 당나라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677년]

 

당나라로 압송된 보장왕은 전쟁에 대한 직접 책임이 없다 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원외동정(員外同正)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그들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무르다가 677년에 요동도독(遼東都督) 조선군왕(朝鮮郡王)에 임명되어 요동에 머물렀다.

 

과거 고구려의 중심 지역이었던 요동 지방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이 거세지자 그를 677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에 봉하고 안동도호부로 부임하게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681년]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말갈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당나라 공주(邛州)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682년에 사망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보장왕의 시신을 장안으로 옮겨 돌궐의 일릭 카간(頡利可汗)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으며,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였다.

 

요동에 도착한 보장왕은 기회를 틈타 말갈과 손을 잡고 고구려 부흥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실패했고, 681(신문왕 1) 고구려와는 대륙 반대편인 촉 땅에 유배당했으며 죽은 후 위위경에 봉해지면서 돌궐의 힐리가한 무덤 옆에 묻혔다.


나라를 팔아 넘긴 연남생은 사후 시호를 받고 당나라 조정에서 제사를 치러주는 등 화려하게 살다 갔지만 보장왕은 나라가 망하고도 다시 한 번 독립을 시도하다가 초라하게 죽었다. 허수아비 군주였지만 이후 고려, 조선 등 후대 왕조들의 마무리를 생각한다면 그래도 망국의 군주들 중에서는 선방했다고 할만하다. 연남생의 증손자인 천비(연비)의 묘지명에서는 보장왕의 외손자 왕휘가 등장하는데 왕휘의 딸이 천비와 결혼했다고 한다.

 

보장왕이 죽은 뒤 당나라는 그의 손자인 고보원(高寶元)686조선군왕(朝鮮郡王)’에 임명했으며 696년 거란족 반란의 여파로 인해 요동에 대한 당의 지배권이 약화되자 698년 고보원을 좌응양위대장군 충성국왕(左鷹揚衛大將軍 忠誠國王)’으로 임명해 요동에 부임시키려고 했으나 무마되었다.

 

699년 당나라는 다시 보장왕의 아들인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호부에서 격하된 안동도독부의 장관인 안동도독(安東都督)’으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이외에도 보장왕의 후손들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머물며 고구려 유민들을 대표한 고려 조선군왕(高麗 朝鮮郡王)’을 세습했다고 한다. 고덕무에게서 독립 정권인 소고구려가 탄생했다는 학설도 있다.

 

한편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고마신사’(高麗神社)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아들 고약광(高麗若光ㆍ일본 이름 고마노 잣코’)이 유민 1,700여 명을 데리고 정착했으며, 현재까지 그 후손이 고려촌을 이루며 전해지고 있다

 

[가족관계]

 

  • 아버지 : 고대양(高大陽)
  • 어머니 : 미상
  • 왕비 : 미상
  • 장남 : 고복남(高福男)
    손자 : 고보원(高寶元)
  • 차남 : 고덕남(高德男)
  • 삼남 : 고임무(高任武)
  • 사남 : 고덕무(高德武)
  • 오남 : 고련(高連)
  • 아들 : 고인승(高仁承)
  • 아들 : 보덕왕(報德王) 고안승(高安勝)
    손자 : 고진(高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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